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바람에 바깥양반 아침 먹여 내보내고 나서 어젯밤 주문하려다가 못한 중고매장 만화책 더하기 역사책이 생각나서 (달랑 두 권인데 2만 5천 원이어서 배송료가 면제되니 좋은 일인가, 아니면 한심한 일인가) 알라딘에 접속해 혹시 그 사이에 더 올라온 물건이 있나 기웃거리다 보니 "캘빈과 홉스" 박스세트가 벌써 중고로 나와 있다.
잠시 고민했다. 신간이라 중고 할인율도 높지 않은데 굳이 지금 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이전에 원서로 몇 권 갖고 있다가 결국 다 처분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새삼스레 다시 읽어볼 필요도 없는 것 같고, 여친과 베이비시터를 겨냥한 주인공의 작중 행동을 보면 요즘 기준으로는 딱 여혐에 한남충에 개초딩 소리를 들을 것도 같고...
그래도 결국 주문 버튼을 누르게 된 까닭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그중 한 장면 때문이다. 하루는 캘빈 가족이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집에 도둑이 들어서 쑥대밭이 되어 있다. 아들 앞에서는 비교적 침착했던 부모였지만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서는 자기네가 당한 끔찍한 일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몸서리친다.
이 대목에서 캘빈의 아버지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내뱉는 독백이 있다.(지금 구글링해 보니 이 장면의 스캔본이 여럿 나오는 것으로 보아 나 못지않게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이 제법 많았던 듯하다). 자기가 어렸을 때에는 어른이 만사를 다 알고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꼭 그렇지도 않더라는 거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절대권력에 무소불위인 것처럼 보이는 어른들이지만 실상은 그들 역시 수많은 한계 앞에서 매일같이 좌절하게 마련이니, 가장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이고 (다른 무엇보다)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막상 정체도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가정이 약탈당했다는 사실 앞에서의 무기력과 자괴감을 토로하는 대목인 셈이다.
어린 시절에 읽었다면 느낌이 또 달랐겠지만, 이미 원서를 구입해서 읽었을 당시에는 "벼르고 벼르다 다 자랐소"인 상황이어서인지, 캘빈의 갖가지 몽상이며 개초딩 짓보다도 오히려 어머니의 곤경과 아버지의 자괴감 쪽에 더 마음이 쓰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흔히 말하듯 둘리보다 고길동이 더 불쌍해 보이면 이미 어른이 된 것이라니까.
여하간 거의 20여 년 만에 다시 (이번에는 번역서로) 읽게 되는 셈이니, 과연 이번에는 해당 장면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피너츠>를 완전판으로 처음부터 읽으면서 놀랐던 최근의 또 다른 경험처럼 (찰리 브라운이 이렇게 왕따를 당했을 줄이야!) 이전에는 놓쳐 버렸던 또 다른 행간의 의미라도 발견하게 되려나...
[*] 그나저나 책소개/보도자료에서 원서 출판사를 "유니버설 맥밀"이라고 잘못 적었던데, "앤드류스 맥밀 유니버설"(Andrews McMeel Universal)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파 사이드, 캘빈과 홉스, 딜버트 같은 만화 시리즈는 물론이고 <블루 데이 북>처럼 비교적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많이 펴내는 출판사로 기억한다.(그나저나 딜버트 작가도 최근 들어 구설수에 휘말리며 단숨에 나락으로 가버린 모양이다. 딜버트 애니메이션 가운데 하나인 "끼"(the Knack)를 지금도 가끔 한 번씩 찾아보곤 하는데, 특유의 냉소적 풍자를 마음에 들어 했던 독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이래저래 씁쓸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