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리 맥머트리 책을 찾으려고 책장을 뒤지다 보니 (2종 3권인데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지난번에 사다 놓은 토마스 만 정치평론집 <예술과 정치>가 눈에 띈다. 마침 예전에 꺼내 보고 한동안 방치한 예술론집 <숲 속의 예술철학>을 도로 꽂은 직후라서, 이것도 가져가서 함께 꽂으려고 일단 꺼내 뒤적이다 보니, 책 앞에 적힌 플라톤의 인용문이 눈에 들어온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One of the penalties for refusing to participate in politics is that you end up being governed by your inferiors) - 플라톤, <국가>". 토마스 만의 책이라면 십중팔구 독일어에서 옮겼을 터인데, 특이하게도 이 인용문에는 독일어나 희랍어 대신 영역문이 병기되어 있었다.


문득 '플라톤에 이런 구절이 있었나?' 하는 의문도 들었는데, 뭔가 좀 지나치게 신랄한 발언처럼 들려서였다. 최근 검색한 체스터튼의 (실제로는 출처불명인) '무신론자는 아무 거나 믿는다' 명언처럼 혹시 와전된 것은 아닐까 싶어 구글링해 보니, <국가> 제1권 347c에 실제로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박종현 번역본을 꺼내 보니 원래의 문맥은 영 달랐다.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를 당하는 것일세."(101쪽) 희랍어 원문 번역에는 토마스 만 책의 인용문에서 유난히 두드러진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이라는 표현도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토마스 만 책에 병기된 영역문 역시 앞에 함께 나온 번역문보다는 박종현 번역문에 더 가까웠다.


해당 영역문을 직역하자면 "정치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치르는 대가 중 하나는 결국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통치되는 것이다"쯤 된다. 여기에 굳이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집어넣었으니, 이쯤 되면 의도적인 왜곡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듯하다. 게다가 편역서임을 감안하면, 원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번역자/출판사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더욱 이상한 점은 책 앞(15쪽)에 위처럼 왜곡된 인용문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책 뒤(416쪽)에 해당 구절을 전후한 <국가> 제1권 347c의 문장이 여러 개 더 인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해당 구절도 여기서는 적절히 옮겼다. "훌륭한 분들이 스스로 통치에 나서기를 거부할 때 그들이 치르는 가장 큰 대가는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들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인데 앞과 뒤의 인용문이 달리 번역되었으니, 결국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봐야 하는 걸까? 혹시 이 책에 수록된 글 가운데 하나에서 토마스 만이 해당 인용문의 왜곡과 진의에 대해, 또는 플라톤과 <국가>에 대해, 또는 정치 참여에 대해 설명한 것이 있나 뒤적여 보았는데, 막상 관련 내용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았던 듯하니 의아할 따름이다.


더 큰 문제는 <국가>에서의 원래 문맥을 감안할 경우, 위와 같이 똑 떼어서 인용해 놓으면 자칫 오해가 생기기 쉽다는 점이다. 즉 토마스 만 책 앞에 나온 인용문만 보면 마치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최악의 통치자를 낳는다'로 이해하기 쉽지만, 플라톤의 발언 요지는 '훌륭한 사람이 정치를 하지 않으면 훌륭하지 못한 사람에게 통치를 당한다'는 뜻이었다.


즉 플라톤은 선거 같은 일반 대중의 정치 참여를 독려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의 정치 참여의 필연성을 입증하려 위와 같은 논리를 제시했던 셈이다. 따라서 번역자/출판사가 혹시라도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로서 플라톤의 인용문을 집어넣었다고 한다면 문맥의 왜곡이고,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집어넣은 것도 온당하다 볼 수 없다. 


게다가 번역문과 다른 영역문을 병기한 것이며, 달리 옮긴 인용문을 추가한 것도 고의성을 드러내니, 정확한 의도야 불명이라도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면 그저 인용문 하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 책 전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다른 문장은 충실히 번역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앞으로 이 번역자/출판사는 피해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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