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의 사망 소식과 대한극장의 폐관 소식을 나란히 접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일단 오스터부터 정리해 보자. 어떤 면에서는 차일피일 하던 숙제 검사를 갑자기 받는 느낌인데, 일전에 안방 작은 책꽂이에 줄줄이 꽂혀 있던 그의 책들을 모두 꺼내 마루로 내놓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다만 놓고 읽지 않은 채로 오래 방치하다 보니 차라리 다른 책을 꽂을 자리나 만들자 싶은 생각에서였고, 그 와중에 픽션과 논픽션을 구분해서 후자부터 먼저 읽으려다가 몇 가지를 메모해 두었던 것이다.
작가 경력 초기에 대한 회고록인 <빵굽는 타자기>를 뒤적이다 보니 20대와 30대에 하는 일마다 죽쑤는 바람에 좌절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논란의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원고 교정을 도우면서 느낀 심정을 회고한 대목도 있었다. 내친 김에 대담집인 <글쓰기를 말하다>까지 뒤적이다 보니, 컬럼비아 대학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도 하에 석사 과정을 밟던 시절에 그곳을 방문한 프랑스 작가 장 주네의 연설을 통역했고, 훗날 이 일에 대한 사이드의 잘못된 회고 때문에 억울한 오해를 받았다고 토로한다.
우선 오스터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의 연설 통역은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지만, 사이드는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 수록된 에세이 "장 주네에 대하여"에서 이 프랑스 작가가 미국 방문 당시 점잖은 말투로 했던 연설을 자기 제자가 육두문자까지 섞어 가며 저속하게 번역했다며 유감을 표시했다. 훗날 오스터가 이 글을 접하고는 놀랍고도 억울한 마음이 들어 사이드의 저서 편집자에게 항의하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고 한다. "알잖아요. 에드워드가 매사에 잘못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꽤 높다는 거."
나귀님으로선 오래 전부터 저 유명한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어 왔는데, 오스터의 증언을 듣고 보니 그가 만났던 또 다른 기인 저지 코진스키와 에드워드 사이드가 결국 비슷한 심성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되었다. 즉 자기가 가진 것을 실제보다 더 과장하는 버릇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남의 기분이며 심지어 진실 여부까지도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에고가 강한 사람들인 셈이고,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라 할 수 있겠다.
사이드에 대한 비판은 중동 전문가인 버나드 루이스도 이미 내놓은 바 있는데, 쉽게 말해 본인이 팔레스타인 출신이라는 사실을 이용해 중동학계 전체를 인종차별주의자인 것처럼 매도했다는 것이다. 즉 '오리엔탈리스트'라는 용어 자체는 문자 그대로 '동양학자'라는 뜻에 불과했건만, 마치 동양학/동양학자/동양주의 자체가 인종차별적이고 문화제국주의적인 것처럼 대중을 오도했다는 것이다. 당장 사이드의 글을 읽어봐도 그의 '오리엔탈리즘' 개념이 딱히 명료하지 않고 모호한 이유도 그래서이다.
저지 코진스키도 비슷한 맥락인데, 폴란드에서의 유년기에 갖가지 폭력과 참상을 목격하고 미국으로 이민하여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는 본인의 주장도 나중에 가서는 상당히 과장되었다고 비판을 받았고, <색칠 당한 새>와 <챈스 박사> 같은 대표작들 역시 외부 세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폴란드 소설의 표절이거나 대리 저술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폴 오스터의 회고대로라면 거짓말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그 거짓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까지도 즐겼던 그 인물의 최후가 자살이었다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오스터의 어떤 책을 보니 우연의 일치, 또는 믿기 힘든 예화의 사례를 여럿 적어 놓은 것이 있었는데, 어떤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매료나 감탄이 그의 작품 세계 전반과 적극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 여부는 나귀님도 잘 모르겠다.(왜냐하면 아직 그의 책을 다 읽은 것이 아니므로). 하지만 흔히 접할 수 없는 기이한 심성의 소유자들까지도 그런 불가사의한 힘의 사례에 속한다고 가정하면, 사이드와 코진스키에 대한 일화가 오스터의 회고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