


손턴 와일더의 <운명의 다리>가 새로 번역되어 나온 모양이다. 물론 원제는 이번에 나온 번역서의 제목처럼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이지만, 나귀님은 1990년대에 나온 동아출판사의 번역서로 처음 접했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그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다. 중편 소설 분량이다 보니 단행본으로 나온다면 문고본 정도가 적절해 보이는데, 이번에는 국판 판형인 듯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알라딘에 올라온 새로운 번역서의 소개 글에서 "한국에서도 1950년대부터 읽힌 책으로 2025년 '신형철 해제본'으로 4번째 판을 출간한다"라고 떡하니 적어 놓았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1958년 신양사 이호성 번역본, 1994년 동아출판사 유승각 번역본, 2010년 샘터 김영선 번역본 같은 이전 번역본을 표지 사진과 함께 줄줄이 소개해 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설의 번역본이 책 소개에서 열거한 네 가지 외에도 하나 더 있다는 점이다. 나귀님이 가진 <현대미국문학전집>(한국아메리카학회 편역, 시사영어사, 1971)의 제2권에 극작가 이근삼의 번역으로 수록된 "도온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 소개에서 "4번째" 번역본이라고 주장한 내용은 사실과 어긋나게 된다.
차라리 그냥 '예전부터 여러 차례 번역된 책'이라든지, '대략 20년 간격으로 재번역된 책' 정도로만 말하고 넘어갔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굳이 "4번째"라고 단언하다 보니 틀린 셈이다. 또 하나 의아한 점은 저자나 번역자보다 해제를 쓴 '평론가'를 부각시켰다는 점인데, 십중팔구 그 명성을 빌리려는 의도이겠지만 뭔가 배보다 배꼽이 더 커 보이기도 한다.
아울러 평론가와 번역가의 해설은 나귀님이 기억하는 책의 내용과는 살짝 차이가 있어 보이는 점도 뭔가 의아하다. 비록 전문은 읽지 못했지만, 책 소개에 발췌된 부분만 보면 불행과 재난에 대한 위로를 얻을 수 있다고 보는 듯한데, 이 소설은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불운한 최후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회의적이고 실존적인 입장을 줄곧 취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다시 책을 꺼내 뒤적여 보니, 실제로 이 소설은 회의와 희망 모두를 이야기하고 있었음을 뒤늦게야 깨달을 수 있었다. 소설의 제목에서 언급된 다리가 끊어지며 사망자 다섯 명이 발생한 날, 역시나 그 다리를 건너려다가 가까스로 재난을 모면한 수도사는 '왜 그들은 죽고 나는 살았을까?' 하는 의문에서 사망자 다섯 명의 생전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결국 수도사가 내린 결론은 사망자 다섯 명의 죽음에 딱히 어떤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예수가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에서 무너진 망대의 사망자'를 언급하며 더 간략히 요약했듯이, 또는 우주 규모의 부조리극인 '히치하이커 안내서' 소설에서도 반복해서 묘사했듯이, 인생과 세계와 우주는 무자비할 뿐이며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무기력할 뿐이었다.
하지만 수도사의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후일담에서 저자는 무의미하게 죽은 다섯 명과 인연을 나누었던 수녀원장이 그들의 유족과 지인과 새로운 인연을 맺음으로써 뭔가 유의미한 행동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나귀님이 보기에는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마 그래서 기꺼이 망각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 저자는 희망적인 결론을 제시한 셈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어디까지나 살아남은 자들의 몫일 뿐이고, 죽어버린 자들의 몫까지는 아니다. 아울러 책임 소재를 따질 수 없는 소설 속 재난과 달리 (왜냐하면 문제의 다리는 식민지 이전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니까) 세월호나 이태원이나 최근의 제주항공 참사 같은 사건에서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는 체념 대신 정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용돈 6만 원을 가지고 떠났다가 죽어서 돌아온 아이라든지, 그 사실에 분노해 세상 앞에 나섰던 아버지의 과거 행적에서 그 비극의 단서를 찾아내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한 일인 반면, 더 일찍 침몰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만큼 갖가지 문제를 안고 있던 여객선을 방치했던 회사라든지, 결국 침몰시킨 승무원이라든지에 대해서는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테니까.
소설에서 수도사가 사망자의 이력을 조사한 까닭도 종교인의 입장에서 '정의'를 추구하려는 것이었다. 즉 선악을 심판하는 하느님의 정의가 그 비극에 개입되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우리는 참사를 겪을 때마다 운명의 장난에 회의를 느끼면서도, 원인 제공자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고, 그런 다음에나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이겠다.
그러고 보면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모두에서는 정의 추구와 희망 제시가 혼동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사건의 원인을 알아내서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겠지만, 엉뚱하게도 사망자나 유족의 행동이나 이력을 들먹이기 일쑤였고, 유족을 지원한다는 쪽에서도 각종 추모 사업을 내세우면서 어설픈 위로를 남발하지는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드는 탓이다.
급기야 최근의 제주항공 사고에서는 관계 당국의 언론 브리핑에서 초장부터 '추모 사업'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다. 정의를 실현하기도 전에 어설픈 희망부터 언급했으니, 직접 관계가 없는 일반 시청자인 나귀님조차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 앞에서 정의 대신 희망부터 이야기한 것이 과연 옳았을까...
[*] 그나저나 알라딘 책소개에 올라온 1994년 동아출판사 유승각 번역본의 표지 사진은 책껍데기가 없는 하드커버 알맹이만의 모습이다. 참고로 나귀님이 가진 책의 사진을 올려보자면 이렇게 생겼다.

[**] 아래는 극작가 이근삼의 번역으로 "도온턴 와일더"의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수록된 <현대미국문학전집>(한국아메리카학회 편역, 시사영어사, 1971)의 제2권 케이스 뒷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