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쨌든, 재미가 없다면-_-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아무리 소재가 좋고 캐릭터가 매력적이며 구성이 탄탄하다고 해도 재미가 없으면 그것은 일단 소설로는 실격이다. ...그러니까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실격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디자인이 예쁘다해도 이 책은 별로 내 책장에 꽂아두고 싶지 않다.

..이런 식으로 폄하하는 이유는 정말 무진장 기대를 갖고 보았기 때문이다. 체스에 흥미를 갖고 있는 편이고 열린책들의 책선정에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과대한 광고문구에도 믿음을 가지고 구입했다. 결과는 참담. 정말이지 취향이 아니었다. 작가의 지적인 능력에 찬탄을 표하게 하는 책이라고? 혼자서 지식을 싸안고 있으면 뭐하는가. 그것을 재치있게 독자에게 풀어내는 능력이 부족한데.. 진정한 재능은 그런게 아니다.

그렇다고 재미만 빼고 다른 요소가 모두 완벽한것도 아니다. 소재는 좋았다. 그래, 소재만은 좋았다. 체스와 병행되는 살인사건. 독자의 흥미를 끌만한 광고문구를 쓸수 있겠군. 그렇지만 차라리 광고문구가 더 재밌었다-_-; 전체적인 구성은 긴장감이 부족해 질질 끄는 느낌이 들었고 특출난 캐릭터도 보이지 않는다. 그 여주인공-훌리아는 완벽한 여성으로서 글속에서 묘사되는데 그에 걸맞는 행동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사실 그 완벽하다고 단정하는 묘사에서 일단 틀려버린거지. (전혀 와닿지 않았소.) 다른 캐릭터들도 시들시들한 인상이 강하다. 글을 이끌어가는 캐릭터들의 파워가 약하니 글 전체에 박력이 없다. 박력이 없는 글은 흥미롭지 못한게 당연.

책을 빨리 읽는 편이지만 이 책은 느릿느릿 괴로워하며 읽었다. 차라리 엄청나게 난해하고 매니악한 책이라면 점수를 더 줬겠다. 대중성을 노리고 쓴게 확연히 보이니 휴우..., 그냥 별 하나.

뒤마 클럽 역시 광고문구는 백년동안 책을 안읽던 사람이라도 한번 읽어 보고싶게 만들도록 썼군. 이 작가의 책은 한 십년 후에 에 신간이 나오면 그때 보련다. 그때는 더 요령있는 글을 기대한다.

명작은 명작

유리가면 1 - 애장판
스즈에 미우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2년 6월

500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을 묶어 유리가면이 재발행되었다. 애장판이라는 이름을 달고.(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예전의 문고판이 더 마음에 드는 바이다. 대체 완결도 나지 않은 책을 애장판으로 발행하는건 왜?;)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디선가 한번쯤 이름은 들어봤을 이 만화는, 소설로도 발행된적 있었고 연극으로 실제 공연된적도 있었다. 1권의 발행년도가 70년대임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오랜 기간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것, 거의 경이로울 정도다. 하지만 내용을 한번만 읽어본다면 왜 사람들이 명작이라 칭송하는지, 작가의 게으름에도 왜 팬들이 떠나지 않고 꾸준히 기다리고 있는지 고개를 끄떡일 수 있을것이다. 또한 유리가면의 수많은 팬중 한명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한 소녀의 연기인생, 연극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휘몰아쳐가는 전개에 눈을 뗄수 없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마야라는 이름의 평범한 소녀가 어떤식으로 연기에 빠져서 정상에 올라가는지 그 행적을 좇아가며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마야와 완전히 감정이입된다. 마야가 되어 웃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동안 유리가면은 온전히 독자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독자를 몰입시키는 자체만으로 이 작품은 명작으로 박수를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세상에는 그런 작품 -독자의 감정을 휘두를 수 있는- 이 드물기 때문이다.

