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참석한 노벨상 시상식에 관한 신문 보도를 읽다 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각 부문 수상자의 시상에 앞서 주최측이 선정 이유를 설명하는데, 보통은 말미에 주최측 발표자가 해당 수상자의 모국어로 한 마디를 곁들이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의 선정 이유에도 말미에 한국어 문장을 한 마디 곁들이기 위해서 주최측 발표자가 현지의 한국어 번역가에게 의뢰해서 해당 문장의 녹음까지 따갔던 모양인데, 결국에는 발표자가 자연스레 발음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빼버린 모양이다.


표면상으로는 어색한 발음 때문에 수상자나 그 고국 모두에 누를 끼칠까봐 그랬다지만, 제아무리 어색한 발음이라도 외국인이 우리말을 구사하려 애썼다는 사실 자체에 기꺼이 감동하는 우리 정서를 감안해 보면, 설령 '물, 물코기'가 되더라도 그냥 읽는 게 낫지 않았을까.


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번번이 잘못 발음되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농담을 해서 큰 웃음을 자아냈듯이,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시상식에 한국어가 곁들여졌다면 제아무리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더라도 일종의 밈이 되어 두고두고 회자되었을 법하다.


그렇다면 서양인 기준으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로 손꼽히는 중국어의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궁금한 김에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모옌의 시상식을 유튜브로 검색해 보니, 이때에도 역시 선정 이유 말미에는 중국어 문장이 포함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어찌 보자면 노벨상 주최측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같은 서양 언어와 달리 한국어와 중국어를 어렵게 여겼음을 근거 삼아, 마치 세계 문학의 기준인양 자처하는 노벨문학상 역시 서양과 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꼬집을 수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시상식 이후 개최된 연회에서는 사회자인 스웨덴 대학생이 예상 밖의 한국어로 한강을 소개했다고도 전하니, 잘만 하면 '한글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과시할 기회를 놓친 우리 정서로는 아무래도 주최측의 '정성 부족'과 '노력 부족'을 탓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한 번은 수상자가 탁월한 어학 능력으로 주최측을 놀래킨 경우도 있었다. 196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머리 겔만이 그 주인공인데, 영어로 시작한 기념 강연을 중간부터 유창한 스웨덴어로 바꿔 말하는 바람에 객석에서 졸던 국왕도 놀라 깨어났다고 한다.


겔만은 15세에 예일 대학에 입학하고 21세에 MIT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을 만큼 신동으로 유명했는데, 전공인 물리학 말고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까닭에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에서 가져온 '쿼크'와 불교에서 가져온 '팔정도' 같은 명칭을 소립자에 도입하기도 했다.


이런 겔만의 행동을 현학적이라고 조롱한 과학자들도 없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절친이자 직장 동료인 리처드 파인만이었다. 파인만이 무슨 이야기를 꺼내면 겔만이 곧바로 박학다식을 자랑하고, 파인만이 짜증나서 약을 올리면 겔만이 '긁힌' 일화가 여럿 전해진다.


그래도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면 그 파괴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함께 교수로 재직하던 칼텍에서 열린 학술 세미나마다 맨 앞줄에 두 명이 나란히 앉아서 까다로운 질문을 번갈아 가면서 던지는 바람에, 발표자의 입장에서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파인만의 탁월함에 반해 '나는 그를 형제처럼 사랑했다'고 회고한 프리먼 다이슨과 달리, 겔만은 항상 저 유명한 동료에게 츤츤대며 경쟁 의식을 불태웠던 듯하다. 어쩌면 쾌활하고 소탈한 성격의 파인만이 열한 살이나 어린 겔만을 항상 동생 취급한 것이 억울했던 것일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비트겐슈타인과 포퍼, 이 나오미와 저 나오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제아무리 이쪽이 저쪽을 평생의 경쟁자로 여기고 누르기 위해 애를 쓰더라도, 막상 저쪽이 이쪽을 '아웃 오브 안중'으로 대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파인만과 겔만도 그랬다.


어떤 면에서는 '남이야 뭐라 하건'이란 좌우명으로 살아가는 파인만과는 정반대인 겔만의 완벽주의적 성격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다고도 볼 수도 있겠다. 문제의 스웨덴어 강연도 거의 완벽하게 마무리했지만, 정작 본인은 발음 한두 개 틀린 것을 두고두고 자책했다 하니까...




[*] 위에서도 언급한 노벨상 수상자 선정 이유만 엮어서 내놓은 책도 있는데, 바다출판사에서 간행한 <당신에게 노벨상을 수상합니다> 시리즈이다. 아직까지는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분야의 선정 이유(번역서에서는 '시상 연설'이라고 했다)를 엮은 책만 나왔는데, 한강의 수상을 계기로 조만간 문학상 분야의 책도 나오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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