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에는 총 12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깃털들」, 「체프의 집」, 「보존」, 「칸막이 객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비타민」, 「조심」, 「내가 전화를 거는 곳」, 「기차」, 「열」, 「굴레」, 「대성당」. 여기서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가 많은 단편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이 아닐까 하며 글 좀 쓴다 싶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은 단편이 「깃털들」과 같은 단편이 아닐까 한다(후자는 지극히 개인적인 통계다). 사실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에 대해서라면, 저마다 최고로 좋아하는 단편이 다양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어떤 사람은 나로서는 다시 읽어보기 전에는 줄거리조차 생각나지 않았던 「칸막이 객실」을 가장 좋아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그런가하면 손보미와 신형철은 카버의 중기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 실린 「정자」같은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먼저 「칸막이 객실」을 들여다보자. 마이어스는 이혼한 이래 팔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아이를 보러 스트라스부스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있다. 부자의 마지막 모습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누구 때문에 네가 태어났는데" "네까짓 녀석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와 같은 말을 아이에게 했었다. 그야말로 최악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현재 시점에서 두 달 전에-아이에게서 짧은 편지가 도착한다. "불가사의하게도 아이는 '사랑해요'라는 말로 편지를 끝맺었고, 그 때문에 마이어스는 이 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야만 했다. (84쪽)" 마시어스 역시 "사랑하는 아빠가"라고 끝맺은 답신을 보낸다. 마이어스는 시간적으로나 마음적으로 무리를 해서 생각지도 않은 유럽 여행을 간다. 순전히 아이만을 보기 위해서 불현듯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뭔가 께름칙했던 것 같다. 그러나 스트라스부스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들린 로마나 베니스에서 마이어스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스트라스부스로 향하고 있는 기차 안에서, 마이어스는 외투 안에 간직하고 있었던 아이의 선물을 잃어버린다. 로마에서 산 고가의 일제 손목시계인데, 그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없어졌다. 칸막이 객실에는 독일인으로 생각되는 외국인 뿐이고 그는 시계의 행방에 대해서 묻는 마이어스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제스처를 한다. 마이어스는 잃어버린 시계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신의 진실에 대해서 깨우친다. "그때 갑자기 그는 결국 자신은 아이가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됐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은 그는 충격을 받았고, 그 비열한 생각에 잠시 움찔했다(89쪽)" "그에게는 정말 오래전에 이미 자신의 애정을 거둬들이게 행동했던 그 아이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없다는 점이었다.(89쪽)" 그 뒤로도 마이어스의 서늘한 생각들은 이어진다. 아이가 마이어스의 청춘을 집어삼키었고 자신의 사랑스러웠던 아내를 알콜중독자로 만들었다고. 그는 정말이지 '자기 인생의 적'인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싶지도 않고 어깨를 토닥거리고 싶지도 않다고. 하여 그는 스트라스부스에서 내리지 않을 것이었다. 맞은편의 외국인은 스트라스부스에서 내리면서 마이어스에게 "스트라스부스"라고 말한다. 너 스트라스부스 가잖아, 안 내릴 거야? 라고 묻는 투로. 시계는 아마 외국인의 품에 있을 거라고 마이어스는 확신한다(마이어스의 외투 안에는 '기차표'가 들어 있는 지갑과 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상관없다.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혹시라도 기다리고 있을 아들이 서 있나 창밖을 살펴보며 마이어스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 헤어짐을 아쉬워 하는 젊은 연인들을 본다. 이 젊은 연인 중에 남자가 마이어스의 칸막이 객실로 들어오고 그들은 차창을 사이에 두고 또 절절한 작별인사를 한다. "마이어스는 고개를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93쪽)" 마이어스는 스트라스부스에서 내리지 않았고 젊은 연인이 자신에게 환기한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객실을 나와서 기차가 조차장에 들어갔을 때 객차들이 연결되는 지점까지 간다. 그리고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고 마이어스가 허겁지겁 원래의 객차로 넘어가 자신의 칸막이 객실을 찾지만 젊은 남자도, 마이어스의 여행 가방도 없다. "그는 기차가 조차장에 있는 동안 자신이 타고 있던 객차를 떼어낸 뒤 다른 이등 객차를 연결시켰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오싹함을 느꼈다. (95쪽)" 새로운 칸막이 객차 안에 꽉 들어찬 피부가 까만 외국인들은 마이어스를 환대하며 앉을 공간을 마련해주고 마이어스는 시계도, 여행가방도 잃어버렸지만 더없이 편해져서 이내 잠에 빠져든다. 마이어스가 잠들기 전에 했던 생각들은 이러했다. "한순간, 마이어스는 그 풍경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딘지 모르지만 가고 있는 중이라는 걸 그도 알 수 있었다. 그게 잘못된 길이라면 머지않아 그도 알게 될 것이다. (95쪽)
이 소설의 결말은 「열」의 칼라일의 깨달음과 비슷한 선상에 놓인다. "하지만 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들이 함께한 인생이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인생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침은-비록 그게 불가능하게 보였고 그가 맞서 싸우기까지 했지만-이제 그의 일부가 됐다. 그가 거쳐온 지난 인생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287쪽)" 그런가하면 「굴레」의 마지막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마부가 그 고삐를 이리저리 잡아당기면 말은 방향을 바꾼다. 간단하다. 재갈은 무겁고 차갑다. 이빨은 이런 걸 물어야만 한다면 금방 많은 것을 알게 됐으리라. 뭔가 당겨진다면 그건 떠날 시간이 됐다는 뜻이라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뜻이라고.(322쪽)"
