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라딘 첫 화면에 <이웃집 빙허각>이라는 아동 소설을 광고하기에, 이게 누구던가 싶어 클릭해 보니 <규합총서>의 저자였다. 옛 여성들은 이름이 없거나 망각되어 당호(집에서 따온 이름)로 지칭된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이다. '당'과 '헌' 모두 건축물을 가리키는 말이니,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신래미안과 허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1차쯤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202호 신씨와 1001호 허씨이거나.
<규합총서>는 예전에 신구문고 판본으로 갖고 있었던 듯해 책장을 뒤져 보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기린원 판본으로 갖고 있었나 싶어 또 다른 책장을 뒤져 보았지만 역시나 발견하지 못했다. 어쩌면 책더미 속 깊은 곳 다산과 실학 저자들의 각종 국역서 옆에 들어 있거나, 아니면 <제민요술>이나 요리 관련서, 아니면 서유구 관련서나 기타 다른 책에 곁들여 읽으려 꺼내 놓았다가 엉뚱한 데에 방치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어쨌거나 국역본을 하나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여러 번이나 헌책방에서 <규합총서> 번역서를 보고도 딱히 구입할 생각은 없었다는 점이다. 이번에 구글링해 보니 판본이 여러 가지인데 특히 정양완의 번역본이 대표적이라 하니, 어쩐지 몇 번쯤 봤던 것 같은 그 책을 미리 구입하지 않은 것이 아쉽기도 하다. 참고로 정양완의 아버지는 위당 정인보, 남편은 국문학자 강신항, 아들은 논란이 있었던 수학자 강석진이다.
아동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보니 몰락 양반가의 딸인 주인공 소녀가 이웃집 할머니 빙허각을 만나 <규합총서>의 저술에 일익을 담당하는 내용인 듯하다. 어쩐지 에밀리 디킨슨의 이웃집 소녀가 등장하는 그림책이 생각난다. 최근 꾸준한 인기를 누리는 '숨은 조력자' 모티프를 빙허각의 사례에 가져다 붙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한데, 문제는 실존 인물을 소재로 삼은 경우에 자칫 역사며 사실 왜곡 논란이 발생하기 쉽다는 점이다.
'숨은 조력자'란 문자 그대로 어떤 업적의 주인공의 그늘에 가린 중요한 조력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가리키는데, 최근의 유행에서의 시발점은 논픽션으로 시작해 영화로도 제작된 <교수와 광인>이 아니었나 싶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제작 과정에서 정신병원에 수감된 광인이 자료 조사를 자원했다는 실화를 다루었는데, 이후 <나랏말싸미>와 <말모이> 같은 한국 영화에서도 이 모티프를 차용한 바 있다.
문제는 두 편의 한국 영화 모두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렸다는 점이다. <나랏말싸미>는 세종의 한글 창제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승려 신미가 핵심으로 관여했다는 줄거리이고, <말모이>는 일제 시대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과정에서 전과자에 까막눈인 판수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줄거리이다. 양쪽 모두 '숨은 조력자' 모티프에 충실하려다 보니, 역사적 사실을 과장하거나 무시함으로써 논란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미국의 우주 개발에 관여했지만 주목 받지 못한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와 그 원작인 <로켓걸스>, 비슷한 여성 서사를 원자폭탄과 암호해독으로 옮겨놓은 <아토믹걸스>와 <코드걸스>, 또는 일종의 도시 전설로 자리잡은 '아인슈타인에게 업적을 가로채이고 사회적으로 매장된 첫 번째 아내'에 대한 소문도 마찬가지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뒤집다 보면 사안을 실제보다 과장하고 왜곡할 위험이 상존한다.
왜냐하면 영화와 책에서 부각시킨 것과 달리, 위에 언급한 각종 '걸스'와 밀레바 아인슈타인이 각각의 유명한 업적에서 담당한 역할은 어디까지나 조연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도 나름대로는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초등에서도 텐징 노르가이의 공헌이 컸지만, 에드먼드 힐러리를 비롯한 영국 원정대가 없었다면 저 셰르파 혼자서 성공하지는 못했을 터이다.
'숨은 조력자' 모티프도 대중의 구미에 맞아 유행하는 것이겠지만, <나랏말싸미>와 <말모이>처럼 무작정 대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선을 넘으면서 역사 왜곡 논란으로 치닫게 되는 듯하다. 비교적 잘 대입한 경우에도 논란은 여전한데, 걸작으로 칭송되는 영화 <서편제>조차도 토속적인 소재라는 외양과 달리 핵심 줄거리는 한국적인 한의 모티프가 아니라 그리스 비극의 카타르시스라는 국문학자 조동일의 비판이 나오기도 했었다.
지난번 <고려거란전쟁> 드라마의 역사 왜곡 논란도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나 싶은데, 그때 참고하려고 꺼냈던 박용구의 <역사소설입문>을 다시 뒤적이니, 역사소설은 사실에 충실하되 허구의 여지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작가도 사실과 허구의 선을 명확히 그어야 하고, 독자도 상상의 여지를 충분히 허락해야 한다는 뜻인데, 갈수록 의견 대립이 첨예화하는 사회에서 그걸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번에 나온 <이웃집 빙허각> 역시 해당 인물에 관한 사료가 절대 부족한 점이 난관이었을 법한데,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나 궁금하다. 흥미로운 점은 빙허각 이씨 자체야 사실상 무명에 가까운 채로 남았지만, 그 주변 인물 중에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야 완역이 시도되었을 만큼 방대한 조선 시대의 실용 백과 <임원경제지>의 저자인 서유구가 바로 빙허각 이씨의 시동생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유구가 젊은 시절 형수에게 글을 배웠다고도 전하니, <이웃집 빙허각>에서도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서씨 집안에는 원래부터 전해 내려오는 장서가 많았다고 하니, <규합총서>와 <임원경제지> 모두 개인의 업적일 뿐만 아니라 가문의 장서와 학술적 기풍 같은 환경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또 누군가는 이걸 보고 '시동생에게 연구 성과를 빼앗긴 형수'의 이야기를 구상할지도 모르겠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