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서 사랑하다
쓰지 히토나리 외 지음, 양억관 외 옮김 / 동방미디어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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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귀찮네요. 가끔, 아아 싫다고 생각해요. 굳이 '진정한 만남' 따위 필요 없으니까, 하고 말이죠. 하지만 만난다니까요, 그 때마다 진짜를. '오직 사랑하라, 자연이 우리를 낳았으니.' 체호프가 「세 자매」에서 한 말입니다. 나는 확신하고 싶어요. 인간은 연애와 혁명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다자이는 「사양」의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하도록 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연애에 빠지는 걸요. 이렇게 태어났으니, 애써 홀로 고독하게 태어났으니, 알고 싶지 않습니까? 둘이 어떤 것인지.'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나는 ... 그래요,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건설적이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르죠. 연애는 개념의 파괴니까, 인생을 건설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랑과는 다른 것이죠. 그 점이 재미있지 않나요. 연애에 빠지면 옷깃을 여미고 끝까지 빠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랑을 지나 죽고 싶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p, 254, 255


에쿠니 가오리 책을 소장하기 시작하면서 이 책을 제일 먼저 소장하려고 했는데 절판되는 바람에 소장하지 못했었네요. 그 후, 한옥마을에서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이 책을 보고 맛보는 식으로 조금 읽고 나왔는데 그 후로 1년이 지난 지금.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바로 데려왔습니다.

 

 

자기 전에 누워서 조금씩 읽었는데 한 번 읽을때마다 푹 빠져서 읽게 되어,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일찍 일어나니까 자야겠다'하며 억지로 책을 내려놓는 걸 반복했네요. 그정도로 호소력이 짙은 책입니다. 보통 이렇게 호소력이 짙은 장르는 소설인데, 자기계발 서적에 이렇게 푹 빠질 수 있다니 신기했습니다. 솔직히 이 책을 자기계발 서적으로 분류해야할지에 대한 의문이 드네요.

'연애와 사랑 사이', '섹스와 마음 사이', '순애와 불륜 사이'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번 쯤 의문을 가졌을만한 남녀 관계에 대한 문제를 총 6개로 나누어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쓴 글인데 이를 자기 계발 서적으로 해야할지..(인간 관계 쪽으로 분류되어있더라구요)

 

 

더 흥미로운 사실은, 츠지 히토나리의 글은 번역가 양억관님,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번역가 김난주님이 옮겨주셨다는 건데 이 두 번역가는 부부사이 이기도 하지요. 실제로 에쿠니 가오리, 츠지 히토나리의 다른 작품들도 각각 김난주, 양억관 번역가님이 번역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가끔은 이 두 작가와 번역가를 따로 떼어내어 생각하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질투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깊이 빠져있다는 증거이니까요. 그리고 질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열정이 식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때는 이미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죠. 질투하지 않는 관계란, 에쿠니 씨가 말하는 것처럼 참으로 외롭고 허전한 일입니다. -p, 63

 

 

'속박한다'는 거 실제로는 수동형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동사 같아요. 속방 당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하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책임은 당하는 쪽에 있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동사란 참 재미있어요.

'상처입다'는 실질적으로 자동사일 때만 가능하죠. 물리적인 폭력은 예외지만, 연애의 정신적인 면에서 상처를 입을 수는 있어도 상처를 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상처를 입는 것은 상처를 입는 쪽의 능력이지요.

내가 이렇게 상처를 입었는데, 라면서 상대방을 추궁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잃다'란 말도 마찬가지죠. 자동사만 가능해요. 나는 사랑을 잃었다, 고 한탄하는 것은 좋지만 주어는 '나'니까 자기 책임이죠. 옛날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너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고 아연했던 적이 있어요. 정말 슬펐죠. 이 사람, 나를 잃으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p, 100

 

 

 

이 책은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의 여러 작품을 먼저 접해본 후에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실제 작품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도 하지만,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아, 이런 생각을 해서 이런 작품이 나왔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재미도 쏠쏠하거든요.

 

 

 

즉,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고, 그녀가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쪽이 먼저고, 어느 쪽이 나중인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결과로 그렇게 되고 만 것입니다. 성격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애석한 일이지만 어떤 일들이 쌓이고 쌓인 결과 사랑이 항복을 선언하고 만 것입니다. -p, 170

 

 

 

'결혼과 이혼 사이'라는 부분에선 츠지 히토나리와 그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츠지 히토나리는 이 글을 쓸 때, 그의 아내와 이혼을 한 상태였는데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러브레터의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와 결혼을 한 사이네요. 이 책에서 나오는 아내와 그녀가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는 자세히 검색을 해보지 않아 모르지만, 흥미로웠습니다.

