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울이 기습적으로 덮치면 모든 일이 심드렁해지면서 책읽기도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찬바람이 아침 저녁으로 살랑거리고 해가 짧아진 탓인지, 여름 끝자락에 봤던 몇 편의 영화 탓인지 요며칠 마음이 산란하여 뭔가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마음을 달래 보려고 서가를 흩어 봐도 딱히 눈에 들어오는 책이 없었다.

가끔 들르는 헌책방 홈페이지에서 일전에 확인해 두었던 책이라면 도움이 될까 싶어 며칠 전 퇴근길에 오랜만에 헌책방에 들렀다. 다행이도 찾는 이가 없었는지 아직 거기 있었다. 그렇게 내게 들어 온 책이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였다. 제목이 자칫 선정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를 통해 '미치기(及)' 위한 '미치기(狂)'를 권하고 있는 책이다.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 강진 유배지에서 만난 정약용과 제자 황상, 아름다운 실내악 연주를 함께 즐겼던 홍대용과 그 벗들 등 저자 정민은 이 책에서 '벽(癖)에 들린'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백이전(伯夷傳)>을 무려 1억1만3천 번이나 읽었다는 김득신이었다.

1억1만3천 번. 헤아리기도, 믿기도 힘든 수치이지만 김득신이 남긴 <독수기(讀數記)>의 기록이니 결코 과장일 수 없다. 당시 '1억은 10만을 가리키니, 실제 그가 읽은 횟수는 11만3천 번'이라 했지만 그렇더라도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수치이다. 게다가 <독수기>에는 이에 버금가는 기록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읽은 횟수를 그렇게 정확히 알고 있었던걸까? 사뭇 궁금했다. 바를 정(正) 자를 썼을까? 아무래도 그렇게 큰 수를 正 자로 기록했다면 그걸 세느라 한 세월 보냈을 것이다. 알고 보니 산문(算文)이라고도 하는 읽은 횟수를 확인하는데 사용했던 서산(書算)이라는 도구가 있었다. 위 아래로 구분해 여러 개의 홈이 보이는데, "아래쪽 열 개의 홈은 한 번 읽을 때마다 하나씩 젖히고, 열 개가 다 젖혀지면 위쪽의 하나를 젖혀 열 번을 표시했다"고 한다.

"부족해도 끊임 없이 노력하면 어느 순간 길이 열린다. 단순무식한 노력 앞에는 배겨날 장사가 없다.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 동안 내용이 골수에 박히고 정신이 자라, 안목과 식견이 툭 터지게 된다. 한 번 터진 식견은 다시 막히는 법이 없다. 한 번 떠진 눈은 다시 감을 수가 없다."

김득신의 이야기에 덧붙인 정민의 해설이다. 김득신은 본디부터 명민했던 인물은 아니고,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떨어지는 둔재였다고 한다. 부족한 사람 눈에 그가 유난히 돋보였을 만하다.

무엇엔가 '미쳤기(狂)' 때문에 어디엔가 '미칠(及)' 수 있었던 옛 사람들의 생활과 태도에 관한 <미쳐야 미친다>를 읽으면서 서서히 우울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우울했던 건 '미치지(狂)' 않고 성급하게 '미치(及)'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