완결을 보았으면 좋겠는 작품이지만 왠지 보고 싶지 않기도 한, 오래오래 더 보았으면 좋겠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단편에서 더 빛나는 감성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2년 11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을 많이 접해봤지만 (사실, 이 작가만큼 우리나라에서 좋아해주는 외국 작가도 드물듯 하다. 관련 웹사이트도 수백개에 달하므로) 이 책은 그의 여러 소설들중 가장 빛나는 단편들만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랑받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일상속에서 특별한 빛깔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일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 색깔이 다른 유리를 통해 비추는 느낌이랄까.

이 책 속의 하루키의 단편들은 그런 특별한 감성의 정점에 놓인 것들만 추려놓은 것이다. 격렬하지않은, 오히려 나른할 정도의 -사건, 장면들은 그의 절묘한 조합으로 인해 특별해지고 격렬해진다. 그 날카로운 재능의 빛남을 한번에 맛볼수 있는 단편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만을 읽어왔던 사람들이면 꼭 읽어보길 권한다. 장편과는 전혀 새로운 맛임을 보장하니.

(추천메뉴: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 개똥벌레, 코끼리의 소멸)

우울한 날에의 간단한 처방약

The Blue Day Book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은 있다 ㅣ 블루 데이 북 The Blue Day Book 시리즈
브래들리 트레버 그리브 지음, 신현림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월

동물 사진집이다, 하지만 단순한 동물 사진집은 아니다. 인간의 시선에 맞춰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루데이북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쓴 글 (사실 그 내용은 별거 없다. 요약해볼까? -힘들고 괴로워도 희망을 잃지말고 사랑으로 해결점을 찾아 행복해지자, 이게 한권 내용의 전부.)에 사진을 곁들인 책이다. 그렇지만 그 평범한 한문장 한문장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너무나 절묘해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짓게 하는 -그래서 우울증에 다소 효과가 있는, 다시 말해 읽고난후 블루데이북이라고 이름붙여진 이유를 이해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동물 사진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그 호응의 반의 반도 얻기 어려웠으리라. 깜찍한 표정들의, 의도되지 않았다는듯 능청스런 동물들의 모습을 보다보면 확실히 약한 우울증에는 효과가 있으리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 약효는 생각보다 짧으며 한번 복용후에는 다시 그만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주의하시길.

불면증을 통해 담는 사랑

불면증 2 - 완결
박은아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6월

'다정다감'이라는, 그야말로 다정다감한 제목의 만화가 처음 접한 박은아의 작품이었다. 동글반짝거리는 그림체와 밋밋하지만 깔끔한 스토리, 개성있는 캐릭터 -그냥 괜찮게 그리는 작가구나 생각했던 것이 전부였는데.

....불면증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 상당한 감각을 가진 작가였구나. 이런 식의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는 작가구나 -하고 말이다. 사실 이 만화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이복 남매간의 사랑이다. 어쩔수 없는 이끌림, 저항하다 서로의 마음을 통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은 파국.

어떻게 보면 굉장히 전형적인 스토리 라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감정을 증폭시키고 이미지화시키기 위해 잡은 주변 소재들이 너무나도 제 역할을 잘 하고 있기 때문.(-불면증이라든지 열대야같은 것으로 주인공의 절박함 애틋함의 심리를 대변하게 하는 것은 탁월했다.)

그러나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1권에 비해 2권은 조금 흐트러지는 것이 사실이다. 남자아이의 죽음이라는 결말을 택함으로써 글 안에 녹아있던 모처럼의 현실감은 그대로 사라져버린다.(죽음은 그 일상에서 너무나 괴리되어 있다..) 그와 함께 독자는 감정이입하기가 어려워지며 그저 방관하는 입장에서 드라마보듯 지켜보게 되버리는 것이다. 전개가 빨라지는 2권에서 오히려 긴장감이 느슨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차라리 마음을 통하지 못한채 평생 지속되는 불면증이라면, 독자는 가슴이 괴로워도 그만큼 이입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역시 잘된 작품임은 틀림없다. 박은아는 잔잔한 색깔을 지닌 스타일리스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