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관찰」: 『계몽의 변증법』, '스케치와 구상들' 중에서


40대에 사람들은 보통 기이한 경험을 한다. 그들은 함께 자라왔고 지금도 접촉을 유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지금까지 그들이 유지해오던 습관이나 의식에 교란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한다. 어떤 사람은 도대체 일을 돌보지 않아 사업을 망치고, 어떤 사람은 부인에게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혼을 하고, 어떤 사람은 돈을 횡령하기도 한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결정적인 사건을 저지르지는 않아도 '분해'의 조짐을 보인다. 그들과의 대화는 피상적이 되고 겉돌거나 쓸데없는 허풍이 된다. 예전에는 나이 든 사람들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이제는 자신만이 대상에 대한 자발적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느낀다.

처음에는 동년배의 이러한 변화를 바람직하지 못한 우연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인다. 바로 다른 사람들이 좋지 않는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변화는 그의 세대나 그 세대가 처한 특수한 외적 운명과 관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이러한 경험이 자신에게도 별로 낯설지 않은 경험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다른 각도, 즉 세대간의 갈등이라는 각도에서 보게 된다. 그도 예전에는 선생님들이나 아주머니, 부모의 친구들, 나중에는 대학의 교수나 직장의 상사에게 문제가 있다고 확신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우스꽝스럽거나 살짝 돈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아니면 그들의 현재 상황이 너무 삭막하거나 거북살스럽거나 실망스러웠다.

그 당시 그는 별 생각 없이 나이 든 사람의 열등함을 자연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제 그는 그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게 된다. 한창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여건 속에서 지적이든 기술적이든 일정한 숙련도를 유지하면서 최소한의 생존을 이끌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치매 현상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인물도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젊은 날의 희망을 배반하고 세계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겪는 때 이른 부패의 형벌처럼 보인다.  

 

 

좋아하는 글. 정말 40대가 되어 읽는 이 글은 어떠할지 궁금하다. 발터 벤야민의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을 읽는 것만큼이나 『계몽의 변증법』 뒤에 실린 '스케치와 구상들'을 읽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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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서울에 갔다오면서 바닥이 거의 드러난 소양강을 보았다. Y자 교각으로 멋드러지게 지은 다리가 무용지물처럼 보였다. 우리는 차창으로 내다보며 모래바닥이 가장 많이 보이는 지점을 가리키며 저쯤에서 시작하면 다리 없이도 강을 건널 수 있겠다고 말했다. 두 면이 통유리로 된 카페 하나도 지나쳤는데, 강에 물이 차 있다면 확실히 전망이 좋은 곳이긴 했다. 그러나 납작 엎드려 얕은 수심이면서도 강은 분명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에는 160을 넘긴 미세먼지 수치를 90 정도로 떨어뜨린 봄비가 내렸다. 봄비가 내리면 미세먼지가 말끔히 씻길 줄 알았는데. 우리는 조금 실망하며 밤산책을 나섰다. 초저녁에는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를 잡고 있는 옆집 내외를 보았다. 그들은 파란색 비닐 봉지에 마치 쓰레기를 주워 담듯 아스팔트 위에 돌처럼 미동 않고 봄비를 맞고 있는 개구리를 집게로 주워 담았다. 들어는보았나. 개구리 수거.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남편은 개구리는 이때 먹는 것이 가장 깨끗하다고 했다. 동면을 하는 동안 개구리가 겨우내 무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위장이 깨끗하다는 거다. 어쨌든 작년에 이곳에 처음 와서 느낀 것이지만 동네 사람들은 개구리를 많이 잡아 먹는다. 몸에 좋다나. 범법 행위로 규정해 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개구리의 천적은 인간이다.

 

 

우리는 손전등으로 발밑을 비추며 걸었다. 혹시라도 발을 잘못 딛어 개구리라도 밟게 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순식간에 개구리 배는 물풍선처럼 팽창했다가 터지리라. 몇 마리를 손전등으로 비추어 자세히 보았다. 봄비가 내리는데 개구리를 밟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걷는 밤이라.

