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성추문과는 별개로 영화의 역사상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차이나타운>은 LA의 한 사립탐정이 한 여성으로부터 남편을 뒷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시작한다. 탐정은 평소처럼 해당 남성의 외도 사실을 알아내서 증거 사진과 함께 의뢰인에게 넘기지만, 미처 몰랐던 뜻밖의 사실이 드러나며 거대한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사건의 발단인 불륜남이 극중에서 LA 시청의 고위 공직자로 수자원 정책을 좌우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물이 부족한 것으로 악명 높은 캘리포니아 주이다 보니 수자원을 둘러싼 이권 다툼도 적지 않다는데, 영화가 진행되며 밝혀지는 사건의 발단 역시 물 분배에 대한 관계자들의 의견 차이로 인해 생겨난 갈등이었다.


오래 전에 본 영화를 새삼스레 떠올리게 된 까닭은 최근 미국 LA 인근에 발생한 대형 산불의 진화 작업이 난항을 겪으면서 피해가 속출한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물은 부족하고 산불은 빈번했던 지역이라 최근 수년간을 돌아보아도 비슷한 사건이 매년 반복되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과거의 어떤 사례조차 능가할 만큼 대규모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지구온난화를 들먹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매년 수천 건씩 발생했다니 단순 인재로만 보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다만 자연 발생하는 주기적 산불이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반면, 최근의 산불은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는 까닭에 이득보다는 손실이 크다 봐야겠다.


연예인의 고급 주택이 전소되고 기회주의적 약탈까지 빈번하다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에도 약탈 소문이 퍼졌지만 결국 유언비어로 판명되었는데, 이번에는 사실인 듯하니 가뜩이나 치안 상황이 악화일로인 상태에서 무정부 상태가 펼쳐진 셈이다.(물론 비상 계엄 후 진짜 무정부 상태인 우리 입장에서 할 말까진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당선인 도널드 트럼프가 이번 사태를 놓고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비난했다고 해서 화제다. 하찮은 물고기 따위를 살리겠다며 수자원 정책을 변경하는 바람에 산불이 확산하는 중에도 진화에 필요한 물이 없어서 쩔쩔 매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인데, 물론 주지사는 물론이고 주 정부에서도 사실과는 다르다며 반박을 내놓았다.


도대체 무슨 물고기를 말하는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캘리포니아 주의 태평양 연안에 서식하는 바다빙어과의 고유종이라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깥양반이 좋아하는 술안주인 열빙어(시샤모)의 사촌 격이라는데, 하찮다는 폄하와 달리 그 지역의 주요 지표 생물이자 먹이 생물이며, 이미 반세기 전인 1973년에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었다.


이 물고기를 위협하는 원인으로는 서식지의 상태 악화, 외래종의 침입, 수질 오염, 수온 변화, 수자원 정책 등이 꼽힌다. 이번에 논란이 된 수자원 정책은 본래 트럼프 1기 집권 당시에 캘리포니아 남부의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북부의 자연적인 물길을 바꾸는 내용이었는데, 주지사가 이에 반대하면서 바다빙어의 보호를 구실로 삼았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여러 언론사가 이미 내놓은 팩트체크에 따르면 트럼프의 주장은 거짓에 불과하다. 농업용수 확보와 소방용수 부족은 별개의 문제이며, 주지사가 멋대로 뒤집은 결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방 정부와의 소송에서 바다빙어를 들먹인 것만은 사실이라서 주지사는 졸지에 하찮은 물고기와 귀중한 사람 목숨을 맞바꾼 악당이 되었다.


모든 생물이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고 보는 생태학의 관점에서는 어떤 생물을 하찮다고 간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고생물학자 리처드 포티의 말마따나, 하찮아 보이는 곤충이나 이끼에 대한 연구가 의외로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럼프의 주장이야 늘 그렇듯 지나친 과장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산불 진화가 어려운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강풍과 가뭄 같은 자연적 원인뿐만 아니라 기반 시설 노후화 같은 대책의 한계 역시 상황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듯하다. 이번 산불의 피해 지역이 서울 면적의 4분의 1에 달한다는 보도까지 접하고 보니, 새삼스레 미국이란 나라의 광활함과 아울러 그 진화 작업의 어려움 역시 깨닫게 된다.


한편으로는 자연 재해가 졸지에 정치적 쟁점으로 변모하면서 생겨난 파장 역시 만만치 않을 것도 같다. 산불이야 결국 사라지겠지만, '하찮은 물고기' 운운 하는 트럼프의 프레임 씌우기의 영향은 그보다 좀 더 오래 가지 않을까. 최근 우리나라의 탄핵 절차를 둘러싼 논란만 봐도 현실에서는 가짜 뉴스야말로 산불보다 더 무섭게 번진 듯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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