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알라딘에 2025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광고가 있기에, 부영그룹이 인수했다는 문학사상사가 드디어 본격적인 업무를 재개했나보다 생각하고만 넘어갔었다. 그런데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니 발행처가 '다산책방'으로 나온다. 그제야 이상문학상 주관사가 바뀌었음을 상기하게 되었는데, 십중팔구 지난번 저작권 양도 강요 논란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알고 보니 부영그룹은 문학사상사 전체가 아니라 <문학사상> 잡지만, 다산책방은 이상문학상만 각각 인수했다니, 결국 온전했던 출판사가 문학상, 잡지, 단행본으로 뿔뿔이 흩어진 셈인가 싶다. 다만 부영은 과거 리카르도 레고레타의 유작 건축물을 철거하며 문화적 식견 부족을 드러낸 바 있어 미심쩍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잡지 쪽에는 벌써 논란이 생긴 듯하다.


그래도 여전히 "이상문학상" 하면 "문학사상사"가 떠오르는 까닭은 한편으로 당연히 반세기 동안 이어진 전통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어령이라는 인물 때문이다. 이어령은 문학사상사의 창립자인 동시에 이상 연구를 개척한 평론가 가운데 한 명이었으니, 결국 그 작가의 이름에서 따온 문학상을 제정한 것 역시 개인적 관심의 연장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임종국이 편저한 최초의 '이상 전집'(1956) 다음으로 간행된 '이상 전작집'(1977-1978)은 이어령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설립한 문학사상사에서도 '이상 문학전집'(전5권, 1989-1993)과 김윤식의 <이상 연구> 등 관련서를 꾸준히 내놓은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권영민의 <이상문학대사전> 외에는 모두 절판된 듯하다.


그렇다 보니 "이상문학상 = 문학사상사"라는 오랜 고정관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이 문학상의 새로운 주관사가 된 출판사에 대해서 한 가지 아이러니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건 바로 올해부터 '이상문학상'을 주관하고 작품집을 내는 '다산책방'에서 지금까지 간행한 도서 중에 '이상'과 관련된 책이 정작 하나도 없더라는 점이다!


물론 다산책방의 모회사 '다산콘텐츠그룹' 산하에는 다산북스, 다산라이프, 다산초당, 다산에듀, 다산사이언스, 다산어린이뿐만 아니라 놀, 오브제, 유영, 에픽, 사무사, 브라이트, 클랩북스, 콘택트 같은 지회사가 있다니, 잘 찾아보면 그룹 전체에 한 권쯤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참고로 '다산기획'과 '다산글방'은 훨씬 더 오래 된 별개의 출판사이다).


어쩌면 문학상의 주관사 변경이 너무 갑작스레 이루어지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그랬을 수도 있다. 게다가 설령 다산책방에서 이런 아이러니를 이미 의식하고 새로운 '이상 전집'을 기획 중이라 하더라도, 기존 전집을 검토하고 미발굴 작품을 찾아보고 해설을 작성하는 등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감안하면 하루아침에 급조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까지는 아닐 테니까. 


이쯤 되면 '동인문학상' 주관사 '조선일보사'에서도 '김동인' 책을 안 낸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사실은 원래 <사상계>에서 제정한 그 문학상을 1980년대 중반에 인수한 직후 조선일보사에서도 <김동인 전집> 전17권을 간행한 바 있었으니, '김수영 전집' 간행사인 민음사가 '김수영 문학상' 주관사인 것과 유사하다 하겠다. 


또 한편으로는 김수영 시를 읽어보지 않았다나 좋아하지 않았다나 했는데도 김수영 문학상을 받았다며 자조한 장정일의 사례도 있고, 훨씬 더 대중적인 사례로는 '홍철 없는 홍철팀'이란 것도 있으니, 굳이 이상 책 없는 출판사라 해서 이상문학상을 주관할 자격이 없다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어쨌거나 솔직히 문학사상사나 부영그룹보단 나을 테니까.


특히 부영그룹은 작년에 갑자기 <문학사상>의 간행을 취소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즉 이전까지 사주의 저서를 간행하는 데에만 이용된 출판 부문인 우정문고를 통해 <문학사상> 2024년 10월호를 간행함으로써 재창간에 나서겠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해 놓고, 막상 출간일 직전에 가서 간행을 취소하고 침묵만 지키는 바람에 문단과 출판계에서 구구한 추측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재창간호 수록 작가 중 하나인 황석영이 시국 선언에 참여한 까닭에, 현직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복권된 부영그룹 사주가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막판에 출간을 막은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왔다. 이게 사실이라면 불과 두 달 후에 벌어진 비상 계엄과 탄핵 심판 등의 사태까지 감안했을 때 <문학사상>의 재창간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하겠다.


만약 재창간과 동시에 수록 작가와 작품을 옹호하며 현 정권과 갈등을 빚는 모습만 보여주었더라도, 이후의 정치적 격변 상황에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을 입증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며 <문학사상>도 멋진 재기에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결국 문학을 알지도 못하는 기업의 횡포로 가뜩이나 금이 간 명성에 먹칠까지 더한 셈이니 딱한 일이다.


물론 남들은 못하겠다고 포기한 문학상이며 잡지를 굳이 떠맡은 출판사며 재벌의 선의를 굳이 폄하하려는 의도까지는 아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고 자랑을 일삼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정작 나라를 대표하는 문예지며 문학상을 고작 반세기도 유지하지 못한 이 나라의 문화적 척박함인지 천박함인지를 새삼스레 되새겨 보았을 뿐이다.



[*] 그런데 도서 수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영의 <문학사상> 발행 취소 소식에서 한 가지 눈이 번쩍할 만한 부분이 있다. 출간을 앞두고 전격 취소되기는 했지만, 납본용으로 잡지 20부를 사전 제작해서 일부는 언론사에 홍보용으로도 보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상태로 재창간호가 사장되고 만다면 그 사전 제작본 20부는 희귀본인 것은 물론이고, 그 전후의 복잡한 사정까지 감안해 보면 이래저래 가치가 높아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물론 <문학사상> 재창간호가 나중에라도 결국 간행될 수는 있겠지만, 그럴 경우에는 분명 발행날짜가 수정될 수밖에 없을 터이니, 2024년 10월호라고 찍힌 사전 제작본의 가치는 그대로 고정될 수밖에 없다. 납본용이라면 20부 가운데 절반 정도는 도서관 제출과 출판사 비치 등으로 소진되었을 것이고, 나머지 10부 정도가 언론사에 배포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과연 이후에 어떤 경로를 통해 어디로 흘러 나오게 될지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고나 할까. 어쩐지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기는 하지만, 한국 문단이나 출판계에는 별로 공헌하지 못할 것 같은 부영도 도서 수집가들에게는 뭔가 좋은 일을 한 가지는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문득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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