 

 

44번 국도와 통하는 다리까지 내려갔다가 우리는 돌연 첨벙, 하는 소리와 돌 하나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놀라 다시 그쪽으로 가지는 않았다. 물을 먹으러 내려온 고라니일 수도 있지만 물을 먹으러 내려온 멧돼지이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우리는 무기도 없지 않느냐, 라고 말했고 나는 오른손에 든 장우산을 힘껏 움켜쥐며 무기라면 이게 있다, 라고 말해놓고도 힘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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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10: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것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에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종교의 유무를 떠나 누가(루카)복음에 나오는 이 유명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하면, 누구나 이타적 선을 실천한 훌륭한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사마리아인'의 이름을 빌린 그럴듯한 단체들도 많다.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의 그릇은 이정도였다. 

 

런데 작년에 리처드 할로웨이의 『성경』이란 책을 읽다가, 몰랐던 부분을 드러내는 확장된 해석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이 이야기의 핵심에 자리잡은 놀라운 내용을 발견해내려면 밋밋하기만 한 표면을 읽어서는 안 되고 (물론 그렇게 읽어도 좋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배후를 파헤쳐야 한다. 필자가 처음부터 주장하고 싶은 점은 이렇다. 이 작은 이야기는 진실하지 않은 종교-그러니까 율법 같은 것을 잘 지키지 않는 것-는 위험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한 종교가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 이야기가 찌르고자 하는 중요한 핵심이다."

 

리처드 할로웨이가 말하는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게 있다. 사마리아 인이 여행자를 발견하기 전에 그 여행자를 지나쳤던 사람 둘이 그냥 행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여행자를 발견한 사람은 사제였다. 이스라엘에서 사제는 종교적이고 경제적인 특권계급에 속했고, 그들은 제의적으로 정결치 못하게 되는 것을 무척 꺼리고 손수함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완전성을 모방하여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에 더러운 인종, 더러운 음식, 정액과 월경 피 같은 더러운 액체, 옷을 만들면 안 되는 재료들, 피부병 그리고 시체 등으로 대변되는 오염의 원천들을 철저히 피해야만 했다. 이런 것들과 조금이라도 닿게 되면 그 즉시 일종의 제의적 부정에 빠졌으며 이렇게 더러워진 사람은 성전 제의에 참여할 수 없고, 제의적으로 깨끗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사회적 접촉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사제 다음으로 여행자를 지나쳤던 사람은 레위인이다. 레위들은 성전의 천막뿐 아니라 음악, 향, 거룩한 빵 등 전례에 관한 사항들에 책임이 있는 평신도 협력자들로서 이들도 성전 제의에 참여하는 일원이었다. 

강도에 당해 쓰러진 여행자를 만난 날,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던 사제와 레위인의 삶은 정화 규정들로 인해 제한되어 있었고, 언제나 심리적으로 쉼 없이 정화 규정에 예민하게 각성되어 있을 것을 요구 받았다.

 

사실 사제나 레위인도 쓰러진 여행자를 본 순간, 감정적인 동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테지만, 그보다 이 낯선 사람이 제의적으로 깨끗한가 하는 의문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행자가 강도를 만나 쓰러졌던 길목이 어디였는가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건 예루살람에서 예리코로 이르는 길이었는데 사제나 레위들은 예리코 근처 요르단 계곡에 언제든 내려가 조용히 쉴 수 있는 땅을 갖고 있었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람에서 바쁜 시기가 지나 며칠 동안 요르단 쪽으로 쉬러 내려갈 때, 그들은 따로 난 길을 이용하곤 했다. 아마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인은 일을 끝내고 나와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요르단 계곡에서 조용히 휴가를 보내기 위해 그 길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제는 종교적으로 신중한 계산을 해야 했다. 그가 성전으로 돌아가 다시 깨끗하게 되려면 가족과 보낼 사흘짜리 휴가는 날아간다. 또한 여행자가 역겨운 사마리아인 같은 더러운 민족에 속한 자로 판명된다면 더더욱이 여행자를 만진다거나 여행자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튀어서는 안 되었다.

