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서 삼일절 105주년 기념으로 독립선언서의 일부 문구를 집어넣은 에코백이며, 독립선언서의 전문을 축쇄한 투명 책갈피며 하는 사은품을 만든 모양이다. 독립선언서라 하니 문득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육당 최남선 전집> 제1권을 꺼내 보았다. 1973년에 현암사에서 전집 1차분(1-8권)을 내놓으면서 사은품으로 독립선언서 복제본을 끼워 주었는데, 훗날 내가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에도 다행히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B5 판형에 딱 맞게 제작된 하얀 봉투를 열면 독립선언서와 그 소장자였던 월탄 박종화의 소개글(19세 때에 탑동공원에서 배포한 독립선언서 가운데 한 장을 받아서 이제껏 보존하고 있었다는 설명), 출판사의 해설까지 깔끔하게 인쇄한 가로 65센티미터, 세로 48센티미터의 얇은 한지가 나온다. 독립선언서 자체는 가로가 45센티미터쯤 된다고 하니, 이 복제본은 실제보다 더 넉넉하게 여백을 두어 제작했다고 봐야 하겠다.


육당 전집이라면 초판이 최소한 수천 부쯤은 간행되었을 법하니 이 복제본도 대략 그 정도 숫자가 돌아다닐 법도 한데, 의외로 지금은 대부분 그 존재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이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도 드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일각에서는 현암사 복제본을 마치 원본인 양 착각하는 듯하니 우스운 일이다.(예를 들어 <한국일보> 미국판의 다음 기사를 보라. http://dc.koreatimes.com/article/20160301/973257)


그나저나 독립선언서의 복제본이 육당 전집에 사은품으로 따라온 까닭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이 문건이 최남선의 창작이기 때문이다. 훗날의 친일 행적 때문에 요즈음에 와서는 최남선이라는 이름 석 자만 언급해도 '친일파'라는 딱지가 따라붙게 마련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독립선언서 작성부터 역사 연구, 고전 보급, 언론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활약한 선각자 겸 지식인의 면모가 분명히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친일 행각 때문인지 과도하리만치 부정적인 이미지를 최남선에게 덮어씌우는 것이 아닌가 싶은 억지 비판도 없지 않던데, 예를 들어 독립선언서 첫 줄에서 "조선"이 "선조"로 오식된 것조차도 육당 탓을 하는 주장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는 육당이 작성한 글을 인쇄소에서 식자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잘못임이 분명하며, 당시에 인쇄 작업이 비밀리에 이루어졌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일어날 법한 아쉬운 실수일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런 실수가 서지학적으로는 초판본을 확인하는 중요한 단서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향후 어디선가 오래 된 독립선언서가 발굴되었을 경우, 첫 줄에 "선조"라는 오식이 없다면 그 역사적인 날에 나온 초판본까지는 아니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라딘 에코백에 들어 있는 문구에는 "선조"가 "조선"으로 바로잡혀 있으니, 이것 역시 독립선언서 초판본의 충실한 재현이라고 볼 수는 없겠다.


물론 알라딘에서야 단지 오식을 바로잡으려는 선의의 수정을 시도했을 수도 있지만, 굳이 원문씩이나 가져다가 인쇄하기로 결정했던 애초의 취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도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없었다면 더 좋았을 법한 실수 때문에 지금 와서는 애꿎은 육당만 원흉 취급을 받아 비난을 받는 실정이지만, 이쯤 되면 "선조"라는 오식도 105년 전 그 날 그 사건과 함께 이미 역사의 일부분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추가]


글을 올리고 나서 사진을 첨부하고 다시 살펴보니, 현암사의 독립선언서 복제본에 붙은 설명에서 "육당이 밤을 새우며 직접 쓰고 조판, 교정한 이 '독립선언문'은" 하는 구절이 뒤늦게야 마음에 걸렸다. 작성이야 본인이 했다 치더라도 식자와 인쇄까지는 도맡지 않았을 터이며, 심지어 인쇄도 천도교 측 보성사에서 담당했었다고 전하는데, 어째서 이 설명에서는 육당이 "직접" 조판과 교정까지 담당했다고 나오는 걸까?


