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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진실은 때때로 범죄에 악용된다.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블로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꾸미기 위해서 다시 거짓말을 했고, 또다시 그 거짓말을 거짓말로 변명을 하다 보니 결국에는 끝없이 거짓말을 하게 되어서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추측건대, 별 볼 일 없는 대학을 졸업해서 조그마한 디자인 회사를 다니며 잡무에 시달리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꾀죄죄죄죄죄죄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화려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는 처음에 별 생각없이 블로그에 서울대 미대를 졸업했다고, 푸념 섞인 낙서처럼 휘갈겼는데 이 거짓말이 결국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최초의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도록 거짓말에, 거짓말에, 거짓말에, 거짓말에, 거짓말을 늘어놓다 보니 판이 커져버렸다.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이십대에 이미 20명 남짓한 직원을 거느린 디자인 회사를 차렸으며, 미술관 큐레이터와 도슨트를 겸하며,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고, 모 아이돌 그룹을 프로듀싱한 프로듀서이자 스스로도 음반을 낸 적이 있는 전직 가수'라고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가구 공예가로도 이름을 떨쳤고, 군에 있을 때에는 아프간 전투에 착출되어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육군 참모총장 표창장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일이 서른을 넘기지 않은 나이에 이룩한 업적이었다. 사람들은 제주도에서 잡히는 8월 은갈치'보다 더 은은한 스펙에 넋이 나가서 그를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박근혜가 100개의 형광등을 켜 놓은 듯한 아우라라면 그 블로거는 형광등 백만 스물 한 개를 켜놓은 아우라였다. 그를 따르는 이웃은 항상 와와, 했다. 간혹 나 같은 삐딱이'가 우우, 하면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몰려와서 에에, 하며 조롱했다. < 우우 > 했던 소수와 < 와와 > 했던 다수와 맞짱을 떴다가는 < 에에 > 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들이 거짓말쟁이 블로거의 화려한 경력을 나이와 비교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간파할 수 있음에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번의 재수 끝에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니 26세요,
여기에 병역은 병장으로 제대했으니 3년 더하면 얼추 29세가 될 터인데, 28세 때 이미 디자인 회사를 설립하고,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고, 연예 기획사를 설립해서 2장의 앨범을 내기까지, 아.... 그리고 여기에 가구 공예가'로 대활약을 펼쳤다는 것을 포함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내가 < 와와 > 무리와 < 에에 > 무리에게 이 사실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했던 말이 바로 " 앞뒤가 맞지 않는 말 " 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 " 이라는 주장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지만 그것이 진실인 경우도 종종 있고 앞뒤가 맞지만 거짓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는 거짓말에 능숙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어설픈 거짓말쟁이에 가까웠다. 히가시나 게이고의 대표작 < 용의자 x의 헌신 > 에서 독자는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설 초반부에 전남편을 죽인 야스코'가 얼마나 마음이 여리고 착한 여자였는가를 자세하게 묘사한다. 그녀는 성정이 고우며,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고, 무서움을 많이 타는 여자'다.
그녀는 필립 말로우 소설에 등장하는 팜므파탈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어어어어무 멀다. 독자는 건들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심장을 가진 그녀가 매의 눈과 개의 코'를 가진 형사들이 쏟아낼 혹독한 과정들( 심문, 뒷조사, 알리바이..... ) 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가에 관심이 쏠린다. 그녀는 과연 허술한 알리바이를 얼마나 치밀하게 은폐시킬 수 있을까 ? 그런데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형사들의 심문뿐만 아니라 거짓말 탐지기가 동원된 거짓말 테스트도 무사히 통과한다. 거짓말로써 형사를 속일 수 있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거짓말 테스트는 어떻게 할 것인가 ? 거짓말 테스트 장치는 거짓말을 감지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증후를 감지하는 것(폴 에크먼, 텔링 라이즈. 71)으로써, 거짓말 시 감지되는 발한, 호흡, 혈압의 변화'를 통해 거짓말 유무를 밝힌다는 측면에서 그녀는 자기 신체마저도 속인 것이 된다.
형사들이 그녀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 앞뒤가 맞지 않는 " 말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은 결국 그녀가 " 앞뒤가 맞는 말 " 로 형사를 설득했다는 것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소설 중간에 히가시노 게이고가 짠 트릭'을 쉽게 간파했다. 간단하다 ! 그녀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진실만을 말했다 라고 가정하면 모든 의문점이 술술 풀린다. 이 소설은 독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 살인자는 반드시 거짓말을 한다 " 는 익숙한 코드를 역이용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범인인 그녀가 형사를 속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면 들통이 나지만 진실을 말하면 형사를 속일 수 있는, 매우 이상한 장치를 고안했다. 그녀가 진실만을 말하니 그녀의 증언은 앞뒤가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재 수학자인 용의자 x는 그녀를 위해 수학 공식 대신 완전 범죄 공식을 만든 것이다.
형사는 거짓말에 능숙한 범인이 내놓는 " 앞뒤가 맞는 말 " 이 사실은 " 앞뒤가 맞지 않는 말 " 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트릭이란 기본적으로 " 앞뒤가 맞지 않는 말 " 을 " 앞뒤가 맞는 말 " 로 둔갑시키는 속임수'이니 말이다. 추리 소설은 뒤죽박죽인 트릭을 질서정연하게 되돌리는 장르'이다. 하지만 독자가 항상 뒤죽박죽인 트릭을 간파하지 못해서 골탕을 먹는 이유는 뒤죽박죽인 트릭'이 매우 정교하게 질서정연한 모습을 갖추고 있기에 독자에게 쉽게 들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매번 속는다. 우리는 흔히 거짓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 보통 사기꾼들은 자신이 하는 말의 앞뒤가 어긋나지 않도록 완벽하게 이야기를 꾸민다. 오히려 정직한 사람들이 조금씩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한다. ( 폴 에크먼, 텔링 라이즈, 063 ) " 가수 이은하가 < 아리송해 > 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져야 한다는 너의 그 말이 아리송 " 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우리는 이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랑을 노래한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곁을 떠나야 하는 이야기'는 이미 익숙한 서사가 아니었던가 ? 논리적 수식으로 보았을 때 이 말은 앞뒤가 맞지 않지만 진실에 가깝다. 이처럼 진실은 깍쟁이처럼 앞뒤가 딱딱 맞기 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아귀가 맞지 않는 구석도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 용의자 x의 헌신 > 은 " 앞뒤가 맞는 말 " 이 거짓말일 수도 있는 말이며, 진실은 때때로 누군가를 속여서 이득을 취하기 위한 도구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진실은 아름답거나 선명할 수도 있으나 동시에 아리송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