다음으로 등장한 레위인은 직속상사가 먼저 간 길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냥 지나쳐간 보스의 결정을 눈으로 보았다. 자신의 상사가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그도 계산을 해본 후에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 또한 제의적으로 안전거리를 지키며 길 건녀편으로 지나쳐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다. 방금 전에 이 길을 지나간 사제와 레위와는 제의적이고 사회적인 적이지만 그 역시 토라를 지키고 그 역시 정화 규정을 실행하고 그 역시 더러워질 위험을 꼭같이 안고 있다. 그런데 그는 신중하게 길 건너편으로 지나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영어에는 이 사건의 폭발적 성격을 잡아낼 수 있는 단어가 없다고, 할로웨이는 말한다. 영역으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he was moved with pity."라고 되어 있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을 설명하는 그리스어 '에스플랑크니쎄'는 매우 강력한 말이다. 우리 말의 "애가 끊어진다"에 상응할 정도로. 그렇다. 길 저쪽에서 벌거벗고 피 흘리는 사람을 보고 사마리아인의 애가 끊어져버린 것이다. 하여, 사마리아인은 정화규정을 그냥 무시했다. 동료 인간을 향한 동정심이 끓어올라, 적일지도 모르는 사람과 그 사이에 놓여졌던 제의적 장벽을 부셔버린 것이다.

 

할로웨이는 말한다. 이 아주 짧은 이야기에, 우리가 빠져 있는 영적이고 윤리적 위험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우리의 열정이 무질서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체계를 필요로 하겠지만 그것에 초월적이고 불변의 권위를 부여할 때, 그것은 족쇄 풀려 날뛰는 열정보다 더 큰 위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불변의 규정은 인간에 대한 보통의 동정심을 닫아버리게 하고, 동료 인간을 사람이 아니라 어떤 추상, 어떤 물건으로 취급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이런 일이 우리 양심에 일어나면 우리는 타인을 인간적 수준, 즉 우리 고유의 수준에서 대면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윤리적 규정은 알맞은 상황에서 적용할 때 선이 된다. 그 윤리적 규정이란, 예리코로 가는 도중 길 건너쪽으로 건너가서 강도를 당한 사람을 도와주면서 잠시 뒤로 접어두어야만 했던 바로 그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선한 사라미라인의 비유는 규정이 아니라 뜨거운 마음이야말로 참되고 보편적인 인간 윤리의 기초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글은 웅진지식하우스 하우 투 리드 시리즈의 『성경』이란 책의 8장에서 발췌, 변형하고 편집하여 쓴 글입니다.

 

덧) 사마리아인의 사회적 위치: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더러운 도적 인종으로 멸시했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722년 정복당하고 지도층 가문이 아시리아로 끌려갔을 때 그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착한 외적들과 결혼했고, 아시리아는 이들을 식민지 여러 곳에 이주시켰다. 사마리아인들은 배제된 신분이었지만, 토라를 계속해서 지켰다. 그들은 그리짐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세우기도 했다. 유대인은 기원전 1세기 그 성전을 파괴했고, 그 결과 이 두 집단 간에 적대심은 악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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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작가가 쓴 소설 작법이나 독서에 관한 책(나는 헤럴드 블룸과 프랜신 프로즈 책에서 플래너리 오코너를 눈여겨 보았었다)에서 꾸준히 언급되는 작가 중의 한 명인데, 이제야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도착했다. 제임스 설터가 몇 년 전에 그러했듯이. 

 

작년에 문학수첩에서 낸 선집에는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강」, 「당신이 구하는 생명은 당신 자신의 것인지도 모른다」, 「뜻밖의 재산」, 「성령이 깃든 사원」, 「검둥이 인형」, 「불 속의 원」, 「적과의 뒤늦은 조우」, 「선한 시골 사람들」, 「망명자」, 총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아쉬운 점은 작품들이 몇 년도에 발표되었는지는 책 맨 앞장에 밝힌 저작권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작가 소개나 작품 소개도 책날개와 띠지에 간략히 나와 있는 게 전부다(연보가 없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우리나라 작가로 치면 편혜영 작가의 초기 작들은 저리 가라할 정도로 '잔혹 도덕극'을 일삼는다. 수록된 10편을 대충 상기해보자면 살인, 절도와 배신, 결코 원치 않았던 임신, 이제껏 삶을 지탱해왔던 자부심의 붕괴, 방화,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덮쳐버린 죽음, 내적 파멸과 소진으로 끝이 난다. 학문이든 냉소든 죽은 남편의 말이든 종교적 계율이든 자신만의 철칙과 고집이든 끊임없이 반복하고 단련하며 삶을 유지하게 해주었던 것들 너머로부터의 습격이 일순간에 작품 속 인물들을 삼켜버리고 죽여버리고 무너뜨려버린다.

