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나, 만화 좋아하는 양반과 통화하다가 요즘에는 북펀드인지 클라우드펀딩인지로 만들어서 서점 유통 없이 사전 예약자만 나눠 가지고 사라지는 책이 많은 모양이라고 이야기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책이 얼마 전에 그런 방식으로 출간되었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다. 부랴부랴 검색해 보았더니 클라우드펀딩으로 만든 책이기는 한데 다행히 일반 서점에서도 유통되는 모양이라서 알라딘에서도 검색되었고, 나중에 우연히 우주점에 중고가 하나 있어서 구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클라우드펀딩 페이지에서 대략적인 모습을 살펴볼 때부터 하나 의아한 것이 있었는데, 저 유명한 "나사식"을 최종 출간본이 아니라 저자 원고 형태로 실어 놓았더라는 점이었다. 당연히 식자며 수정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영 감상에는 어울리지 않은 상태여서, 도대체 왜 굳이 책을 낸다면서 이런 식의 영인본을 냈을까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한 독자들이 많았는지, 이 책을 실제로 구입한 사람들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한 게시글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막상 책을 구입해서 뒤적여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간의 반응들이 오해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책은 "작품집"이 아니라 "연구서"라는 것이었다. 물론 쓰게 요시하루의 대표작을 네 편이나 수록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작가의 만화를 연구한 본문에 덧붙인 부록에 불과했을 뿐이다. 원제인 <쓰게 요시하루: 꿈과 여행의 세계>를 직역하는 대신 <나사와 검은 물: 쓰게 요시하루 만화집, 작가 연구>라고 제목을 바꾸는 바람에 이런 오해가 생겨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작품집" 아닌 "연구서"라고 생각하면 부록으로 실린 만화가 간행본 버전이 아니라 원고 버전인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애초부터 감상 목적이 아니라 연구 목적이니만큼, 저자가 "XX 해파리"라고 적은 것을 편집자가 "메메(メメ) 해파리"로 오독하게 된 사례처럼 원고가 가공을 거쳐서 최종 간행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자는 뜻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즉 <어린 왕자 백과사전>이나 <빨강머리 앤 이미지북>이나 <가장 완전하게 만든 무민>처럼 작품이 아니라 레퍼런스북인 셈이다.
물론 독자의 입장에서는 속이 쓰린 일이지만, 그간의 여러 차례 교섭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완강하게 자기 작품의 한국어판 발간을 거부하고 있다니, 정식 작품집이 아니라 연구서를 통해서 원고 형태로나마 일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일 것이다. 이쯤 되면 <새만화책> 2권에 수록된 "나사식" 우리말 번역본의 간행 사실이 오히려 의아하고 놀라울 뿐인데, 그 책에도 쓰게 요시하루의 작품에 대한 연구 논문이 두 편이나 수록되어 있으니, 이번에 나온 책과 함께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 그나저나 <새만화책>은 예전에 알라딘 중고샵에서 흔히 볼 수 있었는데 (나도 그렇게 해서 샀으니까) 지금은 완전히 씨가 마른 모양이다. 제1집부터 제6집까지인가 나오고 폐간되었는데, 중간에 살짝 판형을 크게 해서 만든 대역본 특별판도 하나 있었다고 알고 있다.(책장에서 다시 꺼내기 귀찮아서 정확히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정기 간행물인 <새만화책>에 연재한 국내외 작가의 작품을 나중에 단행본으로 재간행한 경우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푸른 끝에 서다>와 (출판사가 바뀌기는 했지만) <앨런의 전쟁>이 그렇다고 알고 있다. 다만 <형무소 안에서>처럼 연재 중에 폐간이 되면서 더는 찾아볼 수 없는 작품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나사식"을 살펴보느라 다시 꺼내 놓은 제2집을 뒤적이다 보니 의외로 <골리앗>의 저자 톰 골드의 "왕국의 파수병들"이 나온다. 허허. 이건 톰 골드의 다른 작품집에도 아직 실리지 않은 것 같으니...<새만화책>의 뛰어난 선구안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아울러 에디시옹장물랭 화이팅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