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잖아도 얼마 전에 신간 중에 <호수 속의 여인>이라는 소설이 있기에 월터 스콧의 <호수의 여인>하고 무슨 관련이 있나 궁금해서 클릭클릭해 보니, 스콧의 장시는 The Lady of the Lake 이고, 이 소설은 The Lady in the Lake 라서 아예 원제부터 달랐다. 역시나 <호수의 여인>으로 번역된 레이먼드 챈들러의 탐정 소설도 원제는 역시나 The Lady in the Lake 라서 스콧의 작품과는 달랐다.


"호수 속의 여인" 번역서 2종은 제목처럼 호수 속에 빠져 죽은 여인에 대한 내용인 모양인데, 스콧의 장시는 아서 왕 전설에서 엑스칼리버를 건네주었다는 "호수의 여인", 즉 호수의 여신인지 요정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앞부분에 등장하는 낯선 기사가 작품의 여주인공인 엘렌을 처음 봤을 때, 호수 한가운데서 배를 저어 나타난 신비로운 모습에 감탄한 나머지 "호수의 여인"에 비견한 탓이다.


작품의 배경은 메리 스튜어트의 아버지인 제임스 5세 재위 당시의 스코틀랜드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 역사에서 소재를 취한 것까지는 아니라고 한다. 한때 왕의 측근이었던 귀족 제임스 더글러스는 총애를 잃고 낙향해서 호수의 한 섬에 딸 엘렌과 함께 은둔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출타 중일 때에 엘렌은 호숫가에서 사냥 중에 길을 잃은 낯선 기사를 발견하고 집으로 초대하여 재워준다.


이후 그 지역에서 제임스 5세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는데, 그 주모자는 엘렌의 사촌으로 용맹하지만 성격이 거친 로더릭 듀였다. 엘렌은 왕에게 충성하는 또 다른 귀족 청년 맬컴 그림을 연모하고 있었기에, 로더릭으로부터 연이어 구혼을 받으면서도 늘 퇴짜를 놓곤 했다. 더글러스는 봉기를 만류하지만 로더릭이 고집을 꺾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전란을 피해 딸을 데리고 산속 동굴로 은신한다.


곧이어 앞서 만났던 낯선 기사가 동굴로 찾아와서 전란을 피해 왕이 계신 곳으로 가자고 설득하지만, 엘렌의 완강한 거절에 반지 하나를 증표로 건네주며 '이것을 보시면 왕께서도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조언을 남기고 떠난다. 낯선 기사는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로더릭과 마주치고, 호감을 느끼며 투항을 설득하지만 거절당하자 일대일 결투를 벌여 상대를 쓰러트린다.


그 사이에 더글러스는 양측의 충돌을 막기 위해 왕을 직접 만나 담판을 지으려다 투옥되고, 아버지를 뒤쫓아 온 엘렌은 낯선 기사의 안내를 받아 직접 왕을 만나러 알현실로 들어갔다가, 뒤늦게야 자신에게 반지를 선물했던 그 낯선 기사가 바로 제임스 5세임을 깨닫고 대경실색한다. 결국 더글러스는 왕의 총애를 되찾고, 엘렌은 맬컴과 결혼하며, 로더릭은 결투의 부상으로 결국 숨을 거둔다.


개인적으로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미행 중인 제임스가 로더릭과 마주치는 대목이었다. 한밤중에 우연히 맞닥트리자마자 서로 적대 관계임을 깨닫지만, 로더릭은 상대방의 당당한 태도에 호감을 느껴 기사로서 안전 보장을 약속하고, 제임스도 비록 반란자이지만 기사도를 지키는 상대방의 태도에 역시나 호감을 느낀 나머지 마지막까지도 항복을 권유하다 결국 부상을 입은 그를 살려준다.


<호수의 여인>은 당대에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후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흑인 노예 출신 인권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이름인데, 바로 이 작품에 나오는 불굴의 노인 "더글러스"의 성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슈베르트도 이 작품을 가지고 가곡을 여럿 작곡했는데, 저 유명한 "아베 마리아" 역시 원래는 엘렌이 부르는 노래에 곡을 붙여 탄생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이 작품을 읽으며 새삼 스콧의 생애가 궁금해서 참고 자료를 찾다 보니, 의외로 도널드 서순의 <유럽 문화사> 1권에 "'밝은 광채 속'의 스콧"이라는 제목으로 아예 한 장을 할애해 놓아서 큰 도움이 되었다. 스콧은 생전에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을 뿐만 아니라 괴테, 발자크, 스탕달, 오스틴 등 최고의 작가들로부터 감탄과 존경을 얻었으며, 역사 소설이라는 장르를 사실상 개척했다.


심지어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스콧의 소설이 번역됨으로써 새로운 창작의 계기가 마련되었을 정도였으니, 말 그대로 문학을 통해 온 유럽을 지배한 소설가로서는 전무후무한 사례였다. 아쉽게도 세월이 지나면서 한때의 인기가 무색하게 지금은 아동용 각색으로 명맥을 이어가는 상태이지만, 문학사적으로는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만큼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작가가 월터 스콧이다.


내가 읽은 번역서는 <미인의 호수>(스코트 작, 유영 옮김, 문조사, 1989)로 제목이 바뀌고, 원문은 운문이지만 산문으로 번역되었다.(같은 번역자의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 번역도 역시 산문역이다). 아주 예전 책은 아닌데도 오타가 많고 편집이 부실하여 읽기는 불편하다. <호수의 아가씨>라고 다른 번역자의 영한대역본도 있는 모양인데, 나귀님도 아직 실물을 확인하지는 못한 상태이다.


내친 김에 오래 전 사다 놓은 <아이반호>와 <웨이벌리>와 <캐닐위스의 성>도 읽어봐야겠다. <스코틀랜드 역사 이야기>는 지난번 바깥양반이 메리 스튜어트 공부를 하며 뒤적이기에 덩달아 읽어보았는데, 뭔가 일이 틀어질 때마다 '스코틀랜드인 기질'을 탓하며 진심 빡쳐하는 저자의 푸념이 인상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모두가 절판이라는 사실이 스콧의 현재 위상을 대변하는 것도 같지만...






[*] 도널드 서순의 <유럽문화사> 1권에서 스콧 바로 앞부분에는 고딕 소설 유행을 정리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 지난번에 말한 "수상쩍을 정도로 고딕 소설에 진심인 출판사" 고딕서가에서 나온 작가들이 연이어 언급되었다. <오트란토 성>과 <몽크>부터 앤 래드클리프의 소설까지 여럿이 이미 번역되었으니, 한 번 기회를 잡아 정리해 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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