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의 조국 사태에서 그 딸내미의 논문 제1저자 자격을 놓고 열띤 논쟁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어쩐지 과학의 역사상 가장 불운한 논문 제1저자가 아닐까 싶은 물리학자 랠프 앨퍼의 일화가 떠올라서 사이먼 싱의 <빅뱅>을 간만에 다시 꺼내 보았다. 이전에 만화 <코스믹코믹>을 읽다가 그 주인공인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아노 펜지아스와 로버트 윌슨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읽었던 책이었는데, 이번에는 기껏 중요한 논문을 애써 써놓고도 공저자 겸 지도 교수의 무리한 "개그 욕심" 때문에 사실상 경력을 망치고 말았던 불운한 인물 랠프 앨퍼의 우여곡절에 집중해 본 셈이었다.
앨퍼의 대학원 지도 교수는 저 유명한 톰킨스 씨... 아니, 조지 가모브였는데, 하루는 이 교수가 "빅뱅" 우주론에 관련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는 자기보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제자에게 그 주제와 방법론 모두를 전수하며 공동 논문을 써 보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앨퍼가 복잡한 계산을 도맡은 끝에 논문을 완성해서 가져가자 가모브는 한 가지 엉뚱한 제안을 한다. 이 논문에는 기여한 바가 전혀 없는 동료 물리학자 한스 베테를 공저자로 넣자는 것이었다. 왜? 그래야만 저자명이 "앨퍼-베테-가모브", 즉 그리스어의 처음 세 글자 "알파-베타-감마"와 딱 맞아 떨어져서 재미있다는 거였다.
앨퍼는 당연히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가모브는 제자의 반발을 가뿐히 무시하고 베테의 이름까지 넣은 논문을 (하필이면) 1948년 4월 1일 만우절에 학술지에 발표한다. 이 논문은 훗날 가모브의 바람대로 "알파-베타-감마 논문"으로 지칭되며 "빅뱅" 우주론에 일획을 그은 연구로 칭송되지만, 정작 일개 대학원생이었던 제1저자 앨퍼는 이미 유명 인사인 베테와 가모브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앨퍼와 가모브는 로버트 허먼과 함께 "빅뱅"의 우주배경복사를 예측한 논문도 간행했지만, 이미 개그 트리오로 각인된 까닭인지 주위의 반응은 그저 냉랭할 뿐이었다.
중요한 논문을 두 가지나 간행했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앨퍼는 결국 학계를 떠나 일반 기업체의 연구원이 되었는데, 엉뚱하게도 그로부터 십수 년 뒤에 벨 연구소에서 일하던 연구원 펜지아스와 윌슨이 (앞서 앨퍼가 예측한) 우주배경복사를 (즉 "빅뱅의 화석"을) 발견한 공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는 다른 선행 연구와는 완전 별개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심지어 윌슨은 정작 본인이 입증에 기여한 "빅뱅" 이론의 반대자인 호일의 정상우주론을 지지했었다니, 그의 발견은 정말 우연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이번에도 앨퍼는 제대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말았다.
<코스믹코믹>에는 앨퍼와 허먼이 "신용(credit)"을 얻으려고 애를 썼다고 오역된 부분이 있는데, 사실은 자기네 선행 연구와의 관련성을 인정해 달라고 펜지아스와 윌슨에게 요청했다는 뜻이다.(영화의 "엔딩 크레디트"(ending credit)에 기여자를 명시하는 것과도 유사하달까).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 존 내시도 대학원생 시절 간행한 연구로 거의 반세기가 다 지나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으니, 만약 펜지아스와 윌슨이 선행 연구를 인정했다면 앨퍼와 허먼과 가모브에게도 뒤늦게나마 큰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펜지아스와 윌슨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앨런 라이트먼의 <과학의 천재들>은 플랑크, 아인슈타인, 러더퍼드, 보어, 하이젠베르크, 플레밍, 왓슨과 크릭 등이 발표한 역사적인 과학 논문 22편을 수록한 놀라운 자료집인데 (차라리 "과학사의 위대한 논문 22편"이라고 제목을 지었어야지!) 여기 수록된 펜지아스와 윌슨의 우주배경복사 논문은 A4 용지 한 장도 차마 못 채울 만큼 짧다. 그리고 일종의 보론으로 펜지아스와 윌슨의 발견이 중요한 이유를 설명한 로버트 디키 등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디키로 말하자면 두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우주배경복사를 예측하고 실측에 나서려다 간발의 차이로 선수를 빼앗긴 "또 다른 앨퍼"였다.
"진짜" 앨퍼로 말하자면 정말 죽기 직전까지도 가모브의 "개그 욕심"을 비난했으며, 이후 펜지아스와 윌슨에게 받은 푸대접에 대해서도 두고두고 이를 갈았다고 전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인 가모브로 말하자면 리처드 파인만 저리가라 할 정도로 유머 감각이 넘치는 인물인데 (그의 자서전을 보면 정말 황당한 일화가 가득하다. 아울러 그가 저술한 과학 교양서에도 특유의 유머 감각이 번뜩이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 기억한다) 나름대로는 재치를 발휘한다고 했던 행동이 결국 전도유망한 젊은 물리학자의 앞길을 막아 버린 셈이었으니, 참으로 "아재 개그"의 해악은 동서고금이 따로 없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번의 조국 사태에서 논문 제1저자 문제에 대해서도 담당 교수의 "개그 욕심"이 원인이 아닐까 싶어서, 조만간 당사자의 양심 선언이 (즉 "죄송합니다. 고등학생이 제1저자라면 굉장히 웃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별로였나 보네요..." 정도로)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 무척 아쉬운 일이다. 그냥 "아재 개그"였다고 인정했다면 "알파-베타-감마 논문"의 선례도 있으니 무리한 개그 욕심이 빚은 해프닝으로 끝났을 법한데, 어째서인지 그닥 설득력 없는 변명이 또 다른 변명을 낳는 식으로 이어지다 급기야 "빅뱅"으로 번지고 말았으니 참으로 기묘한 일이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