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뉴스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기에 무슨 영문인가 했더니, 그의 대표작을 가지고 만든 미술품 조각 투자 상품이 나와서 화제인 모양이다. 얼마 전부터 음악 저작권이니 뭐니 해서 조각 투자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리다가 한동안 잠잠한 것 같더니, 이번에는 금융 당국에서도 인가하고 안전성도 보장되었다는 둥 벌써부터 여기저기 나팔을 불어 대는 것으로 미루어 제법 판을 크게 키우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미술품이나 골동품 같은 희귀한 상품에 대한 조각 투자는 다단계(폰지) 사기에 불과하다는 판결이 이미 한 번 이상 나왔음을 고려해 보면, 이런 투자 뉴스/권고에 대해서도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하다. 수년 전에 프랑스에서도 무려 사드의 <소돔 120일> 육필본 원고를 비롯한 여러 골동품에 대한 조각 투자 상품이 나와서 인기를 끌었지만, 결국 불법이란 판결이 나오며 회사는 망하고 육필본도 국가에 몰수당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미술품이나 골동품은 공급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음악 저작권만큼도 거래가 활발하지 않을 것 같으니, 나귀님 같은 무식쟁이로선 과연 그 수익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선뜻 이해할 수가 없다. 음악 저작권이니 NFT(대체불가능토큰)이니 하는 것들도 한때는 언론에서 잔뜩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생각만큼 거래가 활발하지 않아서 "들어올 때에는 맘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격으로 투자자도 난처한 상황이라 알고 있다.


그나저나 나귀님이 쿠사마 야요이라는 화가를 알게 된 계기는 미술품이나 전시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역시나 단행본을 통해서였다. 2015년에 이 화가가 삽화를 담당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간행되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절판이다!) 특유의 땡땡이 무늬가 한가득이라 살짝 정신이 혼미해지기까지 하는 작품이다. 대표작이라는 호박 그림도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혹시 순수 창작이 아니라 기존 작품의 재구성인가 싶기도 하다.


사실은 평소에 <앨리스>를 좋아해서 여러 판본을 모으는 나귀님이 쿠사마 야요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새로운 앨리스가 나왔다기에 긍금해서 구입했던 책인데, 막상 확인해 보니 기대만큼 대단한 것은 아닌 듯해서 책더미 사이에 방치하던 참이었다. 지금 다시 꺼내 보니 역시나 별로다! 쿠사마 야요이는 "나는 현대를 살아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라고 발언했다고도 나오던데, 적어도 내가 아는 "앨리스"까지는 아닌 듯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자꾸 머리에 떠오르는 <앨리스>는 루이스 캐롤의 원작이 아니라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그 분야라면 역시나 디즈니 버전이 가장 유명하겠지만,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방영했던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 주제가가 워낙 인상적이다 보니 가끔 생각나서 흥얼거리게 된다. 몇 년 전에 동네 공원을 지나다 보니 어린이 행사에서 그 주제가와 <오즈의 마법사> 주제가가 나오기에, 새삼 시대를 초월한 명곡의 위엄을 실감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앨리스>에서 주제가만큼 각별히 기억에 남았던 삽입곡은 "도마뱀"이다. 원작에서도 굴뚝으로 들어갔다가 앨리스에게 걷어차이는 등 갖은 고생을 하던 도마뱀 빌은 애니메이션에서도 호구로 등장해서 뭔가 어렵고 난처한 일이 있을 때마다 등 떠밀려 앞장서게 된다. 즉 이상한 나라 주민들이 "어떻게 하지?" "도마뱀 빌을 부르자!" "그게 좋겠어!" 하며 지들끼리 떠들고 나면, 도마뱀 노래를 부르며 찾아 나서는 거다.


