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 재판 관련 뉴스를 접하다 보니 이른바 '오염된 증거'에 대한 언급이 반복되는 듯하기에, 문득 예전에 읽은 토니 힐러먼의 단편 내용을 떠올리게 되었다. 황금가지의 <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2권에 수록된 "치의 마녀"라는 작품인데, 애초에 남녀 모두에게 쓸 수 있는 단어인 "주술사"(witch)를 "마녀"로 옮긴 것부터 시작해서 오역이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번에 '수상쩍을 만큼 한 가지에 꽂힌 출판사들' 운운 하는 글에서 '사슴 대가리 여자'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언급했지만, 미국의 추리소설가 토니 힐러먼(1925-2008)은 젊은 시절 나바호 인디언 보호 구역에 갔다가 그곳의 풍습에 흥미를 느끼게 되어서, 원주민 경찰 콤비 '조 리프혼'과 '짐 치'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범죄 소설 시리즈를 35년간 18권 간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중 6권 <고스트웨이>, 8권 <시간의 도둑>, 11권 <카치나의 춤>, 17권 <스켈리톤 맨>, 18권 <셰이프시프터>가 간행되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모두 절판이다. 흥미롭게도 고려원에서 간행된 6권과 11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의 번역자는 원로 영문학자 설순봉인데, <고스트웨이>에는 이 저자에 대해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다는 역자의 설명이 나온다.


'리프혼과 치' 시리즈는 그 제목에서부터 인디언 고유의 풍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예를 들어 '고스트웨이'는 푸닥거리의 일종을, '시간의 도둑'은 유물 절도범을, '카치나의 춤'은 제사를 위한 춤을, '스켈리톤 맨'과 '셰이프시프터'는 무시무시한 초자연적 존재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디언의 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야 그 재미를 더욱 만끽할 수 있겠다.


또 하나 염두에 둘 점은 주인공들이 인디언 보호 구역에서만 활동하는 원주민 경찰관이기 때문에, 워낙 소규모일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경찰관에게는 얕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미드에서도 지역 경찰과 FBI의 알력이 종종 묘사되는데, '나바호 경찰'은 그보다 좀 더 안습한 처지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청학동 경찰'이나 '마라도 경찰' 정도 느낌이라고 할까.


앞서 언급한 <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2권의 "치의 마녀"도 인디언 고유의 미신과 외부 세계의 편견을 범죄 소설 특유의 설정과 버무린 독특한 작품이며, 단편이라는 점에서는 장편으로만 이루어진 '리프혼과 치' 시리즈의 외전 정도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에서는 원주민 경찰 콤비 가운데 '짐 치 경장' 혼자서만 등장한다.


주인공인 나바호 경찰 소속 짐 치 경장은 최근 나바호 지역민 사이에서 '주술사'('마녀'로 오역!)로 지목되어 곱지 않은 눈길을 받는 외지인에 관해 수사하던 중에 그 지역 담당자인 FBI 요원 제이크 웰스의 호출을 받는다. 알고 보니 문제의 외지인은 범죄 조직의 피라미 가운데 하나였다가 검찰 증인으로 돌아서면서 FBI의 관리 하에 은둔 생활 중인 인물이었다. 


문제는 그 증인이 나바호족 출신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 FBI가 인디언 보호 구역을 은신처로 삼은 것이었다. '사과를 숨기려면 같은 사과들 사이에 두면 된다'는 백인들의 예상과 달리, 정작 그 지역 원주민 사이에서는 그 외지인이 유독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백인이 보기에는 다 같은 사과 같겠지만, 원주민들은 어떤 사과가 어떻게 다른지 구분할 수 있으니.


급기야 지역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겪는 갖가지 불운을 새로 온 남자의 탓으로만 돌린다. 레스코프의 <괴물 셀리반>에 묘사되었듯 농사를 망친 것도, 가축이 죽은 것도, 사람이 아픈 것도 다 누군가의 주술 때문이며, 문제의 주술사는 바로 새로 온 남자일 수밖에 없다는 식이었다. 미신 따위는 믿지 않는 치 경장이었지만, 신고가 들어오니 출동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만 해도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던 치는 제이크와 대화를 지속한 끝에 비로소 상대방의 숨은 속내를 간파한다. 문제의 나바호족 검찰 증인은 조만간 이송되어 재판에 나설 작정이었는데, 알고 보니 판결을 좌우할 만큼의 결정적인 증언까지는 보유하지 않은 피라미인 관계로, 자칫 그를 증인으로 소환한 검찰이 도리어 웃음거리가 될 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마침 FBI에서는 문제의 증인이 나바호 주민들과 갈등을 빚는다는 점에 착안, 타인의 방문이나 협박으로 인해 변심했을 것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려 든다. FBI 요원이 나바호 경찰을 부른 이유도 증인의 '오염' 가능성에 대한 발언을 유도해 내기 위해서였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치는 제이크의 의도를 간파하자마자 확답을 주지 않은 채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건 발생부터 추리와 해결까지 일사천리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추리소설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두 사람의 대화 위주인 내용 전개에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FBI의 증인 보호 절차가 원주민 사회의 미신이며 미국 사회의 편견과 맞물릴 때에는 어떤 역설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범죄물의 클리셰를 뒤집는 독특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문제는 번역이 워낙 엉망이라 대명사를 잘못 이해하는 등 종종 헛다리를 짚다 보니, 양측의 대화를 통해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단지 이 작품만이 아니라 책 전체가 문제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함께 수록된 렉스 스타우트의 단편에서는 대사 가운데 한 행이 누락되어 앞뒤가 안 맞는 부분도 있어서, 결국 구입한 독자만 손해이다!


앞서 말했듯이 "치의 마녀"를 떠올리게 된 까닭은 최근 대통령 탄핵 재판에서 '오염된 증거'에 대한 주장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상 계엄의 위헌성과 몰상식이 뚜렷한 상황에서 일부 절차나 증거에 대해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은 의미 없는 발버둥에 불과해 보인다. 마침 오늘 최종 변론이 마무리될 예정이라니, 머지않아 결과가 정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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