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렸는데 아직 초겨울인 11월임을 감안하면 의외로 양이 많아서 여기저기 사고며 불편을 초래한 모양이다. 어린 시절에야 눈 내리는 모습만 봐도 신이 나더니만, 어른이 되어서는 저걸 또 어떻게 치우나, 저걸 또 어떻게 피해 다니나 하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나저나 눈 소식을 접하니 <만엽집>에 나오는 남녀의 문답가가 문득 떠오른다. 지난 여름에 어쩌다 보니 완역본 2종을 연이어 구입하게 되어서 관련서도 뒤적이다가, 우에노 마코토라는 연구자가 쓴 <천년의 연가 만엽집>이라는 해설서에서 우연히 접하고 흥미를 느낀 까닭이다.


이 책은 <만엽집>의 내용을 토대로 옛 일본인들의 기쁨, 분노, 비애, 즐거움을 설명하는데, 그중 기쁨에 관한 장에 "내리는 눈에 신명나서 떠들어대는 만엽 시대의 사람"이라는 절이 있다. 제목 그대로 <만엽집>에 수록된 작품을 남긴 시인들은 눈을 무척이나 귀하게 여겼다는 거다.


왜냐하면 그들 중 상당수의 거주지였던 긴키(近畿), 즉 오늘날의 간사이(関西) 지역은 원래부터 눈이 드문 곳이기 때문이다. 우에노 마코토는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만엽집> 권2에 나오는 덴무 천황(673-686 재위)과 후지와라 부인의 문답시를 제시한다.



내가 사는 곳에 큰 눈이 내렸구나

당신이 있는 후지와라의 낡아서 추레해진 마을에

내리는 것은 나중이겠지 (권2 103)



여기서 부인(夫人)은 왕비(妃) 다음가는 지위인데, 당시의 천황은 왕비 두 명과 부인 세 명을 비롯해서 여러 아내를 거느릴 수 있었다. 마침 후지와라 부인은 덴무 천황의 거처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따로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자 부인은 다음과 같은 답가를 보냈다.



그 눈은 언덕의 용신에게 제가 명령해서 내리게 한

눈의 일부가 그쪽에 내린 게 아닐까요 (권2 104)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남자가 '여기는 눈 오는데 거기는 후진 동네라 안 올거임. ㅋㅋ' 하고 문자를 보내자, 여자가 '어, 그 눈, 내가 내리라고 해서 내리는 거임. ㅋㅋ' 하고 답장 문자를 보내는 셈이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임을 보여준다고 해야 맞겠다.


<만엽집>이라고 하면 일본 내에서도 정확한 해독이 어렵다는 평가가 있고, 우리말로는 한동안 번역이 없었던 까닭에 일각에서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둥, 그 안에 고대 한국과 관련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둥 사실상 유사역사학에 가까운 주장도 나오곤 했다.


하지만 위의 눈 노래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남녀의 애정을 비롯한 일반적인 주제에 대해서 노래한 다양한 시를 엮은 작품집이라고 해야 맞을 법하다. 한때 유교적 이상을 담았다고 여겨진 <시경>도 지금은 남녀의 애정 같은 다양한 주제의 노래집으로 재평가되었듯 말이다.


<만엽집> 완역본은 2종인데, <만요슈>(전3권, 최광준 옮김, 국학자료원, 2018)는 절판이고, <만엽집>(전14권, 이연숙 옮김, 박이정, 2012-2018)은 현재 일부 품절이다. 선집으로는 이와나미신서 중 하나인 <만요슈 선집>(사이토 모키치 지음, 김수희 옮김, 2020)을 참고할 만하다.


완역본 2종 가운데 이연숙의 번역은 원문의 운율까지 감안하여 시의 형태를 유지하려 노력한 직역이고, 최광준의 번역은 운율보다 의미 전달을 우선시한 의역으로 간혹 첨언도 서슴지 않은 듯하다. 위에서 언급한 덴무 천황과 후지와라 부인의 문답시를 보면 차이를 알 수 있다.



권2 103


이연숙: 우리 마을에 / 많은 눈이 내리네 / 오호하라의 / 그 한적한 마을에 / 내리는 건 후겠지


최광준: 우리 마을에 큰 눈 왔네. 당신이 있는 오하라처럼 오래 된 마을에는 나중에 내리겠지?


김수희: 우리 마을에 많은 눈이 내렸네 / 오하라의 한적한 마을에는 나중에 내리겠지.



권2 104


이연숙: 우리 마을의 / 용신에게 말해서 / 내리게 했던 / 눈의 그 조각들이 / 거기 내린 거겠죠


최광준: 내가 사는 언덕의 물의 신에게 부탁하여 그곳에 눈이 내린 것이예요. 그런 줄도 모르고 좋아하셨죠?


김수희: 이곳 언덕의 용신에게 고하여 내리게 했던 / 눈의 그 조각들이 그곳에 내렸군요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귀님이 <만엽집>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국문학자 김사엽이 저술한 대우학술총서의 <일본의 만엽집>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저자는 일본에서 오래 활동하며 <만엽집>의 우리말 번역도 시도했지만 중도에 타계하며 결국 완역하지는 못했다고 알고 있다.


두 번째 시도인 이연숙의 <만엽집>은 처음 1-3권이 나왔을 때만 해도 과연 완간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웠는데, 무려 6년의 노력 끝에 최초의 완역본이 탄생했으니 노고를 칭찬할 만하다. 세 번째 시도인 최광준의 완역본 <만요슈>는 이연숙보다 조금 늦게 세 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나귀님이야 <만엽집> 완질을 구매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다만 중고가 나올 때마다 호기심에 한두 권씩 구입하다 보니 전권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이연숙 번역본은 12년에 1-3권, 16년에 4-5권, 22년에 9, 14권, 23년에 6-8, 11-13권, 24년에 10권을 무려 12년에 걸쳐 모았다.


최광준 번역은 <일한대역 만엽집 선>으로 처음 접했는데, 일본어 학습 교재를 의도한 까닭인지 시 자체는 번역하지 않고 해설 위주라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절판본 <만요슈> 완질 중고가 알라딘 일산점에 있기에 충동구매를 하면서 얼떨결에 완역본 2종을 갖게 되었다.


앞서의 사례처럼 <만엽집>에는 남녀 간의 애정시가 많이 들어 있다. 이런 유서 깊은 사례만 놓고 보아도 최근 인터넷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남혐이니 여혐이니 하는 선동적인 주장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헛소리일 수밖에 없는데, 나름 배웠다는 사람들도 동조하니 묘한 일이다.


인류학자 나폴레옹 샤농이 문화유물론의 괴수 마빈 해리스를 비판하며 말했듯이, 남녀가 "고기 먹게 사냥하자"고 노래하기보다는 "너랑 나랑 사랑하자"고 노래하기 더 쉬운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겠나. 그건 절대로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도태될 운명일 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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