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책장과 책더미를 한 번 작정하고 갈아엎었더니, 그간 어디 있는지 몰라 답답했던 책이 여러 권 나온다. 천병희 선생의 저서 <횔덜린의 핀다르 수용에 관한 연구>도 그중 하나인데, 지난번 부고를 접하고 문득 생각나서 책장을 뒤졌지만 찾아내지 못했었다.
문학 이론서를 두는 책장에서 개별 작가 연구만 모아 두는 부분을 살펴보아도 없기에, 십중팔구 시집과 시론을 모아 놓은 또 다른 책장에 두었으리라 짐작했지만, 그 앞에 쌓인 책더미가 워낙 커서 선뜻 치우지 못하고 차일피일하다가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거다.
선생의 업적이라면 자연스레 그리스/로마 고전 원전 번역이 맨 먼저 떠오르지만, 1985년의 서울대 박사 논문인 <횔덜린의 핀다르 수용에 관한 연구>는 선생의 원래 전공인 독문학과 훗날에 가서는 전업이 되다시피 한 고전 번역의 교차점으로도 의미를 지닐 법하다.
그 제목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횔덜린이 초기에 핀다로스의 시를 모범으로 삼았음을 밝히는 한편, 횔덜린의 그리스어 독해/번역에는 오류도 있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아쉽게도 <횔덜린 시 전집>에는 시인이 직접 옮겼다는 핀다로스의 시가 빠져 있다.
나귀님으로서는 사실 천병희에 대한 관심보다 횔덜린에 대한 관심에서 이 책까지도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설 횔덜린>이라는 전기 소설로 처음 알게 된 이후에 저 시인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이런저런 번역서며 연구서를 기회 있을 때마다 사 모은 까닭이다.
지금이야 시 전집이며 연구 자료가 여러 가지 나와 있고, 꼭 필요하다면 외서라도 어찌저찌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한 세대 전에만 해도 작품 번역은 물론이고 관련 자료도 흔하지는 않던 실정이니 꿩 대신 닭이라고 연구서조차 감지덕지하며 읽곤 했었다.
우리나라의 옛 시인들도 백이와 숙제 같은 중국 고사를 언급하는 구절을 즐겨 집어넣었던 것처럼, 괴테나 실러나 횔덜린 같은 독일 시인들도 고전고대의 각종 인명과 일화를 언급한 경우가 많았다고 기억하니, 그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선행 학습도 필수이겠다.
그간 사다만 놓고 다시 살펴보지 못한 번역과 전기와 연구 등 횔덜린 관련서도 열댓 권 이상이니, 조만간 시간이 나면 한꺼번에 훑어보고 치워버리든지 해야겠다. 핀다로스 수용 연구서도 '횔덜린'과 '천병희' 가운데 어디로 분류할지에 따라 운명이 갈리지 않을까.
그나저나 지금 와서 다시 확인해 보니, 천병희 선생이 타계한 날은 2022년 12월 22일이어서 지금으로부터 무려 1년 하고도 9개월 전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한참 흐른 뒤에야 뒷북치는 추모 글이고, 결국에 가서는 또다시 책 이야기일 뿐이니 살짝 민망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