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여행길에 지나다가 '와이오밍'이라는 미국 서부도시에 흠뻑 매료되어 캐나다에서 아예 이 곳으로 이주해왔죠. 그녀는 어느 날, 술집에서 농장 일꾼처럼 보이는 누추한 중년남자가 포켓볼을 치며 술마시는 조카뻘  청년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걸 발견합니다. 그것은 처연한 그리움이 배여있는 모종의 애틋하고 특별한 시선이었죠. 그리고 문득, '이런 보수적인 작은 동네에서 저 남자가 동성애 성향을 가졌다면  젊은 시절을 어떻게 감당해 냈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여자가 바로 이 책 <브로크백 마운틴>의 작가, 애니 프루(Proulx, E. Annie)입니다. 그녀는 보통 장편소설을 쓰는 기간의 2배를 들여서 이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무려 60번이나 넘게 퇴고하면서 말이죠. 게다가 이것은 30쪽정도의 분량밖에 되지 않는 단편소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도톰한 책<브로크백 마운틴>안에  거친 카우보이들이 주먹질 끝에 벌이는 사랑이야기는 단지 1/11의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헷갈린다고요? 그러니까 이 책<브로크백 마운틴>은 이안감독의 게이영화를 장편소설화한 게 아니고 애니 프루가 쓴 11편의 단편소설들이 모두 들어있는 모음집이란 말이죠.

 

<브로크백 마운틴>은 아마도 마케팅차원에서 정해진 제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카우보이 게이 커플영화가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아 돌풍을 일으키자 그 걸로 제목을 콕 집어서 정한 모양인데, 차라리 <애니프루 단편 작품집>이나 <벌거숭이 소>로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럼 영화부터 보고 감동받아서 이 책을 고른 독자들에게 그렇게 욕을 먹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역시 이 책 <브로크백 마운틴>의 원제는 '와이오밍 스토리(Close Range: Wyoming Stories)'였거든요. 하여간 아쉬운 마음은 접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겨봅니다.

 

제가 이 책을 다 읽었을때 떠오른 것은 '게이의 비극적 사랑'이 아니라 와이오밍이란 거친 '공간'과 애니 프루의 심장이 멎을 듯한 '문체', 그리고 결국 '사람'입니다. 쉽게 말해서 저는 애니 프루에게 완전히 KO패를 당했죠. 이 서평을 쓰는 동안에도 저는 그녀의 장편소설인 <쉬핑뉴스>를 옆에 두고 있습니다. 김장김치 담그는 엄마옆에 쪼그려앉아 한 입 얻어먹고싶어 침꼴깍거리는 꼬맹이같은 심정으로 빨리 읽고싶어 조바심을 내고 있는 형국이랄까요.

 

공간 : 와이오밍을 위한 파사칼리아 변주곡

 

이 책<브로크백 마운틴>은 모두 와이오밍이라는 거칠고 투박한 도시를 배경으로 합니다. 와이오밍이 어떤 곳이냐구요? 말보로와 서부영화,컨츄리음악을 싫어하는 저와 대척점을 이루는 지역이지요. 목장,로데오,카우보이가 있는 곳으로써 미국 서부영화에서 쇄락해가는 전형적인 마을을 떠올리면 됩니다. 하지만 와이오밍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저를 매혹시킬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디언이 살았던 동네이고, UFO의 단골 출몰지이며, 인구는 50만이 안되지만 땅은 엄청 넓고 평균 고도가 2천미터로 지리산정상보다도 더 높은 곳에 위치합니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이 곳을 여행하다보면 사실 완전한 도시라고 하기도 그렇고 완전히 시골이라고 하기도 모호한 근대화의 경계도시란 거죠. 비단 이 뿐만 아니라 와이오밍 주는 미국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인정한 곳이면서, 이 책<브로크백 마운틴>이 출판된 다음해에, 어떤 대학생이 게이란 이유로 울타리에 묶인 채 호모포비아들에게 무참하게 맞아 죽은 곳이기도 합니다. 여행객들에게는 아메리카 개척자 정신의 아이콘인 존 웨인이 떠오르는 곳이면서 한편으론 독신남 자살율이 미국에서1등인 곳이기도 하고요.

