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탐식가들
김정호 지음 / 따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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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님도 신하들과 회식을 했을까요? 정답은 "yes!"입니다. 예를 들어 정조는 규장각이나 승정원, 홍문관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관들을 불러서 화로안에 숯을 피우고 석쇠구이를 둘러않아먹었다네요. 이를 '난로회'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대부들에게 유행처럼 퍼져서 요즘의 삼겹살데이처럼 10월 초하루저녁에 지인들과 모여 난로회를 즐기는 모습이 여기저기 포착되었는대요. 바로바로 아래 사진처럼 말이죠^^

    

문제는 그 당시가 ‘우금령(牛禁令)’을 내렸을 때란 거죠. 지금처럼 소돌림병이 돌아서 먹기는커녕 농사에 쓸 소가 씨가 말라서 소 2마리가 할 일을 장성 9명이 해야했습니다. 심지어 세종은 소 도살 현장을 신고하라고 ‘소파라치’제도까지 시행했었죠.

 

그렇다면 조선시대 최초의 음식블로거는 누군지 아세요? 두구두구두구 두둥! 바로 홍길동전을 쓴 허균입니다. 허균은 다양한 음식을 먹길 좋아했을 뿐 만 아니라 반드시 글로 음식리뷰를 남긴 조선의 모범 식객블로거였습니다. 귀양을 가면서까지 맛있는 음식이 나는 지방으로 보내달라고 로비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어떻게 알아냈냐고요? 이 책<조선의 탐식가들>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정보랍니다. 그리고 조선은 참으로 맛과 멋이 있는 시절이구나 느낍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성리학, 특히 사람과 마음과 심성을 중요시해서 그런지 제아무리 시골 구석의 이름없는 선비라도 상소를 통해 조정에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 관철시킬 수 있었더군요. 특히 부패한 관리들에 대해서 이야기할때에는 그들의 호의호식과 탐식에 대해 필수적으로 까발리고 시작하는 게 흥미있었다고 할까요? 이 책은 조선시대 부자들 사이에 유행했던 음식을 말하고 있지만 저에게는 왕이 관리들과 팽팽하게 긴장하고, 관리들은 선비들과 싸우고, 제아무리 유능한 군주라도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독단을 행한다면 결코 오래도록 자리를 누릴 수 없고, 좌천되고, 다시 재기하고, 그런 일련의 과정이 흥미로웠어요. 천재가 아닌 남의 말을 들을 줄 알고 품성이 바는 사람을 조선은 더 사랑했다는 느낌이 든달까요?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그래서 탄력적이고 소박하면서 정묘하고 달보드레하다가도 치열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깨달은 게 확실히 탐식가들은 자신의 욕망에 너그럽더군요.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대부 탐식가들은 대부분이 "탐욕가"입니다. 다같이 못먹던 시절에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혀를 즐겁게 하는 사대부 탐식가들을 보고있자면 여기에 이름 올리기도 아깝습니다.

 

이 책이 선비들이 남긴 문헌에서만 자료를 찾고 고증할 수 없다보니, 아쉬운 점이 있는데 사대부들의 고급음식에만  치중되어 서민들이 사랑하고 유행하던 음식이 전무하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우심적(소염통구이), 순챗국과 농어회, 연포탕(두부국), 열구자탕(신선로),승기악탕(스키야키)를 중심으로 지금도 귀한 음식들이지요.  고급관리들이 고급음식을 먹으면서 자화자찬의 시를 읊는 모습을 상상해보건데 입맛이 씁니다.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었던 것은 진나라 장한과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에 대한 재발견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저자, 김정호가 어려운 고어와 한문사이사이로 '오버','안티'등 시쳇말로 현대어를 사용하여 21세기와 조선을 넘다드는 감칠맛나는 글솜씨가 더욱 책속에 쉽게 빠져들 수 있던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또 이 책<조선의 참식가들>을 읽는 내내 입에 침이 고이게 만든 소중한 소득이라면 '순채'입니다. 밭에서는 인삼, 산에선 버섯, 물에선 순채! 일제시대에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어 어느덧 우리나라에서는 자취를 감춘 이 채소는 멸종위기의 식물이라네요. 그래도 인터넷으로 뒤져보니 순채 한정식을 파는 곳이 저멀리 제천에 있더군요. 개나리가 나풀거리기 전에 꼬옥 가서 순채맛을 보고 와야겠다고 주먹 불끈! 그날 순채무침과 순챗국을 먹으면서 저도 장한과 이규보의 시한 수 읊조려보렵니다,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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