 

이를테면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같은 경우,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고, 사고가 일어난 후에 아이들이 풀짝 풀짝 뛰며 "우리 사고 났다!"라고 외치고는 (실망한 듯이)"근데 아무도 안 죽었네."라고 말할 때부터 나는 작가의 비범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소설 첫 문단에서부터 대놓고 등장하여 설마 나타날까 싶었던 탈옥범이 진짜로 나타나서 거침없이, 어느 정도는 예상과 부합하면서 또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것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와. 정말 잘 쓰는구나, 이 작가, 라고 입을 쩍 벌리는 수밖에. 입만 벌려졌나, 두개골도 쩍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오코너는 미국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문에서 자랐다. 얼마 안 되는-그 당시 남부는 신교가 득세했다-카톨릭교도였던 플래너리 오코너는 교리에 정통했고, 작품마다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다시,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미스핏이 할머니를 총으로 쏜 후에 "누가 1분에 한 번씩 총으로 쏴주었더라면 평생 좋은 여자로 살았을 텐데."라고 말하는 대목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그건 마치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희들의 진짜를 가리고 있는 껍데기가 얼마나 단단한지, 알량한 충격 갖고는 어림없을 테지. 뚫어버리기 위해선 삶을 끝내는 총소리처럼 충격적인 그 무엇이어야 하지. 이 이야기가 너희들의 잘난 껍데기, 허위의식을 유감없이 드러내버린다면 좋겠는데.

 

이에 대해서 헤럴드 블룸은 『독서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선한 시골 사람들」에서 스스로를 헐가라 부르는 조이의 목발이 젊은 성격책 세일즈맨의 간교에 의해 뺏기는 마지막 장면에 주목하며 "우리는 잔인하리만큼 재미있는 그녀의 운명으로부터 교훈을 도출해 낼 수 있다. "그녀의 일생 동안 1분마다 그녀를 유혹하여 그녀의 목발과 함께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녀는 훌륭한 여인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헤럴드 블룸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플래너리 오코너를 읽는 훌륭한 독법까지 제시한다. "내 생각에 그녀의 단편소설을 읽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이 그녀의 저주받은 무리의 일원이라는 것을 인정한 뒤,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그녀의 기괴하고 잊을 수 없는 이야기 솜씨를 즐기는 것이다. (...) 오코너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위선적이고 따분한 노파와, 오코너가 보기에 가톨릭 신의 은총의 도구인 살인자이다. 이 설정의 의도는 독자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며, 실제로 그러하다. 왜냐하면 저주받은 무리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설정에 충격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는 동안 1분마다 우리에게 총을 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이 오코너의 생각이다. 오코너의 명백한 의도에 우리는 왜 화를 내지 않는가? 그녀가 지닌 희극적 재능이 분명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이다. 그 정도로 완전히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라면 거의 자기 마음대로 우리를 저주해도 괜찮다."

한편 작법 면에서, 해와 달, 하늘, 나무, 강, 그리고 인물의 눈동자를 비롯한 외양을 묘사하는 작가의 탁월한 실력도 눈여겨볼 만했다. 작품마다 빠짐없이 자연 경관과 인물에 대한 사실적 묘사가 등장하는데, 마치 하루에 한 편씩 그런 것들에 대한 묘사를 써내라는 교사 아래서 혹독한 훈련을 받은 것처럼 창의적이고 변화무쌍했다. 그리고 흥미로웠던 사실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인물 설정이 많았다는 거다. '좋은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표제작의 이름처럼 작품들에서 현명하고 지혜로운 노인을 찾기 힘들었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라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수록된 10편 모두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였다.

