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시간 반짜리 일장춘몽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전국은 물론이고 세계까지도 놀래킨 비상 계엄 사태가 진정되자, 이제는 그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는 모양이다. 쉽게 말해 준비도 허술하고, 실행은 더욱 허술했으며, 실질적으로 이득이라곤 되지 않은 그런 짓을 무슨 정신으로 저질렀을까?
정치인과 법조인과 평론가와 교수를 망라한 온갖 사람들이 뉴스에 출연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면서 아내 사랑부터 판단 착오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유를 거론하기는 하지만, 현재까지의 잠정 결론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하다고 봐야 할 것 같고, 향후로도 아마 규명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새벽에 국회의 탄핵안 본회의 상정 표결을 지켜보다 생각이 많아져서 이것저것 책을 뒤적이다, 지난번 사과 가격 폭등에 생각이 나서 꺼내 놓았던 레이 황의 중국사 에세이를 펼쳐 보니 당 현종과 양귀비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대통령 마누라가 문제의 시작이었으니 이번도 경국지색인가.
<사기>에는 주나라 유왕이 애첩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려고 군대를 긴급 소집하는 허위 경보를 수시로 발동했다가 결국 양치기 소년처럼 외면당해 나라가 망했다고 나온다. 비상 계엄 조치도 번번이 딴지 거는 야당을 향한 경고 차원이었다는 대통령의 변명을 듣고 보니 비슷한 것도 같다.
하지만 뉴스 보도를 접하다 보니 살짝 의외의 곳에서 이번 사건의 이유가 아닐까 싶은 단서를 접하게 되었다. 바로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예정된 노벨상 시상식이다. 현지에서는 벌써부터 각종 행사가 시작된 모양이고,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역시 어제 시상식 참석차 출국한 듯하다.
이상하게도 이 작가는 수상 발표 이후 언론 접촉마저 회피하며 줄곧 침묵을 지켜 왔는데, 그런 까닭에 이번 시상식 참석을 계기로 어떤 입장을 밝히게 될지에 대해서 전세계가 주목하는 상태이다. 노벨상 시상식 일정에는 수상자의 소감 발표와 강연 행사도 있으니 뭔가 말을 하긴 할 것이다.
외국 언론으로선 도대체 한강이 왜 국내에서 논란이 되는지도 궁금해 할 법하다. 수상 발표 직후 주한 스웨덴 대사관 앞에 시위대가 모여 '한강 노벨문학상 시상 철회'를 요구하는 일까지도 벌어졌는데, 한국 최초, 아시아 여성 최초라는 기록을 세운 작가에게는 부당한 대우처럼 보이니까.
문제는 한강이 평소처럼 침묵을 지키거나, 아니면 최대한 에둘러 말할 경우에는 그 진의가 잘못 전달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데보라 스미스가 잘 둘러대더라도 한계가 있을 터이니, 작가가 뭔가 말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계기가 꼭 있어야 하기에 결국 정부가 나선 것이다.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동기 자체가 불가사의한 비상 계엄이지만, 한강의 입을 열기 위한 의도로 실행되었다고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인다. 우선 명분 없는 실행으로 온 나라와 전 세계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고, 신속한 해제를 허락함으로써 불의의 피해를 미연에 예방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한강의 대표작의 이해를 돕기까지 했는데, 소설 <소년이 온다>가 전두환 신군부의 비상 계엄 선포 직후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데보라 스미스의 명번역으로도 차마 넘어설 수 없었던 문화적 차이조차도 이번 비상 계엄 보도를 통해 극복되지 않았을까.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던 대통령의 당혹스러운 비상 계엄 선포는 한강이라는 작가가 배출될 수 있었던 한국 특유의 정치사회적 배경이 어떠한지를 전세계에 보여주었던 대대적인 퍼포먼스였던 것이다. K팝과 K영화와 K문학에 뒤이어 K계엄까지도 전세계에 과시한 셈이다.
이쯤 되면 대통령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로맨티스트가 아닐까? 개인적 인연이 없는 한강을 위해서도 이 정도라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는 더욱 지극하지 않겠는가! 이쯤 되면 한때 그의 손바닥을 장식한 왕(王) 자도 훗날 경국지색의 여러 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리라는 예언은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