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펜하이머 덕분에 필립 할스먼의 <점프!>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 뒤적이면서 가장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사진은 바로 배우 탤룰라 뱅크헤드의 사진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이 책에 수록된 거의 모든 (왜냐하면 끝내 점프 포즈를 거절한 밴 클라이번 같은 사람도 있었으니까) 모델과 마찬가지로 힘차게 위로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 밑에 달린 사진가의 캡션처럼 "탤룰라 뱅크헤드의 발은 땅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다."(127쪽) 즉 이 배우는 오른손에 담배를 쥔 상태에서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잔뜩 위로 솟구친 시늉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자리에 서서 한 발만 들고 고개를 치켜드는 등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점프를 소재로 하는 사진집에서 유일하게 "가짜" 점프를 해낸 사람이니, 그것도 사진가의 말마따나 "탁월한 여배우가 꾸며낸" "탁월한 몸짓과 표현력"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사진가도 그런 이유에서 굳이 이런 점프 아닌 점프를 이 사진집에 수록했을 터이다. 이쯤 되면 이 여배우의 성격 자체가 평소에 장난을 좋아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자연스레 떠오르는데, 대표작인 히치콕의 영화 <구명 보트> 촬영 당시에는 아예 노팬티로 촬영장에 나와서 제작진을 당황시켰다는 일화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이건 히치콕 전기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매번 사다리에 오를 때마다 밑에 남자 스탭들이 우글거렸다나).
그런데 탤룰라 뱅크헤드라는 여배우나 히치콕의 영화까지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탈룰라"라는 이름만큼은 아마 대부분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건 최근 들어 유행한 인터넷 밈 때문인데, 자메이카 봅슬레이 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쿨러닝>의 한 장면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즉 경험도 전무하고 장비도 부실한 봅슬레이 팀이 본격 출범하면서 자기네 썰매에 무슨 이름을 붙여 줄지를 논의하는 대목에서, 그중 한 명이 "탈룰라 어때요?" 하고 제안하자 나머지 모두가 비웃다 못해서 "무슨 창녀 이름이냐" 하고 핀잔을 주는데, 곧이어 제안자가 "우리 엄마 이름인데..." 하고 덧붙이자 180도 태세 전환에 나서서 좋은 이름이라 둘러대는 것이다.
이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지금은 "탈룰라"라고 하면 말실수, 또는 패드립의 대명사가 되었다니 희한한 일이다. 물론 나야 <쿨러닝>보다는 <구명 보트>를 먼저 알았고, 그보다 더 먼저 탤룰라 뱅크헤드라는 배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도 종종 "탈룰라" 어쩌구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패드립보다는 오히려 노팬티가 먼저 생각나지만 말이다. 물론 이제는 할스먼의 사진집에 나온 가짜 점프 사진을 다시 보게 되었으니, 앞으로 한동안은 노팬티 다음으로 가짜 점프 사진이 생각날 수도 있겠다.(여기서 문득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물려받은 아주머니 동명이인의 노팬티 스캔들도 생각난다).
[*] 책에도 나오지만 할스먼이 이 연작 사진을 찍게 된 계기가 "흠좀무" 하다. 자동차 재벌 포드 가족의 단체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심심풀이로 대뜸 에셀 포드(헨리 포드의 아들)의 부인에게 점프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해서 사진을 찍었더니만, 그걸 지켜보던 포드 2세(헨리 포드의 손자)의 부인이 "갑툭튀" 하더니만 자기도 점프 포즈로 찍어 달라고 자청해서 촬영을 했고, 그러고 나서는 문득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는 곳마다 유명인사를 상대로 점프 포즈를 요청해서 결국 유명한 사진집까지 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식으로 바꿔보자면 정주영 며느리와 손주며느리에게 점프를 시켰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홍라희한테 점프를 시켰더니 임세령까지 덩달아 점프를 자원했다고 해야 할까, 이런 것을 탈억제라고 하는지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흥미로운 일화인 것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