그러니까.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무너져 내린' 인물의 현재와 혹은 그 '파열선'을 찾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면 『대성당』에는 엉망진창이었던 과거의 삶이 인생의 다른 국면으로 넘어가는 '단절선'을 그린 것들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고 해서「열」이나「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나 「대성당」처럼 마냥 희망적인 조짐은 아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칸막이 객실」에서 보여주는 마이어스 삶의 '단절선'은 희망적이라기 보다는 서늘하고 사실적이며,「깃털들」역시 그러하다. 잭과 프랜이 버드와 올라의 집을 방문하고서 맞이한 삶의 국면은 적어도 잭과 프랜에게는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었으리라... 할 수만 있다면 버드와 올라의 집을 방문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였으리라...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게 삶인 것을. 삶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부부가 겪는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101~102쪽)" 처럼 삶의 높낮이를 바꿔버리는 힘이 존재하기도 하고 「굴레」에서 홀리츠와 베티 가족을 지켜보았던 화자가 덤덤한 목소리로 "뭔가 당겨진다면 그건 떠날 시간이 됐다는 뜻이라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뜻이라고.(322쪽)"라고 전해주듯이 삶의 높낮이라기 보다는 그저 방향을 트는 힘이 존재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말하는 지점말이다. 그러나 단순히 '터닝 포인트'라고 말하기에는 몹시 가슴 아프고 괴롭고 최악이었던 과거여서 그 과거의 길을 쭉 복기하는 채로 이후의 삶의 방향을 돌렸다기 보다는 과거의 삶을 '말소'해버리고 나서 새롭게 시작하는 어떤 지점, 일 것이다. 「칸막이 객실」에서 마이어스의 객차가 바뀌는 것처럼.
카버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단편적인, 조각으로 기워진 사실들이다. 두 권의 소설집,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것들, 역자들의 해설, 작가 연보와 『작가란 무엇인가』에 나와 있는 인터뷰... 거기서 나는 이러한 사실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알콜 중독이었던 카버는 77년 6월에 술을 끊었으며 81년에 중기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을 냈고 82년에 스승인 존 가드너가 죽었고 첫번째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했고 83년에 『대성당』을 냈다. 『대성당』을 출간하면서 편집자 고든 리시에게 전처럼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았던 것도 적잖이 영향을 끼쳤을 테지만, 그보다도 작가 인생의 변화가 작품의 성격에 변화를 가져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카버가 88년에 죽지 않고 좀더 오래 살아서 우리에게 보여줬을 작품들을 상상해보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카버 특유의 '파열선'을 포착하고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품들도 여전히 있다. 「체프의 집」이라든가 「비타민」, 「보존」같은 작품들. 이번에 읽었을 때 특히 눈에 띄었던 작품은 「보존」이었다. 한마디로, 제목부터가 절묘했다.
샌디의 남편은 석달 전에 해고된 뒤로 늘 소파 신세다. 남편은 매일 밤 소파에서 자고 일어나고 살아간다. 둘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살아가려 하지만 샌디에게 이런 생각을 막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어딘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샌디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자신에게 일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녀는 고맙게 여겼다. 하지만 자기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또 세상 다른 모든 사람들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64~65쪽)” 그러던 어느 오후, 샌디가 퇴근하고 돌아와 프레온이 빠진 냉장고를 발견한다. 녹은 음식과 아이스크림 등으로 냉장고는 엉망진창이다. 그녀와 남편은 냉동실에 있던 것들을 꺼내어 일단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들은 중고 냉장고를 파는 사람이 있나 신문의 광고면을 훑어보다가 ‘창고 경매’를 한다는 글을 발견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밖에 한 번 나가서 바람도 쐴 겸 냉장고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자고 나가자고 하지만 남편의 대답은 이렇다. “평생 경매에는 한 번도 안 가봤어. 이제 와서 그런 곳에 가고 싶지는 않아. (73쪽)” 그러나 어쨌든 그는 아내에게 가겠다고 말한다. 그녀가 외출하기 전에 먹을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그는 소파에서, 늘 보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을 읽다가 이내 잠들어버린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빠와 경매에 가곤 했던 것을 떠올린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뒤로 아빠는 딸과 경매장에 다니던 시절이 그립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아빠는 결국 경매에서 산 차에서 일산화탄소가 새어나오는 바람에 죽었지만... 그녀는 지금 아빠와 엄마가 그립다. 요리가 완성되었고 식탁으로 남편이 가까이 오자 그때서야 샌디는 알아차린다. 냉동식품을 올려두었던 식탁 아래로 물이 계속 떨어지며 물이 고였다는 걸. 그녀는 남편의 맨발 옆에 고인 물을 쳐다보며 그 발에서 시선을 뗄 수 없고, 그 맨발은 식탁에 앉지 않고 다시 소파가 있는 거실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