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깥양반이 영화 <하얼빈>을 보고 오더니 기대보다 괜찮았던지 새삼 김훈의 동명 소설까지 찾아 읽고 있기에 (그 소설이 영화 원작은 아니라 한다) 예전에 사다 놓은 <안중근 의사 자서전>을 함께 읽으라고 꺼내주었다.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라는 단체에서 1979년 간행한 동명의 세로쓰기 서적에서 공판 기록과 신문 기사 등을 제외하고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추모시 등 몇 가지만 엮어 1990년 가로쓰기로 간행한 비매품 서적이다.
안중근이니 윤봉길이니 이봉창이니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워낙 많이 들어 친숙하지만, 이번 기회에 자서전을 뒤적여 보고 관련 내용을 검색해 보니, 사실은 나도 많은 것을 잘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때 어느 걸그룹 멤버가 퀴즈에서 안중근을 몰라보고 엉뚱한 대답을 내놓아 어마어마한 비난을 받았는데, 따지고 보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라는 역사적 사실 외에 안중근을 속속들이 아는 일반인도 드물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귀님도 언제부턴가는 안중근을 비롯한 각종 '의사'들을 오히려 외면해 온 감도 없지 않은데, 저 유명한 손바닥 도장을 비롯해서 워낙 많은 이미지와 인용문이 사방에서 남발되어 피로했던 탓이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일종의 반대급부로 평소에 하도 많이 들어 본 안중근과 윤봉길보다는 미처 몰랐던 홍범도니 김산이니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바깥양반이 뒤늦게야 영화를 통해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게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인 듯한데, 덕분에 나귀님도 상당히 오래 전 어느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입했던 자서전을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다.
자서전 "안응칠 역사"는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쓴 것으로 자신의 출생과 성장부터 암살과 재판까지의 이야기를 일목요연하게 담고 있다. 아쉽게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필사본과 등사본만 남아 있다.
그런데 자서전 내용 중에 한 가지 희한한 일화가 눈길을 끌었다. 서울에 머물던 안중근이 부친 위독 소식을 듣고 귀향하던 길에 지인과 동행했는데, 마침 지인의 말을 몰던 마부와 시비가 붙어 얻어맞았다는 것이다.
당시 가뭄이 심했는데, 문득 마부가 길가의 전신주를 가리키며 '외국인이 세운 저 물건이 공중의 전기를 모조리 빨아들여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안중근이 읏으면서 '무식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러자 무식하다는 소리에 발끈한 마부가 말채찍으로 안중근의 머리를 여러 번 내리치며 욕을 퍼붓더라는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 주위 사람들이 마부를 처벌하자고 권했지만, 안중근은 그냥 보내 주었다 한다.
우습다면 우스울 수 있고, 또 민망하다면 민망할 수도 있는 일화인데, 뤼순 감옥에서 자서전을 쓰는 중에 그 일이 뇌리를 스쳤던 것으로 보아, 안중근의 입장에서도 사실은 마부의 소행이 두고두고 괘씸했던 게 아닐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짜 뉴스를 무작정 신봉하는 무식쟁이가 합리적으로 반박하는 현명한 사람에게 적반하장으로 굴었던 셈이니, 거짓에 미혹되어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에 전기가 도입된 지 불과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근대 기술을 처음 접한 조선인들로선 낯설고 두렵게 여겼을 터이고, 자연스레 자신들이 겪는 이런저런 불운을 그 탓으로 돌렸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영화 <파묘>를 통해 다시 주목 받은 '일제의 민족 정기 쇠말뚝 훼손설'도 같은 맥락의 헛소문인데, 근대 국가 일본의 식민지 수탈의 일환이었을 측량 사업이 미신적으로 왜곡되어 지금껏 회자되니 한심한 일이다.
헛소문이란 도깨비 사과와도 비슷해서 제아무리 반박하고 해명해도 사라지지 않고 기세등등해질 뿐이다. 최근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서 그 절차와 내용에 대해 제기된 온갖 가짜 뉴스와 억지 주장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똑같이 언성을 높여 보았자 해결될 리 없으니, 결국 안중근처럼 상대방의 욕설과 폭행에도 인내하며 최대한 투명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만이 방법이지 않을까. 물론 안중근도 나중에 생각하니 빡치긴 했던 듯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