 





 

그뿐인가요? 머릿속에 낭만적으로  알고있던 여유있는 전원생활은 이 책 어디에도 볼 수 없습니다. 그 광활한 목초지와 하늘은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나올 법 하지만 눈폭풍과 한파,숨막히는 더위와 호우, 메뚜기떼와 가뭄까지 펼쳐지는 자연재해 퍼레이드는 가축과 사람의 삶까지 송두리째 집어 삼킵니다. 그당시 와이오밍은 목축업과 광산업만 살짝 번성했다가 망했기 때문에 이 소설속의 등장인물은 모두 목장에서 양을 치거나 카우보이가 되거나  그다지 할 일이 없습니다. 가난한 농장의 자식들은 교육과 교양 대신 단순한 성품과 편협한 편견에 사로잡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고집이 세고, 쉽게 잔혹해질 정도로 어리석죠. 서부를 누볐던 카우보이의 후예들은 어느새 일자리도 없는 동네에서 자신들의 소망은 저 냉담한 대지 밑바닥으로 구겨 놓고 힘겹게 삶을 이어갑니다. 자원은 점점 고갈되고 사람은 별로 없고 고독은 일상이 됩니다. 제가 이렇게 와이오밍에 대해 날씨와 산업, 역사와 지리, 문화까지 설명하는 이유는 이 책속에서 헐떡이는 주인공들은 이런 프레임안에서 통제하거나 탈출할 수도 없이 버거운 자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근거로는 애니 프루는 지리학을 오랫동안 공부했고 소설 배경이 되는 시대를 세밀하게 알기위해 그 당시의 사망신고서, 영수증, 계약서,유언장,영수증까지 수집하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녀는 지질학적인 공간과 역사적 사실을 리얼리티로 구축해 놓은 다음 그속에 실화나 전해내려놓은 설화속 주인공을 초대하여 생활에서 건져 올린 여러 고유명사로 삶의 틈사이사이까지 관통하여 이 단편들을 썼지요.

 

그래서 이 책속에서 고달픈 주인공들만 나온다고 짜증내지 마시고 리얼리티가 강하구나 하고 느끼시면 더욱 몰입이 쉬워집니다.   


문체 :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총같은 완벽한 힘


 

책의 첫장을 넘겨서 첫 문장을 읽었을때 저는 놀랐습니다. 아마 3번정도 반복해서 또 읽고 또 읽고 하다가 옆에 앉아있던 지인에게 "이 사람, 내공이 열두갑자인가봐!'하고 감탄을 했으니까요.  '삶의 실타래가 단단히 감긴 애송이가 울 양복을 입고 샤이엔을 떠나는 기차에 올랐을 때부터 그 실타래가 다 풀려나가 절뚝대는 노인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기나긴 이생 내내 메로는 그가 시작한 곳, 빅 혼 산맥의 남쪽 끄트머리 낯선 땅에 있는 소위 목장이라는 곳에 대한 생각을 끊었었다' 라고 시작하는 <벌거숭이소>의 첫 문장만으로도 이미 저는 기가 죽었달까요. 문장하나, 단어 하나, 심지어는 쉼표 하나까지고 제 위치를 알아서 놓여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 총같은 긴 문장이라 한 단어를 놓치고 나면 다음 문장에서 다시 도돌이표를 해야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번역자에게도 경의를 표하게 되었죠. (그 이물감없는 번역을 해준 조동섭씨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애니 프루는 어떤 인터뷰에서 '적절한 단어 하나를 찾기 위해 몇 주를 보내기도 하며, 퓰리처상을 수상했을 때보다 해결하지 못했던 단어나 문장을 종이 위에 떠나보낼 때 더욱 상 받은 기분'이라고 토로한 이유를 알겠더군요.