 

 

말이란 참 재미있어요. '나는 이 사람을 잃어도 혼자 살아갈 수 있다'가 아니라 '이 사람이 어딘가에 살아만 있으면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실연을 하고 자살한다든가, 연애가 끝나서 상대가 떠나면 더 이상 나는 살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에 있었던 뜨거운 감정이 지금은 없어졌다, 물리적으로 여러 사정이 있어서 같이 살 수 없어졌다, 이제는 만날 수 없다. 그렇게 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일' 즉 연애나 사랑은 더없이 특별한 것이고 절대 잃을 수 없는 것. 그리고 상대방도 반드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야만스러운 확신!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고, 만약 나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 때는 자살할지도. -p, 204, 205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에 '륜'을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자신이고 싶은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 '륜'을 거부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런 여자는 되고 싶지 않다든가, 이런 남자만큼은 되지 않겠다는. 개개인이 긋는 선 이외에 연애의 선은 없다고 생각해요. 애당초가 황무지니까. -p,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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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3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김영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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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거의 말할 뻔했다. 그가 느끼는 애정이 얼마나 강한지 혹은 꾸준한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어쨌든 지금은 그가 자기한테 확고하고 열렬한 찬미를 바치고 사랑하는 마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다른 모든 정황이 합쳐지면서, 그녀는 그러지 않기로 했던 예전의 온갖 결심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그를 사랑하게 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p, 378

 

<오만과 편견> 이후로 오랜만에 접한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었어요.
주인공 에마가 자신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결혼을 주선해주는 역할을 해오다가
결국 나중에는 자신의 다짐과 다르게 사랑에 빠져버리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내용일 수 있지만 이 작품에 나오는 대사나 캐릭터들의 행동을 지켜보다보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푹 빠져서 읽게 된 작품이에요.


“전 우드하우스 양께서 아직 결혼을 안 하고, 결혼 계획도 없다는 게 정말이지 이상해요! 이렇게 매력적인 분인데요!”

에마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대답했다.

“결혼할 마음을 먹자면, 해리엇, 내가 매력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하잖아.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매력적으로 여겨져야지, 적어도 한 사람은 말이야.

그리고 난 지금 결혼 계획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결혼할 생각이 별로 없는걸.” -p, 128, 129

 

 

 

지금까지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서 <오만과 편견>이 가장 유명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제가 이번에 읽은 <에마> 역시,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라고 해요. 고전은 어떻게 보면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어서 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제인 오스틴의 작품 분위기는 좋아라해서 700쪽이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인데도 선뜻 읽게 되었네요.

 

신기하게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는 그 누구도 소외됨이 없어요. 

한 명, 한 명이 모두 사랑스럽고 매력적이에요.

 

 

 

풋풋한 젊음과 밝은 아침은 서로 잘 어울리며 힘 있게 작동하는 법이다.

뜬눈으로 밤을 새울 정도로 사무친 괴로움이 아니라면, 아침에 눈을 뜰 때는 아픔도 좀 누그러들고 희망도 밝아오게 마련이다. -p, 203

 

 

 

"엘튼 씨의 매너가 완벽한 것은 아니에요.” 에마가 대답했다.

“그러나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경우에는 웬만한 건 눈감아 주어야 하고 실제로도 눈감아 주게 되지요. 별로 뛰어난 능력이 없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남자가

능력이 뛰어난데도 무관심한 남자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는 법이니까요. 엘튼 씨는 성격이 무척이나 좋고 호의에 차 있어서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p, 165

 

 

 

‘남자들이야 지저분한지 아닌지 알 리가 없는 종족이니까.’ 그리고 두 신사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여자들이란 쓸데없는 것에 목을 매는 종족이지.’ -p, 366

 

 

 

제인 오스틴이 이 작품에 대해 '<오만과 편견>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이 작품이 재기에서 떨어진다고 볼 것이고, <맨스필드 파크>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이 작품이 양식에서 떨어진다고 볼 것이다.'라고 말했고 주인공 에마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은 좋아하지만 독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하지만 오스틴의 말과는 다르게 에마 역시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지요.

 

요즘 사람들은 힘들 때, 에세이나 자기 계발서적을 찾곤 하죠.

거기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데, 전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읽어보라고 추천해주고 싶어요.

