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 안전 점검 나왔다고 전화가 왔기에 들어오시라 해서 부엌으로 안내하고, 늘 그렇듯이 집안이 지저분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서 마루에 나가 있었더니, 마침 틀어 놓은 뉴스에서 배우 김수미의 사망 소식이 나왔던지 점검원이 문득 '김수미 씨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한다.


그렇잖아도 일찌감치 바깥양반에게 문자로 소식을 들었는데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던 나귀님이었는데, 점검원 양반 말을 듣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꽤 충격을 받았던 모양인가 싶었다. 일단 나이도 많은 편이었고, 최근 건강 이상설도 있었다고 하니 크게 이상한 일까지는 아닐 텐데.


한편으로는 나귀님이 그 배우를 각별히 좋아하지는 않아서일 수도 있다. 연기를 잘 한다는 것이야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튀는 역할을 많이 맡게 되고, 나중에 예능에 진출하면서는 노골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내세우다 보니, 어느새 피로감을 느끼게 된 것은 아닐지.


워낙 튀다 보니 김수미라면 주연 잡아먹는 조연의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싶은데, 영화 첫 주연작으로 기록된 <화순이> 역시 <새아씨>라는 MBC 드라마에서 동명의 조연, 즉 주인공 곁을 지키는 주책바가지 몸종으로 나왔다가 폭발적 인기를 끌어 제작된 일종의 스핀오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유명한 배역인 <전원일기>의 일용이 어머니 역시 상당히 튀는 인물이었다고 기억한다. 드라마에서는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와 심술궂은 행동으로 뭔가 실수를 저지른다거나, 또는 소문을 퍼트린다거나 해서 매번 문제를 만들어내거나 악화시키는 역할을 종종 담당하지 않았나 싶다.


김수미라면 의외로 서점과도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년 전인 2003년에 서울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에 '일용엄니책방'을 개업했기 때문인데, 기사를 검색해 보니 본격적인 서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북카페였던 모양이다. 종종 그 앞을 지나며 광고 현수막을 본 기억이 난다.


서갑숙과 박원숙을 필두로 연예인의 고백 에세이가 인기를 끌던 시절에 김수미도 비슷한 책을 냈다고 기억하는데, 지금 검색해 보니 알라딘에는 중고로만 등록되어 있을 뿐이다. 대신 요리 예능 프로그램의 내용을 개작한 듯한 요리책이 여러 권 나와 있으니 어엿한 저자라 해도 무방하겠다.


다만 말년에 들어서는 연기보다는 다른 활동이 빈번해지며 종종 구설수에 올랐으니 안타깝다. 특히 식품 사업에 관여했다가 품질 관리 실패로 두고두고 악평을 얻으면서 좋은 이미지가 많이 깎여나갔는데, 동료 배우인 김혜자가 도시락으로 신조어까지 생기며 추앙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딱 한 번 김수미의 연기가 압도적이었다고 느꼈을 때도 있었다. <전원일기>의 한 회에서 김회장네 먼 친척 조카인지 사돈인지 하는 남학생이 입시에 실패하고 나서 시무룩한 상태로 머리를 식히러 시골을 찾아왔는데, 마침 일용 엄마가 옛 기억을 돌이키며 늘어놓는 긴 독백을 듣게 된다.


쉽게 말해 아이 딸린 과부가 먹을 것이 없어서 누가 버린 술지게미를 주워 먹었는데, 나중에는 모자가 술에 취해 '에미도 비틀비틀, 새끼도 비틀비틀' 하는 웃픈 광경이 펼쳐지게 되었다는 거다. 드라마는 이런 격려 아닌 격려를 들은 남학생이 심기일전해 시골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전원일기>에서 역시나 추레하게 나왔던 김혜자와 고두심이 훗날 다른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아 반전 매력으로 연기의 폭을 넓혀 나간 반면, 김수미는 탁월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화순이와 일용 엄마 같은 감초 역할로만 소모되다 끝나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면 문득 아쉽기도 하다.


그런데 보도에 따르면 고인의 최근 건강 악화는 뮤지컬 <친정엄마>의 출연료 체불로 인한 스트레스 탓이라 한다. 본인은 <전원일기> 못지않은 대표작으로 여겨 애착을 보였다지만, 결국 연기에 대한 열성이 오히려 최후를 앞당긴 셈이니 아이러니하다. 인생은 무엇이고 연기는 또 무엇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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