마지막으로 작년에 문학수첩보다 몇 달 늦게 플래너리 오코너 선집을 펴낸 현대문학의 책이 있어서, 두 판본을 비교해보았다.  번역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어 보인다. 플래너리 오코너가 문장을 교묘하게 쓰거나 수식이 찬란한 작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현대문학 판본에 딸려 있는 친절하고 성실한 역자 해설과 작가 연보를 들춰보며 대체 문학수첩은 왜 이런 과정을 과감히 생략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문학수첩 띠지에는 '고딕문학의 거장 플래너리 오코너 대표작 국내최초 출간!'이라고 거창하게 적혀 있다. 국내최초 출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나치게 서두른 탓일까, 고딕문학의 거장을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소개하는 데 응당 뒤따랐어야 할 것들이 없어서 황당했다. 저자에 대한 소개도 아주 간략하게 책날개의 한면에만 할애했다. 독자는 이렇게 재능 있는 작가의 인생에 대해 최소한 책날개의 한면보다 많이, 알고 싶어할 것이다. 편집부 측에서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발달한 시대에 살고 있는 독자들의 검색 실력을 지나치게 맹신한 것은 아닌지. 그러나 막상 '고딕문학'이라고 검색해보았자 플래너리 오코너의 작품 세계와 정확하게 부합하는 지식을 찾기란 어렵다. 그런 면에서 문학수첩 편집부는 무척 안이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고딕문학'이라고 쓴 것조차 부정확했다.

 

현대문학 판본의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 대로 '남부 고딕 Southern Gothic'이라고 했어야 했다. 현대문학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 설명을 옮기면 이러하다. "오코너의 남부는 '남부 고딕'이라는 문학 장르와도 연관된다. 윌리엄 포크너, 테네시 윌리엄스 등을 주요 작가로 꼽는 남부 고딕 문학은 주로 심각한 결함이나 뒤틀린 성품을 지닌 인물들이 나와서 쇠락하고 기괴한 상황을 배경으로 격렬한 사건을 일으킨다. 여기에 남부의 복잡한 사회적 문제들이 결합된다. 오코너의 작품 역시 이런 남부 고딕 소설들의 특징을 공유한다."

 

