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파업부터 시작해서 비상 계엄과 탄핵 정국을 거쳐 이번 동시다발 산불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심란하기 짝이 없는 심각한 사건사고를 연달아 겪으니 새삼스레 '나라 하나 망하는 것 시간 문제'라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자세히 뜯어 보면 문제가 없지야 않았겠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돌아가는 듯 보였던 나라가 어떻게 불과 1년 사이에 이 정도로 망가졌을까.


대통령 탄핵 심판 결론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사이, 야당 대표의 재판 결론이 먼저 나왔는데, 하루종일 뉴스마다 쟁점을 분석하고 있지만 나귀님이 보기에는 양쪽 다 말장난일 뿐이다. 그 와중에 며칠째 지속 중인 경상도의 동시다발 산불로 인한 피해는 눈더미처럼 커져만 가서, 지금까지 사망자만 20여 명에 달하고 심지어 진화 헬기도 추락해 조종사가 사망했다.


문득 스터즈 터클의 <일>에서 어느 소방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라도 개판이고, 세상도 개판이고,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소방관들은 '진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불이 나면 끄러 가고, 아이가 갇히면 구해 나오고, 사람이 쓰러지면 인공호흡을 하며, 남들처럼 책상에 앉아 종이에 적힌 숫자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진짜 일'을 한다던가.


해당 소방관의 인터뷰는 그 책에서 맨 뒤에 나온다. "빌어먹을 세상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이 나라도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하지만 (...) 소방수는 생산적인 일을 한다구요. 불을 끄니까요. 품안에 아기를 안고 불 속을 빠져나오는 소방수를 보셨을 겁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실시하는 모습도 보셨을 테죠. 이걸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게 진짜니까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은행에서 일한 적 있습니다. 돈이란 종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가 아니라구요. 아홉 시 출근에 다섯 시 퇴근? 엿 먹으라고 하십시오. 선생님이 보는 건 숫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는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불을 껐어. 누군가를 살렸다구.' 그건 이 세상에서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말이죠."(867쪽)


물론 소방관이라 해서 반드시 인격자까지는 아니니, 남자다움을 유치하게 과시하며 흑인과 히스패닉에 대한 편견도 드러낸다. 그래도 일단 불이 났다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방금 전까지 자기가 욕하던 사람들을 구해내는 것이 소방관이라고 화자는 주장한다. 결국 지금 모든 문제의 원인은 '진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닐지...




[*] 스터즈 터클(1912-2008)은 미국의 평범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구술사 시리즈로 유명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선집이 몇 권 나왔다가 지금은 모두 절판되었다. 이전에 잠시 언급했듯이, 과거 뿌리깊은나무에서 민중구술사를 제작했을 때에도 터클의 책을 모범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는 발행인 한창기의 회고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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