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옥사전> 1권을 구입하고 나서 그 문제점에 대해서 몇 마디 해 볼까 생각만 하다가 이래저래 바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해서 차일피일 하다 보니 (어차피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뭘!) 어느새 2권도 간행되어 버렸다. 이왕 이야기할 거면 출간 전에 할 걸 그랬나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기는 하는데, 뭐, 기껏 떠들어 보았자 출판사에서 귀담아 듣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니 굳이 시기를 따지고 자시고 할 이유는 없어 보이기도 한다.
여하간 <지옥사전>의 번역은 살짝 의외였다. 그렇잖아도 최근 웹툰이며 웹소설 창작이 늘어나서인지 온갖 트리비아를 모아 놓은 사전들이 많이 나오는 모양인데, 이것 역시 2차 문헌이기는 하지만 최근 양산되는 3차와 4차 문헌보다는 조금 더 원전에 가까운 편이며, 게다가 간행 연대를 따져 보면 이미 그 자체로 고전이라고 할 만하니 말이다.
알라딘 서평을 보니 아마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해서 예약 판매를 했고 이후 일반 서점으로도 유통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출판사 운영자가 저 엉터리 <한국 요괴 도감>의 저자이고 (이 책에 관해서는 곽재식의 유사한 책과 함께 이미 비판한 적이 있다), <지옥사전>에서는 윤문과 교정을 담당했다기에 약간 미심쩍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보기에 <지옥사전>에서는 세 가지 부족한 점이 눈에 띄었다.
첫째는 일관성 부족이다.
예를 들어 "클레오파트라" 항목을 보면 Plutarch는 "플루타르코스"라고 그리스어식으로 적은 반면, Mark Anthony는 "마크 안토니"라고 영어식으로 적었는데 당연히 라틴어식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라고 적어야 맞다. 프랑스어 원문은 Marc Antoine이었으니 굳이 영어식 철자를 찾아서 병기하면서도 현재 통용되는 라틴어식 표기를 외면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프랑스어 고유명사에 굳이 영어 고유명사를 일일이 병기한 것을 보면 애초에 영어에서 중역되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최대한 현행 표기법을 존중했어야 한다. 항목 표제어도 마찬가지여서 "드리덴(존)"은 영어식인 "드라이던(존)"이 되어야 맞고, "뒤러(알베레히드)"는 독일어식인 "뒤러(알브레히트)"가 되어야 맞다. 명색이 사전인데 표기법이 제멋대로라면 활용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둘째는 식견 부족이다.
예를 들어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 항목에서 "에우세비오 교황"이라고 번역한 인명은 "[교회사가] 에우세비오스"라고 해야 맞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세비우스"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유명한 사람을 말한다. 짐작컨대 번역자/교정자가 구글링을 하다가 교회사가(260/265-339) 대신 동명이인 교황(?-310)만 찾아낸 모양이다. 기독교에 대해 약간의 지식만 있었어도 그 이름을 들으면 교황보다 교회사가를 떠올리는 것이 당연한 귀결인데, 사실 이런 책을 번역/교정하려면 고전과 종교에 대한 식견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발행인/교정자의 식견 부족은 저서인 <한국 요괴 도감>에서 여실히 드러난 바 있어서, 유명한 고전의 서명을 틀리는가 하면 내용도 1-3-5-7-9로 앞뒤가 맞지 않게 옮기는 등의 문제가 속출했었다. 그래서 나 역시 어떻게 만들었나 궁금해서 <지옥사전>을 구입하면서도 미심쩍을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짐작컨대 이 발행인/교정자가 "저자"로 나온 다른 책에서도 상황이 비슷하지 않을까.
셋째는 정성 부족이다.
예를 들어 "예언가"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버질에 대해 쓴 세르비우스의 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가 자리 잡기 전, 버질은 흑사병이 창궐한 마르세유에서 고급 음식으로 어느 가난한 자의 배를 불리고 온 도시를 걷게 하며 큰 목소리로 저주를 내린 다음 내쫓았다." 그런데 이 대목은 오역이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세르비우스가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에 붙인 주석의 내용' 속에 '마르세유의 희생양 관습'에 관한 페트로니우스의 기록이 간접 인용되어 있다는 뜻이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번역/윤문을 하다 보니 영 엉뚱한 내용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나귀님은 이런 내용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알기는 뭘 알아!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구글링해 보니 딱 뜨더구만! 이처럼 검색 한 번만 하면 해결될 내용을 그냥 어물쩍 하고 넘어가버렸다는 점에서 정성 부족이라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항목에서도 이런 식으로 오역으로 뒤죽박죽된 내용이 드러나는데, 굳이 아르바이트 할 이유는 없으니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겠다.
이런 문제가 계속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괴물이나 요괴나 오컬트나 하는 구체적인 주제에 대해서 관심은 있다지만, 고전이나 종교 같은 더 커다란 주제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에 불균형이 빚어지는 것이다. 장르의 공식에만 충실하다면 홈스를 몰라도 미스터리를 쓸 수 있고, 톨킨을 몰라도 판타지를 쓸 수 있고, 아시모프를 몰라도 SF를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확성이 생명인 참고도서류, 특히 사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배경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은 단점일 수밖에 없다.
무려 권당 2만 2천 원이나 되는 책을, 그것도 크라우드펀딩으로 예약까지 해 가면서 구입한 열혈 장르 독자들이라면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눈탱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 만하지 않을까. 여전히 이놈의 나라에서 장르 독자로 살아가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