현대문학에는 30편이 수록되어 있고 문학수첩에는 10편이 수록되어 있다.  현대문학에는 문학수첩에 수록된 9편이 포함되어 있다. 헤럴드 블룸이 그녀의 단편 중에 탁월한 작품으로 꼽는 「숲의 전망」과 「파커의 등」도 현대문학 선집에는 수록되어 있다. 문학수첩에는 없지만 현대문학에 수록되어 있는 놀랄 만한 단편으로는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 「숲의 전망」,「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를 읽으면서 또 한 번 이 작가의 놀라운 재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원문 : https://pegasus.cc.ucf.edu/~surette/goodma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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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에는 총 12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깃털들」, 「체프의 집」, 「보존」, 「칸막이 객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비타민」, 「조심」, 「내가 전화를 거는 곳」, 「기차」, 「열」, 「굴레」, 「대성당」. 여기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가 많은 단편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이 아닐까 하며 글 좀 쓴다 싶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은 단편이 「깃털들」과 같은 단편이 아닐까 한다(후자는 지극히 개인적인 통계다). 사실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에 대해서라면, 저마다 최고로 좋아하는 단편이 다양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어떤 사람은 나로서는 다시 읽어보기 전에는 줄거리조차 생각나지 않았던 「칸막이 객실」을 가장 좋아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그런가하면 손보미와 신형철은 카버의 중기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실린 「정자」같은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먼저 「칸막이 객실」을 들여다보자.  마이어스는 이혼한 이래 팔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아이를 보러 스트라스부스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있다. 부자의 마지막 모습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누구 때문에 네가 태어났는데" "네까짓 녀석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와 같은 말을 아이에게 했었다. 그야말로 최악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현재 시점에서 두 달 전에-아이에게서 짧은 편지가 도착한다. "불가사의하게도 아이는 '사랑해요'라는 말로 편지를 끝맺었고, 그 때문에 마이어스는 이 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야만 했다. (84쪽)" 마시어스 역시 "사랑하는 아빠가"라고 끝맺은 답신을 보낸다. 마이어스는 시간적으로나 마음적으로 무리를 해서 생각지도 않은 유럽 여행을 간다. 순전히 아이만을 보기 위해서 불현듯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뭔가 께름칙했던 것 같다. 그러나 스트라스부스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들린 로마나 베니스에서 마이어스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스트라스부스로 향하고 있는 기차 안에서, 마이어스는 외투 안에 간직하고 있었던 아이의 선물을 잃어버린다. 로마에서 산 고가의 일제 손목시계인데, 그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없어졌다. 칸막이 객실에는 독일인으로 생각되는 외국인 뿐이고 그는 시계의 행방에 대해서 묻는 마이어스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제스처를 한다. 마이어스는 잃어버린 시계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신의 진실에 대해서 깨우친다. "그때 갑자기 그는 결국 자신은 아이가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됐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은 그는 충격을 받았고, 그 비열한 생각에 잠시 움찔했다(89쪽)" "그에게는 정말 오래전에 이미 자신의 애정을 거둬들이게 행동했던 그 아이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없다는 점이었다.(89쪽)" 그 뒤로도 마이어스의 서늘한 생각들은 이어진다. 아이가 마이어스의 청춘을 집어삼키었고 자신의 사랑스러웠던 아내를 알콜중독자로 만들었다고. 그는 정말이지 '자기 인생의 적'인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싶지도 않고 어깨를 토닥거리고 싶지도 않다고. 하여 그는 스트라스부스에서 내리지 않을 것이었다. 맞은편의 외국인은 스트라스부스에서 내리면서 마이어스에게 "스트라스부스"라고 말한다. 너 스트라스부스 가잖아, 안 내릴 거야? 라고 묻는 투로. 시계는 아마 외국인의 품에 있을 거라고 마이어스는 확신한다(마이어스의 외투 안에는 '기차표'가 들어 있는 지갑과 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상관없다.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혹시라도 기다리고 있을 아들이 서 있나 창밖을 살펴보며 마이어스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 헤어짐을 아쉬워 하는 젊은 연인들을 본다. 이 젊은 연인 중에 남자가 마이어스의 칸막이 객실로 들어오고 그들은 차창을 사이에 두고 또 절절한 작별인사를 한다. "마이어스는 고개를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93쪽)" 마이어스는 스트라스부스에서 내리지 않았고 젊은 연인이 자신에게 환기한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객실을 나와서 기차가 조차장에 들어갔을 때 객차들이 연결되는 지점까지 간다. 그리고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고 마이어스가 허겁지겁 원래의 객차로 넘어가 자신의 칸막이 객실을 찾지만 젊은 남자도, 마이어스의 여행 가방도 없다. "그는 기차가 조차장에 있는 동안 자신이 타고 있던 객차를 떼어낸 뒤 다른 이등 객차를 연결시켰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오싹함을 느꼈다. (95쪽)" 새로운 칸막이 객차 안에 꽉 들어찬 피부가 까만 외국인들은 마이어스를 환대하며 앉을 공간을 마련해주고 마이어스는 시계도, 여행가방도 잃어버렸지만 더없이 편해져서 이내 잠에 빠져든다. 마이어스가 잠들기 전에 했던 생각들은 이러했다. "한순간, 마이어스는 그 풍경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딘지 모르지만 가고 있는 중이라는 걸 그도 알 수 있었다. 그게 잘못된 길이라면 머지않아 그도 알게 될 것이다. (95쪽)


이 소설의 결말은 「열」의 칼라일의 깨달음과 비슷한 선상에 놓인다. "하지만 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들이 함께한 인생이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인생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침은-비록 그게 불가능하게 보였고 그가 맞서 싸우기까지 했지만-이제 그의 일부가 됐다. 그가 거쳐온 지난 인생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287쪽)" 그런가하면 「굴레」의 마지막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마부가 그 고삐를 이리저리 잡아당기면 말은 방향을 바꾼다. 간단하다. 재갈은 무겁고 차갑다. 이빨은 이런 걸 물어야만 한다면 금방 많은 것을 알게 됐으리라. 뭔가 당겨진다면 그건 떠날 시간이 됐다는 뜻이라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뜻이라고.(322쪽)"


