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에서 <수사반장>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드라마를 방영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생각나는 책이 하나 있어서 계단 책장을 뒤져 보았다. 바로 저 유명한 드라마에서 주인공인 최불암의 실제 모델이라고 해서 유명한 최중락 전직 총경의 자전 에세이인 <우리들의 영원한 수사반장>(민중출판사, 2007)이다.
1929년생인 최중락은 한국전쟁 중인 1950년에 순경 계급으로 부임하여 1990년에 총경 계급으로 퇴임했고, 이후 에스원(세콤)의 고문으로 재직하다 2017년 사망했다. 주로 강력계 형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범죄자를 체포해 "포도왕"(체포 실적 우수자)에 선정되고, 그 경험을 토대로 <수사반장> 자문을 맡았다.
본격 자서전이라기보다는 기존 강연문과 기고문을 재가공한 모양인지 내용이 다소 산만하고 오타가 종종 눈에 띄는 것으로 미루어 그리 잘 만든 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갖가지 범죄 실화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기는 하지만, 기대만큼 자세한 내용까지는 아니어서 미진한 느낌이다.
예전에 아름다운가게에서 정가의 3분의 1도 안 되는 헐값에 팔기에 심심풀이로 집어들었던 책인데, 범죄 실화라든지 하다못해 저 드라마 관련 일화의 참고 자료로 쓰기에도 부족해 보인다. 아울러 출간 이후의 변화한 세태를 감안해 보면, 책의 내용 중에는 칭찬보다는 비난을 받을 만한 내용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이승만 정권의 1960년 3/15 부정 선거 당시 자신도 상부의 지시대로 미리 표기한 투표용지 20매를 투표함에 집어넣었다는 증언이라든지, 전두환 정권 초기에는 자신이 체포한 범인 가운데 여러 명을 삼청교육대에 보냈다고 회고하면서 뒤늦게나마 자신의 행동을 사죄하는 대목 같은 것이 그렇다.
초짜 형사 때에는 실적을 올리려다 끄나풀에게 속아 무고한 사람을 체포하기도 하고,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에서 무고한 피의자를 범인이라 우기기도 하고, 도난당한 유물을 찾아내라고 상부에서 독촉하자 위조품을 제작해서 바치는 둥, 지금 같으면 곱게 넘어갈 수 없을 법한 사고도 적지 않게 쳤다.
야산의 부패한 변사체를 발견하고는 신원 확인을 위해 손가락 하나를 떼어내 옷 주머니에 넣고 집에 왔다가 부인이 발견했다는 등의 엽기적인 내용도 있다. 과학 수사가 도입되기 이전이다 보니 눈썰미와 으름장만이 유일한 수사 기법이고, 공조 수사도 원활하지 않아 경찰끼리 멱살 잡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고위층 자제의 일탈을 과감히 단속한 적이 있었다고 자랑하는 한편으로, 친분이 있는 유력자가 개입된 경우에는 사건을 은폐하거나 보도를 무마하는 데 개입하기도 했다. 뇌물 공여자인 사업가가 끝까지 함구한 덕분에 뇌물 수수 혐의를 받았던 경찰관 여럿이 복직하게 되었다며 감사를 표하기까지 한다.
한국전쟁 당시 전투 경찰로 후방에서 인민군 패잔병 토벌에 참여하며 경력을 시작한 사람이니만큼 당연히 보수적인 면모도 드러난다. 4/19와 5/16과 10/26과 12/12 같은 주요 사건 내내 현직에 있었지만 질서 유지에 노력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고, 박정희의 하사금 봉투를 가보로 삼았다며 자랑한다.
이런 일화들을 보면 그간 세상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최근에는 경찰의 어설픈 대처며 각종 비리 때문에 대중의 비판이 따갑지만, 지금 이 정도만 해도 최중락이 현역이었던 시절에 비하자면 크게 개선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을 감안하면 완벽은 무리이지 않을까.
일각에서는 공권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공권력의 강화는 십중팔구 권위주의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경찰이며 군인의 위세가 등등했던 시절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억울함도 적지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자유가 더 늘어났다는 것은 이전에 비해 훨씬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기묘한 우연의 일치로, 문제의 드라마가 (그것도 무려 4/19에) 방영을 앞둔 상황에서 박종철의 어머니 사망 뉴스가 나온다. 저 악명 높은 고문치사 사건에서는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궤변이 공분을 일으켰는데, 사실 이런 호통과 위협은 <수사반장>에서도 흔히 등장한 수사 기법이었다.
이후 밝혀진 것처럼 박종철을 죽음으로 몰아간 수사 과정은 단순히 책상 내리치기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탁 치니 억 했다"는 경찰의 궤변은 상당히 많은 것을 은폐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 사건보다 한 세대 먼저를 배경으로 삼은 <수사반장> 프리퀄은 과연 당시의 현실을 어디까지 드러낼 수 있을까?
과거의 드라마는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나빠진 경찰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사회 비판을 배제하고 신파극을 지향했지만, 새로운 드라마는 내용이나 표현 모두에서 노골적 묘사나 조직의 부패를 다루는 최근의 경향을 반영하여 당시의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나 경직된 경찰 조직에 대해서도 다룰 만해 보인다.
다만 그렇게 되면 옛 시리즈 팬들에게는 설정 붕괴일 수 있으니, 과연 어느 정도까지 다룰지가 중요해지겠다. 마침 각종 사고와 비리로 인해 경찰에 대한 신뢰가 나날이 감소하는 상황에 나온 드라마이니, 어쩌면 옛 시리즈처럼 경찰 이미지 개선 도모 차원일지도 모르겠는데, 여차 하면 역효과만 생길 수도...
[*] 오리지널 드라마의 형사 4인방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맨 나중에 합류해 놓고 맨 먼저 사망한 남성훈이다. 말년에 지병으로 거동이 불편해지며 방송 활동도 뜸해지자, 간만에 찾아간 단골 미용실에서조차 푸대접을 받았다던가. 이후 잠시 배우로도 활동했나 그랬던 그 아들이 부친 사후에 인터뷰에서 원통해 하며 그 사연을 내놓기에 세상이 참 이렇구나 싶어 혀를 찼던 기억도 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