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에 (영국 유학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거의 20년이 다 되었을 듯)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브리티쉬 뮤지움의 관장이 자신이 가진 직업의 가장 큰 미덕은 고요한 박물관에서 "유물과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했던 부러운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 아무도 없는 박물관에서 고대의 유물들을 오래 들여다 보며 대화를 한다니, 너무 멋진 일이 아닌가? 박물관에서 일하며 미술품과 유물과 대화하는 것, 그것은 나의 오랜 로망이 되었다. .
물론 유사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했다. 사무실 이전 등으로 복잡한 시기에 고궁박물관 사무동에서 잠깐 근무를 했었을 때, 마음이 복잡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전시실로 내려와 왕실 상여 앞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한 2년 정도 박물관에서 일을 했었는데, 아쉽게도 오래된 유물이나 미술품이 많은 곳은 아니어서 대화의 기회는 많지 않았다. 언젠가는 한 번은 더 기회가 오길...
이 책의 저자는 관장이나 학예사로서 아니라 매우 중요하지만 존재감이 크지 않은,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소장품들과 "깊은 대화"를 하고 그 경험을 책으로 펴낸 사람이다. 잘 나가는 "뉴요커" 잡지의 기자였지만, 사랑하는 형을 암으로 잃게되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렇게 한동안 고요하게 서 있고 싶어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된다.
"사실 내 직업을 좋아할 뿐 아니라 내가 그 일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에 화가 난다. 이렇게 평화적이고 정직한 일에서 흠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무례하고 바보 같으며, 심지어 배신행위라는 생각까지 든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는 나무 바닥과 천년묵은 예술품에 감사하는 마음, 뭔가를 팔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구덩이를 파거나, 포스기를 두드리는 등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쪽을 택할 것이다" (p178)
삶의 고통과 상실감을 피해 경이로운 세계로 숨어든 저자는 메트의 그 많은 전시실들을 옮겨가며 그 소장품들을 우리에게 안내한다. 이집트관, 옛 거장의 방, 고대 그리스관, 이슬람관 등 마치 메트를 돌아보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생생하게.
(메트를 떠나면서 그가 뽑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의 리스트를 보자.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 <은키시 주술상>, <시모네티 양탄자>, <곡물수확(브뤼겔)>, <삽자가에 못박힌 예수(프라 안젤리코)>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것은 브뤼겔의 곡물수확에 대한 부분이었다. 병상에 있던 형과의 일화
"형이 하는 말은 더 이상 앞뒤가 맞지 않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런 형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치킨 맥너겟을 먹겠다고 햇다. 지금 생각해보면 맨해튼의 밤거리로 뛰어나가 소스와 치킨 너깃 한 아름 사들고 돌아오던 그 때 보다 더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침대를 둘러싼 채 우리는 우리가 아는 최선을 다해 사랑과 슬픔과 웃음이 가득한 소풍을 즐겼다. 돌이켜보면 그 장면은 피터르 브뤼헐의 <곡물수확>을 떠올리게 한다. 멀리까지 펼쳐진 광활한 풍경을 배경으로 농부 몇몇이 오후의 식사를 즐기는 모습 말이다...브뤼헐의 이 명작을 바라보면 나는 가끔 이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흔한 광경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지었고 그들 중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평생 노동을 하고 궁핍한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 휴식을 취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너무도 일상적이고 익숙한 광경을 묘사하기 위해 피터르 브뤼헐은 일부러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광활하게 펼쳐진 세상의 맨 앞자리를 이 성스러운 오합지졸들에게 내주었다. 가끔 나는 어느쪽이 더 눈부시고 놀라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담은 위대한 그림일까 (P166)
맥너겟을 사오면서 행복했다는 구절을 읽으면서 아주 오래된,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30년전 쯤 어느 여름 밤, 엄마와 두 동생과 갑자기 만두를 먹겠다고 외출을 했던 기억. 비 내리는 밤이었는데, 물을 텀벙거리며 재잘거리며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웃고 떠들던 기억.그 밤, 왜 그리 행복했는지.. 아무것도 아닌, 그냥 그런 날이었는데.. 그 추억을 떠올리게 해준 저자에게 너무 감사하다. 삶이라는 것이 그런 작은 행복들로도 충분히 살만한 것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책에 미술품에 대한 우아한 감상만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미술관의 경비일이 미술품과 대면하는 고요하기만 한 일은 아니어서 온 갖 다양한 관람객과 다양한 배경의 동료들과 만나는 경험도 제공한다.
"소위 비숙련직의 큰 장점은 엄청나게 다양한 기술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한다는 점이다....그 결과 외국 출생인 사람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경비팀은 인구학적으로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축에서 각양각생이다....매트의 경비팀에너는 뱅골만에서 구축함을 지휘했던 사람, 택시를 몰던 사람...순찰을 돌던 경찰, 그런 경찰들의 활동을 기자들...만날 수 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람객들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즐거움도 있다. 경비원들에게 나는 어떤 관람객이었을까? 우리가 전시품을 보는 사이, 경비원들은 우리들을 보고 있겠구나 하는 새로운 시선의 발견...
읽자마자 두서없이 적었다. 정서는 안할 작정이다.
박물관의 경비원,
부실한 다리만 허락한다면 해 보고 싶은 일이다.
감사히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