그러니까.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무너져 내린' 인물의 현재와 혹은 그 '파열선'을 찾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면 『대성당』에는 엉망진창이었던 과거의 삶이 인생의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는 '단절선'을 그린 것들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고 해서「열」이나「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나 「대성당」처럼 마냥 희망적인 조짐은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칸막이 객실」에서 보여주는 마이어스 삶의 '단절선'은 희망적이라기 보다는 서늘하고 사실적이며,「깃털들」역시 그러하다. 잭과 프랜이 버드와 올라의 집을 방문하고서 맞이한 삶의 국면은 적어도 잭과 프랜에게는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었으리라... 할 수만 있다면 버드와 올라의 집을 방문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였으리라...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게 삶인 것을. 삶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부부가 겪는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101~102쪽)" 처럼 삶의 높낮이를 바꿔버리는 힘이 존재하기도 하고 「굴레」에서 홀리츠와 베티 가족을 지켜보았던 화자가 덤덤한 목소리로 "뭔가 당겨진다면 그건 떠날 시간이 됐다는 뜻이라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뜻이라고.(322쪽)"라고 전해주듯이 삶의 높낮이라기 보다는 그저 방향을 트는 힘이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말하는 지점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터닝 포인트'라고 말하기에는 몹시 가슴 아프고 괴롭고 최악이었던 과거여서 그 과거의 길을 쭉 복기하는 채로 이후의 삶의 방향을 돌렸다기 보다는 과거의 삶을 '말소'해버리고 나서 새롭게 시작하는 어떤 지점, 일 것이다. 「칸막이 객실」에서 마이어스의 객차가 바뀌는 것처럼.


카버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단편적인, 조각으로 기워진 사실들이다. 두 권의 소설집,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것들, 역자들의 해설, 작가 연보와 『작가란 무엇인가』에 나와 있는 인터뷰... 거기서 나는 이러한 사실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알콜 중독이었던 카버는 77년 6월에 술을 끊었으며 81년에 중기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냈고 82년에 스승인 존 가드너가 죽었고 첫번째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했고 83년에 『대성당』을 냈다. 『대성당』을 출간하면서 편집자 고든 리시에게 전처럼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던 것도 적잖이 영향을 끼쳤을 테지만, 그보다도 작가 인생의 변화가 작품의 성격에 변화를 가져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카버가 88년에 죽지 않고 좀더 오래  살아서 우리에게 보여줬을 작품들을 상상해보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카버 특유의 '파열선'을 포착하고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품들도 여전히 있다. 「체프의 집」이라든가 「비타민」, 「보존」같은 작품들. 이번에 읽었을 때 특히 눈에 띄었던 작품은 「보존」이었다. 한마디로, 제목부터가 절묘했다.


샌디의 남편은 석달 전에 해고된 뒤로 늘 소파 신세다. 남편은 매일 밤 소파에서 자고 일어나고 살아간다. 둘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살아가려 하지만 샌디에게 이런 생각을 막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어딘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샌디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자신에게 일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녀는 고맙게 여겼다. 하지만 자기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또 세상 다른 모든 사람들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64~65)” 그러던 어느 오후, 샌디가 퇴근하고 돌아와 프레온이 빠진 냉장고를 발견한다. 녹은 음식과 아이스크림 등으로 냉장고는 엉망진창이다. 그녀와 남편은 냉동실에 있던 것들을 꺼내어 일단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들은 중고 냉장고를 파는 사람이 있나 신문의 광고면을 훑어보다가 창고 경매를 한다는 글을 발견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밖에 한 번 나가서 바람도 쐴 겸 냉장고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자고 나가자고 하지만 남편의 대답은 이렇다.평생 경매에는 한 번도 안 가봤어. 이제 와서 그런 곳에 가고 싶지는 않아. (73)” 그러나 어쨌든 그는 아내에게 가겠다고 말한다. 그녀가 외출하기 전에 먹을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소파에서, 늘 보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을 읽다가 이내 잠들어버린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빠와 경매에 가곤 했던 것을 떠올린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뒤로 아빠는 딸과 경매장에 다니던 시절이 그립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아빠는 결국 경매에서 산 차에서 일산화탄소가 새어나오는 바람에 죽었지만... 그녀는 지금 아빠와 엄마가 그립다. 요리가 완성되었고 식탁으로 남편이 가까이 오자 그때서야 샌디는 알아차린다. 냉동식품을 올려두었던 식탁 아래로 물이 계속 떨어지며 물이 고였다는 걸. 그녀는 남편의 맨발 옆에 고인 물을 쳐다보며 그 발에서 시선을 뗄 수 없고, 그 맨발은 식탁에 앉지 않고 다시 소파가 있는 거실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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