 



 



 

애니 프루는 무엇보다도 울퉁불퉁하고 매스껍게 덮여있는 땅의 입자들같은 와이오밍의 하늘과 풍경, 날씨를 표현할 때 백미입니다. 그 묘사는 그저 기후가 아니라 가혹한 인간조건과 주인공 심리에 대한 은유이자 사건에 대한 은밀한 복선이기도 할 정도로 함축되어 있거든요. 비죽비죽 솟은 쪽빛 산봉우리, 끝없는 초원, 퇴락한 도시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잇는 바위, 활활 타오르듯 펼쳐진 하늘, 거친 자연은 우리의 영혼에 전율을 일으킨다. 들을 수는 없고 느낄 수만 있는 깊은 음처럼, 또 뱃속 깊이 박힌 짐승의 발톱처럼 주인공의 참담한 심경을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나부끼는 흰 시트처럼 하늘을 가르던 번는 잭과의 관계를 알아챈 알마의 충격을 대변하는 것처럼 말이죠.

 



 

아름다운 명주천같던 바람은 하늘에서 내려와 대지를 건드렸다. 연깃빛 깃털 같은 눈이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풍아한 샘처럼, 마음이 비뚤어진 눈의 악마처럼, 베일을 쓴 아랍 여자처럼, 유령 기수처럼

그렇게 삶에 대하여 건조한 먼지같은 흐름과 신랄함, 날것의 고통과 사랑을 대변합니다.
 

이 책은 완벽하고도 깊은 문체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반면 저는

출판사의 문체에 대해서는 못내 아쉬운 게 있습니다. 아래 사진을 좀 봐주세요. 







'그릇된 사랑'이라고 박아놓으셨는데 한참을 뚫어져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정말 출판사 입장에서는 와이오밍의 흙먼지만 날리지 사람냄새가 없구나.'하는 느낌이요. 이 책속에서 애니 프루는 흙냄새와 사람냄새, 가축냄새까지 뒤섞어서 시큼하고 뭉근한 느낌을 전해주는데 출판사 입장은 참...

 

무엇이 그릇되고 무엇이 옳은 사랑이란 걸까요? 저자 또한 저처럼 각양각색의 삶을 대할 때 서로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더 넓은 세상에 대해 공감하게 되길 바랬을 것 같은데 말이죠.
 







하여간 이 책 <브로크백 마운틴>은 달콤한 수식어구나 친절한 레시피는 없지만, 삶의 질곡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겐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교과서이자 위안이었던 거 같습니다.

 

삶공간 :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그 무엇!

 

 이 책이 서부를 배경으로 한 단순한 단편소설을 뛰어넘는 점은,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치명적인 삶의 함정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무엇인가, 나아가 자연과 사회구조앞에서 우리의 의지란 무엇인가, 생을 다 바쳐서 무엇을 이룬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등의 의문을 책 전체를 관통하면서 질문하고 있다는 점인거 같습니다.  

 

위험하고도 냉담한 대지, 험준한 로키 산맥 끝자락에서 살아가는 터프한 와이오밍의 카우보이들도 눈보라나 가뭄같은 날씨와 싸워야 하고, 늘 자연의 거대한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죠. 강인한 척하지만 실은 나약한 인간의 초상입니다.아이러니하죠. 이 책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은 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되는 일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자신의 몸 속에 숨어 있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자신의 행동을 자기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채 말이죠. 그 굳건한 대지에 비하면 인간 비극은 하찮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아닐겁니다.


그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아마도 전 '지옥을 연상케하는 유황냄새와 메뚜기 냄새가 풍겨 오는 뜨거운 어느 여름 정오' 같은 건 죽을 때까지 느껴보지 못할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이오밍이건 여기 서울이건, 과거이건 현재이건  '그가 아는 것과 믿으려 했던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라든가 '친구여,어두운 충동에 굴복하기란 생각보다 훨씬 쉽다' 라든가 '그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은 그 순간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어떤 여행이 멈춤을 가능하게 하는가? 어떤 전류가 한 장소는 떠나도록 결심하게 만드는가?' 라는  인간을 사로잡는 질문과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그 무엇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부탁의 말씀!

혹시 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영화를 보고 이 책을 집었다가 이게 모얏! 하고 내팽개치신 분이 있다면 다시 한번 긴 호흡으로 첫번째 단편부터 쭈욱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좀 버겁겠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쭈욱 읽다보면 문장에 익숙해지거든요. 그래서 마지막장까지 읽게 된다면 애니 프루가 차가운 온도를 유지하면서 단편소설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그 울컥하는 장면을 어떻게 훨씬 농밀하게 묘사하여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지 발견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애니 프루의 언어적 상상력과 노력에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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