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신촌 나간 김에 땡땡거리 옆 지하 헌책방에서 (정부의 단속을 피해 암암리에 운영되는 헌책방이기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빵집 근처 지하에 있기 때문이다) 구입한 책은 달랑 두 권뿐이었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지학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이고, 나머지 하나는 <재앙의 월요일: 사상 최악의 판결들>이라는 문고본이었다.


교육과학사에서 나온 '법학교양총서' 가운데 한 권인데, 최종고가 저술한 올리버 웬델 홈스 약전을 비롯해 일반인도 읽어볼 만한 법학 관련 교양서가 여럿 들어 있는 시리즈다. 비록 번역과 편집은 좋지 않은 편이지만, 최근 다시 번역된 칼 슈미트의 책도 몇 권 있었고, 여성 법조인이 본인의 강간 피해 체험을 서술한 <진짜 강간>이라는 특이한 번역서도 있었다. 


<재앙의 월요일>은 부제에 나온 것처럼 미국 연방대법원의 역대 판결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 22건을 소개하는 책이다. 미국 헌법 200주년인 1987년에 초판이 간행되었는데, 흑인 최초의 연방대법관으로 유명했던 서굿 마셜이 쓴 서문이 달려 있었다. 지금 검색해 보니 35년 후인 2023년에 제5판이 간행되었는데, 수록된 판결은 38건으로 절반 이상 늘어났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름 그대로 연방 헌법에 대한 해석을 담당하는 최고 기관으로,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와도 유사한 기능을 담당한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물론 미국은 여러 주로 구성된 합중국인 까닭에,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면 우리나라와는 많은 차이가 있고, 사실 우리나라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기능 구분이 말끔하지 않아 논란의 불씨는 남아있다고).


"재앙의 월요일(블랙 먼데이)"이라는 제목은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매주 월요일에 선고되던 전통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권, 표현의 자유, 평등권, 형사피고인의 권리, 재판을 받을 권리라는 주제별로 예를 들어 동성애, 음란물, 인종 차별, 여성 참정권, 삼진아웃제 등이 얽힌 사건에 대해 연방대법원이 내린 판결을 분석한다.


보통은 당시의 통념상 불법이라 간주되는 행위가 벌어지고, 이후 경찰과 법원을 거쳐 단죄가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판결 불복이 일어나며 상고하여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온 사례가 대부분이다. 절도 같은 진짜 범죄도 있지만, 경찰의 무리한 단속도 있고, 인종이나 성별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는 뜻에서 활동가들이 의도적 범법 행위로 판결을 구한 경우도 있다.


제목과 부제가 암시하듯 저자가 '오판'이라고 본 판결 중에는 드레드 스콧 사건처럼 시대적 통념에 굴복한 사례가 많지만, 애초에 연방대법원의 기능이 합헌 여부 판단인 이상 '미드'에서 종종 묘사되는 것처럼 파격적이고 극적인 판결을 기대하긴 힘들다. 아울러 이 책에 나온 판결 중 일부는 훗날 뒤집혔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점도 유념할 만하다.


한국 헌법재판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국 연방대법원에 대한 비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대법관의 정치 성향에 따라서 판결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혹이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부각된 '사법의 정치화'와 '정치의 사법화' 논란과도 유사한데, 거의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왔으니 이제는 그 논란조차 연방대법원의 전통 가운데 일부인 셈이 아닐지.


거기에 종신제라는 특성상 일부 대법관은 현직 대통령의 후임자 지명을 저지하기 위해 병중에도 출근을 강행한 일화까지 있었으니,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찬사와 비판 모두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흑인이나 여성이나 기타 소수자 출신 대법관이라 해서 항상 동류에게 유리한 판결만 내린다는 보장은 없으니, 정치 논리로 사법을 재단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된 사례들을 보면, 대법관이라 해서 항상 쉽게 정답을 도출하는 것은 아니어서, 이런 방향으로 가자고 중지를 모았다가도 한두 명이 입장을 선회해서 결론이 뒤바뀐 경우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변덕이나 외압의 결과로 봐야 할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만큼 해석의 여지가 많다고, 또는 법치의 근본적 한계라고 봐야 하지 않으려나.