그제야 관련 자료를 뒤져 보니, 앞서는 간과했던 몇 가지 사실을 새로 알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육당이 "직접 쓰고 조판, 교정"을 담당했다는 설명은 사실이다. 독립선언서 원고를 완성한 후에 자신의 인쇄소인 신문관에서 직접 조판(식자)과 교정을 해서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로 넘겼다기 때문이다. 육당은 17세 때 출판사 겸 인쇄소인 신문관을 설립했으니, 인쇄 실무에 대해서도 충분히 잘 알았을 것이다.


손자 최학주의 회고록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에도 "당신이 직접 신문관에서 조판하고 교정까지 본 후에 인쇄만 천도교 측 보성사로 넘겼다. (...) 급박한 상황에서 극비리에 진행한 일이라 선언문 첫머리에 '조선'이 '선조'로 돼 있는 것을 놓쳤다"(159쪽)는 증언이 들어 있으니, 이쯤 되면 (나귀님이 앞서 쓴 글의 내용과는 정반대로) 문제의 오식에 대해서만큼은 육당을 탓해도 딱히 변명할 여지가 없을 듯하다.


다만 인쇄 업무의 특성상 육당 외에도 여러 사람이 이후 작업에서 관여했음이 틀림없었을 터인데, 어째서 그처럼 눈에 띄는 오식을 미리 발견하고 수정한 사람이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중에도 민족 대표 33인의 명단이 몇 차례 바뀌는 바람에 수정이 이루어졌으며, 최남선의 초고에 대해 오세창이 이의를 제기해서 단어 수정도 이루어졌다고 전하니 말이다.


구글링해 보니 고맙게도 한양대 사학과 박찬승 교수가 "3.1.독립선언서 인쇄 과정과 판본의 검토"라는 논문에서 독립선언서 제작 부수 관련 논란이며, 서로 상이한 초판본 존재에 따른 진본 논란 등 여러 가지 쟁점을 명료하게 규명한 상태였다. 이 논문에 따르면 육당이 자신의 인쇄소 신문관에서 직접 활자를 조판해서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로 보냈다는 증언이 당시의 수사 자료며 언론 보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다만 보성사의 당시 책임자는 육당이 만든 활판의 세로 길이가 자기네 인쇄기에는 맞지 않아서 새로 조판했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조선"이 "선조"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조선/선조"의 위치가 첫 줄 상단임을 감안하면 해당 활자를 굳이 움직였을 가능성은 없고, 보성사의 책임자 역시 당시 활판의 내용을 자세히 읽지는 않았다고 증언했으니 추가 교정도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후 33인의 명단이 수정되는 과정에서 연판이 3종이나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조선/선조" 오식도 미리 파악하기만 했었다면 이처럼 충분히 수정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육당의 친일 행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늘어난 까닭인지, 지금은 이런 실수에다가 오세창의 단어 수정 제안까지도 졸지에 육당을 폄하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문제의 "조선/선조" 오타가 훗날의 독립선언서 원본 논란에서 중요한 단서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는 현재 8점이 남아 있는데, 훗날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별도로 인쇄한 것이라고 주장되는 독립선언서 이본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그 이본은 조판과 서체 등이 기존의 독립선언서와 확연히 달랐기 때문에 그 진본 여부를 놓고 팽팽한 논쟁이 펼쳐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자칭 신문관 이본이 후대의 맞춤법을 따르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 때문에 (예를 들어 ㅅㄱ 대신 ㄲ을 사용했다) 초판본이 아니라 1950년대에 제작된 위작으로 입증되었는데, 어째서인지 이런 사실이 제대로 규명되기도 전에 문화재청에서 보성사 진본과 신문관 위작 모두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양쪽 모두 국가등록문화재 2016-1호와 2016-2호로 남아 있는 황당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어째서인지 문화재청에서는 구체적으로 진위 여부를 따지기보다는 그냥 다 문화재로 지정해 버리자는 식의 황당한 논리를 즐겨 펼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진달래꽃> 초판본을 둘러싼 논쟁이다. 이전까지 초판본으로 간주되던 한성도서본과 다른 중앙서림본이 발굴되고, 그 소장자의 조사로 맞춤법의 차이(ㄲ와 ㅅㄱ)가 결정적인 단서로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규명 없이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재의 발굴과 보존뿐만 아니라 진위 판별에도 각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한 정부 기관으로서는 영 어울리지 않는 행태인데, 그만큼 고서나 서지학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나중에 가서는 나귀님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현암사의 1973년 복제본 사은품조차도 월탄 박종화 소장 독립선언서 원본으로 인정되어 국가등록문화재 명단에 오르는 것도 시간 문제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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