"도마뱀, 도마뱀,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낸다. 도마뱀, 도마뱀, 무슨 일이든 잘 해내지." 지금도 가사와 곡조를 기억할 정도로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최근 다시 구글링해 보니 엉뚱하게도 고현정이 어느 영화에서 이 노래를 혼자 흥얼거렸다는 증언이 여럿 나와서 깜짝 놀랐다. 확인해 보니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이라는 영화인데, 심지어 도마뱀 노래 자체도 일본의 유명한 가요에서 곡조를 따온 것이라는 증언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인터넷 세상은 시장통 같아서 뭔가가 화제가 되면 여러 사람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거들면서 점차 선명한 그림이 만들어지기도 하니 참으로 신기하다. 그런데 인터넷도 2000년 이전의 자료에 대해서는 공백이 수두룩하고, 가끔은 뭔가 궁금해서 검색해 보아도 관련 자료나 증언을 전혀 확보하지 못하게 마련이라는 한계가 없지 않다. 최근에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라는 컨츄리꼬꼬의 노래의 유래를 살피면서 그런 사실을 절감했다.


이건 예전에 탁재훈이 <아는 형님>에 나와서 "내가 만든 노래"라고 자랑하며 불러서 알게 되었는데, 딱 듣자마자 의도적 표절 아니면 본의 아닌 착각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가 "내가 좋아하는 화가는... 없다" 뿐이라 시작과 동시에 끝날 만큼 짧은 것이 특색이며, 어찌 보면 허무 개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건 원래 1985년 제9회 대학가요제 금상 수상곡인 정희정의 "내가 좋아하는 화가"를 토대로 나온 농담이었다.


참고로 제9회 대학가요제의 대상은 (노래 자체로도 유명하지만 훗날의 스캔들로 더 유명해진) 높은음자리의 "바다에 누워"였고, 입상작 중에서도 (두 곡 모두 당시 학생들의 천태만상을 그린 에세이로 인기를 끈 국어교사 이은집이 작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던) "신입생"과 "풍년굿" 등이 제법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유명한 곡들과 함께 나온 까닭인지 비록 인기 면에서는 살짝 밀렸지만, 정희정도 한동안은 방송에 직접 나왔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MBC FM의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주말 공개 방송에 정희정이 출연해서 그 노래를 불렀다. "내가 좋아하는 화가는 /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며 / 마냥 담배만 피워물고 / 슬픈 그림만 그리네." 그러자 함께 나온 코미디언 고영수가 자기도 한 곡 뽑겠다며 "내가 좋아하는 화가는 / 없다"라고 패러디를 해서 웃음을 자아내었던 것이다. 워낙 재치 있는 가사/개그였기 때문에 나도 지금까지 똑똑히 기억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고영수가 만든 것과 대동소이해 보이는 노래가 탁재훈 작사/작곡으로 2002년에 컨츄리꼬꼬 앨범에 수록/발매되었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워낙 길이가 짧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화가"에 대한 표절 시비 요건까지는 충족되지 않아서 굳이 정희정(또는 작사/작곡가)을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다 치더라도, 최소한 그 개그/패러디를 처음 만든 고영수에 대해서만큼은 언급하는 것이 예의일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쩌면 탁재훈으로서는 이 노래가 저작권 없는 구전 가요의 일종이라고 착각해서 무단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찍이 DJ DOC가 "허리케인 박"을 리메이크하면서 마찬가지로 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허리케인 박"은 코미디언 장두석이 음악 꽁트를 하면서 직접 부른 창작곡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뒤늦게 DJ DOC가 사과하고 배상하는 등의 해프닝이 있었다.(꽁트에서는 이봉원이 떡볶이집 DJ "허리케인 박"으로 나왔다고 기억한다).


유튜브에서 탁재훈 버전의 댓글을 살펴보니, 정희정의 곡을 망쳐놓았다는 질책도 하나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전후 사정을 모르는 듯하다. 당사자인 정희정이나 고영수가 가만 있는 상황에서 나귀님이 나서서 떠드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외관상 전지전능한 인터넷 역시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이며 증언에 의존하므로 한계가 있고, 그걸 응용한 AI 역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어 한 마디 남겨본다.


여하간... 쿠사마 야요이는 나귀님이 좋아하는 화가가 아니었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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