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에 미국 대통령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연이어 읽은 기억이 난다. 저서나 자서전은 물론이고 측근의 회고록과 리더십 평가서도 제법 나온 상태였고, 심지어 은밀한 사생활이며 에어포스원의 역사에 대한 책까지 의외로 많은 자료가 있어서 나름대로 재미있는 주제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책은 <이런 대통령 뽑지 맙시다: 미국 최악의 대통령 10인>이라는 것이었는데, 지금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니 놀랍게도 무려 22년 뒤인 지금까지도 절판되지 않고 판매 중인 것으로 나온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철 지난 자료가 된 것 같지만 말이다.
부제에 나온 것처럼 당시까지의 미국 대통령 40명 가운데 최악으로 선정된 10인의 약전을 모아 놓았는데, 이 당시의 최악은 탄핵 직전까지 가서야 하야를 선택한 리처드 닉슨으로 꼽혔고, 순위에는 들지 못했지만 당시 성추행 스캔들에 휘말린 빌 클린턴에 대해서도 언급되었다.
지금 와서 다시 검색해 보니, 최근에 와서는 닉슨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졌는지 오히려 순위가 상승하여 중위권에 진입한 반면, 링컨 이전의 제임스 뷰캐넌을 비롯한 몇몇 대통령과 가장 최근의 (그러나 또다시 돌아온) 도널드 트럼프가 최하위권으로 손꼽히는 모양이다.
닉슨이 최악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촉발된 선거 관련 불법 행위에 대해서 거짓말을 늘어놓아 탄핵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그에 못지않게 최악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지지자의 의회 습격 사건을 비롯한 각종 막장 행보 때문이겠고 말이다.
거짓말과 의회 압박이라는 사안 각각만 놓고 보더라도 역대 최악의 대통령 소리를 듣기에 충분한데, 어젯밤 우리나라에서 갑작스럽게 선포되었다가 불과 두 시간 반 만에 국회의 결의안 통과로 싱겁게 끝나 버린 비상 계엄령 조치야말로 이 두 가지 사안의 조합이라 할 만하다.
애초에 그런 조치를 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일방적인 발표가 나왔다는 것도 뜬금없었는데, 마지막 계엄령으로부터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 까닭인지 비록 군대가 출동하고 국회에 진입했다지만 예상만큼 기세등등하지는 못하고 흐지부지되었으니 더욱 황당무계한 일이다.
영화 <서울의 봄>에도 묘사되었던 것처럼 애초에 군인 출신 대통령이라면 군대에 대한 장악력이라도 확실해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을 터인데, 병역의 의무도 이행하지 않고 심지어 현재 지지율이 10퍼센트대인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라면 사상 최초 탄핵의 주인공인 박근혜가 되지 않을까 싶었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나 전두환이 차점자쯤 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이번 계엄령 사태를 계기로 결국 쫓겨나게 생긴 윤석열이 이들 모두를 능가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소련 말기에 쿠데타가 일어나서 고르바초프를 억류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옐친이 시위대를 이끌고 군대를 설득하며 탱크에 올라가 연설함으로써 반란이 진압되고 소련 해체가 가속화되었던 것처럼, 기껏해야 두 시간 반짜리였던 계엄령이 향후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궁금하다.
나귀님이 학교 다닐 때에만 해도, 사회 시간에 대통령 탄핵에 대해 배울 때에는 실현 가능성 없는 이야기라는 선생님의 조언이 덧붙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일어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살다 살다 별 꼴을 다 보는구나 싶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