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그린비에서 나온 마르셀 모스 전기를 재정가로 무려 60%나 할인 판매하기에 깜짝 놀라 구매하면서, 혹시 같은 시리즈에 비슷한 분량 및 가격인 데리다 전기도 결국 비슷한 운명이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며칠 전에 우연히 알라딘을 돌아다니다가 재정가 도서 코너에 들어가 보니 역시나 비슷하게 할인 판매하기에 원래 정가 48,000원에 재정가 18,000원에 구입했다.


개인적으로는 기쁜 일이지만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에 얼른 구입했던 독자라면 상당히 불쾌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기는 하는데, 지난번 맑스와 톨킨의 책값 종말 전쟁에서 언급한 것처럼 애초부터 살 놈만 사라는 식으로 가격을 확 높여버리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데리다 정도라면 나귀님처럼 호기심에 한 번 사볼 만한 평범한 독자도 적지 않을 테니.


원래 정가가 좀 과도하지 않느냐는 의문을 품게 되는 까닭은 모스 전기도 그렇고 데리다 전기도 글자가 크고 여백이 많아서 비교적 성글게 조판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데리다 전기는 본문이 23행인데, 어제 뒤적인 <특집, 한창기>는 무려 32행이다! 무려 1,000쪽이 넘는 전자를 후자처럼 조판했었다면, 현재 아예 누락된 색인까지 만들어 넣어도 700쪽 내외이지 않았을까.


데리다라고 하면 프랑스 철학자로서 이름은 유명하지만 저작은 난해하다는 소문이 무성한데, 생각해 보니 나귀님도 그간 이것저것 사다 놓은 것은 많아도 완독한 것은 얼마 되지 않고, 그나마도 맥락 없이 읽은 까닭에 제대로 이해했다고 자부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는 <그라마톨로지>를 비롯한 주요 번역서가 출간 이후 줄곧 오역 논란에 휘말렸다는 점도 선뜻 읽기 꺼려지는 이유다.


이 철학자에 대한 전기적인 차원에서의 관심은 지난번에 구입한 '하룻밤의 지식여행' 가운데 한 권인 <데리다>의 도입부를 보면서부터 생겨난 셈인데, 아마도 낭트 대학에서 리쾨르 후임으로 교수를 선발할 때에 지원했다가 무례하고 불쾌한 대접을 받았던 일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프랑수아 도스의 리쾨르 평전에서도 읽은 것 같은데 또 까먹었다!)


이번에 구입한 데리다 전기는 비교적 방대한 내용 속에서 해당 사건을 비롯해서 데리다가 겪은 갖가지 공적이고 사적인 논란, 저술 과정, 교우 및 반목 관계 등의 행적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종종 흥미로운 일화가 많다 보니 구입 직후에 대강 훑어보다가 여기저기 나중에 다시 보려고 연필로 표시해 둔 대목이 적지 않다.(예를 들어 체코에서의 "카프카 체험" 같은 것).


다만 생애 서술에 집중한 까닭인지 핵심 사상에 대한 설명 면에서는 살짝 미진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는데, 예를 들어 "무조건적 환대"의 개념처럼 나귀님이 최근에야 주목하게 된 데리다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째서인지 자세한 언급이 없었다.(물론 그의 옛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사람이 이 개념을 "까는" 기고문에서 인용한 구절은 상당히 예리해서 오히려 마음에 들었지만!) 


그 외에 "피라미드"를 "파리미드"로 쓰는 등의 희한한 오기도 몇 가지 눈에 띄고, 칸트의 <학부들의 다툼>을 <능력들의 갈등>으로 오역한 부분도 있으니, 좀 더 섬세한 교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아울러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무려 1,000쪽이 넘는 책에 색인조차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야말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고 말이다.


그나저나 처음에는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 몰랐다가, 구입 후에야 책날개의 약력을 살펴보다가 만화와 만화 비평 작업도 했다는 구절을 보고서 비로소 누구인지 깨달았다. 바로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를 만든 사람이었던 거다! 그런데 알라딘에서 다른 번역서로도 검색해 보니 그의 이름은 "브누아 페터스"와 "베누아 페터즈"와 "보누아 페테르스"로 정말 제각각 표기되었다.


그중에서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는 "보누아 페테르스"라는 희한한 표기로만 검색되는데, 이건 책에 "브누아 페테르스"라고 제대로 나온 것을 굳이 "알라딘 단독"으로 잘못 입력해서 오타를 낸 것이다.(Yes24는 "브누아"라고 제대로 입력했다. 멍청한 알라딘!) 출판사마다 인명 표기가 제각각이더라도, 그 책들을 모두 받아 판매하는 서점에서는 좀 교통정리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나귀님의 입장에서 브누아 페터스는 당연히(!)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의 저자로 가장 먼저 기억된다. 그중 <기울어진 아이>는 예전에 교보문고에서 내놓았던 그래픽노블 시리즈 가운데 한 권으로 나왔었는데 (그 시리즈에 포함된 다른 작품으로는 저 유명한 <잉칼>과 게이먼/맥킨 콤비의 <흑란>이 있다) 나중에 세미콜론에서 전12권으로 예정했다가 네 권만 내고 절판되었다.


역시나 교보문고에서 나온 <이미지, 모험을 떠나다>도 "어둠의 도시들"의 그림 작가와 공저한 만화 이론서이고, 특이하게도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대담집 <그림 그리는 사람>도 번역되어 있으니, 브누아 페터스는 정말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저술가인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절판과 재정가라는 가혹한 운명을 피해가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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