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고딕 소설에 수상쩍을 정도로 열심인 '고딕서가'라는 출판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이처럼 덕업일치로 번역자가 발행인을 겸하며 독특한 주제나 장르를 꾸준히 파고드는 소형 출판사들이 종종 눈에 띈다.


바톤핑크라는 출판사도 그중 하나로 보이는데, 여기는 이미 여러 출판사에서 공포 소설을 번역해서 이름을 알린 정진영이 운영하면서 이미 절판된 본인의 기존 번역물을 재간행하는 한편 새로운 번역물을 펴내기도 하는 모양이다.


나귀님이 구입한 책은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 연대기>였는데, 이 범죄자에 관한 논픽션을 모은 1권과 픽션을 모은 2권으로 나뉘어 전자책으로 간행되었다가 나중에 가서 종이책으로도 만들고, 두 권을 엮은 합본판도 만든 듯하다.


우선 1권에는 미국의 작가 에드워드 피어슨의 에세이 "잭 더 리퍼"와 사건 당시의 신문 기사 등을 관련 도판과 함께 수록했고, 2권에는 이 연쇄 살인마의 행적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 단편 소설 8편을 번역해서 수록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구입해서 살펴보니, 혼자 만드는 책의 구조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번역과 편집 모두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예를 들어 "31호실 열쇠"라는 책 제목을 목차와 면주에서는 줄곧 "13호실 열쇠"라고 적은 것이 그렇다.


발행인 겸 번역자는 예전에 여러 번 오역 논란을 일으킨 바 있었는데 (책세상에서 나온 <세계 호러 단편 100선>의 알라딘 서평을 보라) 이번에도 역시나 의욕만 앞서고 실력이 받쳐주지 못한 결과물이 된 것은 아닐까 싶어 안타깝다.


나귀님이 잭 더 리퍼 책에서 발견한 오역 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것은 2부 단편집의 맨 뒤에 실린 리처드 코넬의 "가장 위험한 게임"의 마지막 문장이다. "어차피 좋은 침대에서 자본 적은 없다고, 레인스포드는 결연해졌다."(358쪽)


이 단편에서 사냥꾼이자 모험가인 주인공은 난파 사고로 외딴 섬에 표류하게 되는데, 그곳에는 역시나 사냥에 미친 나머지 조난객을 사냥감으로 삼는 사이코패스가 살고 있었다. 결국 주인공도 사냥감이 되어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결말에 가서는 주인공이 사냥꾼의 침실을 역습해 일대일 결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때 사냥꾼이 '패자는 사냥개의 먹이가 되고, 승자는 이 좋은 침대에서 자게 될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러고서 저 마지막 문장이 나온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번역자는 문맥을 완전히 오독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주인공(레인스포드)이 최후의 결투를 앞두고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 되뇌며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는 뜻이 아니라, 결투 이후의 상황 묘사이기 때문이다.


즉 구체적인 결투 묘사를 건너뛰고 '좋은 침대에서 자게' 된 주인공의 소감을 통해 결과를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문장이다. 따라서 (살짝 의역하면) "이렇게 좋은 침대는 처음 써 본다고 레인스포드는 생각했다" 정도가 되어야 맞다.


코넬의 단편이 상당히 유명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오역이 나왔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심지어 번역자도 시인했듯이 잭 더 리퍼와 직접 관련조차 없는 이 작품을 굳이 포함시켜 오역까지 저질렀으니 더욱 씁쓸한 일이다.


물론 잭 더 리퍼라는 소재로 픽션과 논픽션을 엮는다는 발상 자체는 참신하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수준이다. <지옥사전> 때에도 말했었지만, 이놈의 나라에서 장르 독자로 살아가기는 여전히 참 힘들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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