연방대법원에 재직하는 내내 소수 반대 의견에 서는 경우가 많아서 '위대한 이의제기자'로 일컬어진 올리버 웬델 홈스만 해도, 발달장애인의 강제 불임 시술을 다룬 '벅 앤드 벨' 사건에서 합헌 의견을 내며 "3대째 천치로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일갈해서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자면, 과연 이 세상에 모두를 만족시킬 판결이 있기는 한지 의문도 든다.


사실 '사법의 정치화'와 '정치의 사법화'는 법조계뿐만 아니라 정치권이 야기한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우리나라의 탄핵 심판을 둘러싸고 제기된 갖가지 의혹과 예단에서도 드러났듯이, 심지어는 재판관의 성향이며 출신을 놓고 인신 공격성 발언까지 나왔으니, 이런 '흔들기'를 통해서 헌법재판소의 권위가 실추되며 판결 불복 심리가 팽배했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여야를 막론하고 툭하면 사법부를 소환하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국민 모두에게 법률과 판결에 대한 불신만 조장한 셈이 아닐까. 대통령이고 여당이고 야당이고 간에 기존 법률의 빈틈을 찾아 각자의 입장에 걸맞게 이용하려 들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대통령 권한 대행의 헌법재판관 후보 지명을 놓고 또다시 터진 논란 역시 그 연장이라 할 만하다.


일단 편법의 물꼬를 터 놓았으니 앞으로 여야의 대치 과정에서 법률과 판결을 둘러싼 혼란도 지속되지 않으려나. 급기야 이제는 어떤 판결이 나오더라도 '불복하면 그만이다' 식 태도가 난무하니, 이걸 과연 법치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법조인조차도 난생 처음 가 보는 길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셈이다 보니 혼란도 불가피해 보인다. 


일반 국민이라고 사법부의 존재를 몰라서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차 시비건 층간 소음이건 상식 선에서 적당히 합의하고 넘어가면 되는 일을 일단 소송부터 걸어보고 재판까지 끌고가는 것은 누가 봐도 과도하지 않은가. 그런데 일반 국민조차도 비상식적이라 생각해서 시도하지 않는 일이 정치권에서는 오히려 상식이자 권리로 통한다니 이상한 일이다.


급기야 개헌 주장도 나오던데, 누군가의 일갈처럼 과연 지금의 혼란이 모두 헌법 때문이냐는 의문을 유념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아무리 헌법이라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재앙의 월요일>에 수록된 논란의 판결들이 이미 증명했고, 나아가 편법을 도모하는 세력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지금 우리나라의 혼란스러운 현실이 이미 증명한 셈이니...




[*] 미국 연방대법원에 대한 책으로는 '워터게이트'를 보도한 밥 우드워드의 <지혜의 아홉 기둥>과 제프리 투빈의 <더 나인>이 있지만, 저마다 특정 시기를 다룬 것이다 보니 전체상을 조명하기엔 아쉬워 보인다.(아울러 오역과 오타에 대한 지적이 많다!) <최후의 권력, 연방대법원>이라는 책도 있지만, 대법관이었던 저자 존 폴 스티븐스의 회고가 중심이다 보니 역시나 한계가 있어 보인다. 대법관 개인에 대해서도 전기나 자서전이 여럿 나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될 정도면 십중팔구 이력이나 판결로 인해 유독 주목을 받은 경우이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블랙먼, 판사가 되다>가 그러한데, 여성의 낙태 권리를 인정한 '로 앤드 웨이드' 사건으로 유명한 (또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는 '악명 높은') 대법관 해리 블랙먼(1970-1994 재임)의 전기이다. 여성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93-2020 재임)와 소니아 소토마요르(2009-현재)도 전기와 자서전 등이 여럿 간행된 듯한데, 역설적이게도 판결보다는 오히려 성별과 인종에서 비롯된 상징성 때문에 더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닌가 의심해 볼 만하다. 마찬가지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법관 가운데 한 명인 올리버 웬델 홈스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전기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홈즈 평전: 미국법의 사이비 영웅>은 부제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듯이 흔히 진보 성향으로 평가된 저 인물을 보수의 입장에서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내용이다. 물론 비판의 여지도 있는 인물이고, 어느 누구라도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겠지만, 국내에는 본격적인 전기조차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해당 인물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더 먼저 나온 격이니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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