저도 아직 <오만과 편견>과 <에마> 두 작품밖에 접해보지 못했지만, 이 두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인간관계나 사랑하는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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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책이다 - 시간과 연민, 사랑에 대하여 이동진과 함께 읽는 책들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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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모든 한정은 부정이다"라고 했지요. 사랑하기 위한 조건을 줄줄이 내걸고 나서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생활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책을 정말 사랑한다면 문자의 형태로 책에 박혀 있는 지식이나 서사뿐만이 아니라, 책에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책에 담긴 이야기, 책에 서린 정신, 책에서 나는 냄새, 책을 어루만질 때의 감촉, 책을 파는 공간, 책을 읽는 시간 등이 모두 모이고 모여 책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낸다는 것이지요.

저는 목적지향적인 독서를 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특정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어떤 책을 선택해서 파고들지는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제게 책읽기는 그저 습관입니다. 과거에 그래왔고 현재에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 미래에도 저는 관성적으로 책을 읽겠지요.

그렇게 사랑에 습관이 더해질 때, 마침내 책은 제게 말을 걸어옵니다. 책읽기는 제게 오락이고 영감이면서 시간을 배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중략)

 

제게 밤은 한 권의 거대한 책입니다. 곧 밝아올 새벽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짙은 어둠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 같은 오전 세 시.

고요한 한밤의 서재에서 여러 권의 책을 뒤적이며 읽다가, 계속 미루기만 했던 이 서문을 씁니다. 책은 한 사람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가장 내밀하게 이어지는 통로이겠지요.

저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투영된 책들을 보다가 멈추어 고개를 드는 순간 제게로 변형된 채 틈입해 들어오던 그 깊은 밤의 상념들을 이제 당신에게 보냅니다.

이 책을 읽다가 당신도, 문득, 수시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밤은 책이다> 프롤로그 중 





열정락서를 통해 이동진 기자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평소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통해 기자님의 목소리를 들어오면서 목소리나 말투가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저도 그 매력에 빠져버렸지요)

강연을 통해 들어보니 역시나, 제 기대 이상으로 기자님의 많은 매력을 느끼고 돌아왔었지요.

 

 

취미가 같은 사람에게 끌린다고 하나요? 책도 좋아하시고, 영화도 좋아하시는 기자님한테 푹 빠져서

기자님이 다른 책인 <길에서 어렴풋이 꿈을 꾸다>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어요. 이 책은 기자님이 영화 촬영지에 직접 갔던 여행기를 쓴 책이었는데

제가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내용은 도무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서 '이 책에 나오는 영화 다 보고나서 읽어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책을 덮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읽은 <밤은 책이다>라는 책도 실은, 기자님이 읽은 책에 대한 글이라 제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공감을 못하면 어떡하지 란 생각에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도, 이 책에 나오는 책들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제 '책  위시리스트'가 늘어났네요!

 

 

전 읽은 책을 이렇게 블로그에 기록해두는 식이지만 제가 책을 읽고 느낀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기자님의 글을 읽으며 제 글이 부끄러워지기도 했어요.



<밤은 책이다>를 읽고 저한테 와닿았던 글들을 소개해드릴게요^^

 

 

 

어쩌면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온 연인들 역시 사랑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과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 사실은 서로 다른 사랑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어떤 사람은 이상적 판타지에 가까운 완전체로서의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할 테고, 어떤 사람은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이 사랑의 전부라고 여기겠지요.

어떤 사람은 사랑이 위장된 성적 욕망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테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랑의 현실적인 기능들이야말로 핵심이라고 볼 겁니다.

비유해서 말한다면, 거대한 집합 같은 사랑이라는 관념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원소들만을 모아서 부분집합을 만들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원소들을 배제함으로써

여집합을 구성한 뒤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서로 다른 원소들로 채운 각자의 사랑의 집합을 염두에 두고서 상대의 사랑을 재단하기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할까요. 연인들에게 현실적으로 허용된 것은 오로지 공통된 원소만으로 짐작되는 교집합으로서의 사랑밖에는 없는데 말이지요. -p, 35,36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 결국 마음에 남는 것은 마지막 모습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했던 행동,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나누었던 말들이 긴 시간 동안 마음의 우물에서 계속 울려대는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마지막을 통과하고 있는 그때, 우리는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감사와 사랑의 말이 있다면, 가능한 한 매순간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끝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게 끝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존재니까요. -p, 60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순간도 그냥 허송하는 시간만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놓은 넋, 어디 가지 않거든요.

영혼 역시 좀 쉬기도 하고 산책도 다니고 그래야지요. 그나마 넋을 놓고 지낼 수 있는 일요일 오후 같은 시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몸뿐만 아니라 정신 역시 자주 쉬어주어야 할 겁니다.

티베트 속담에 그런 게 있다지요.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 안 될 문제라면 걱정해도 소용없다. 네. 그렇다네요! -p, 112

 

 

예전에 책을 낸 뒤 했던 어느 인터뷰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물음에 저는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살고 싶다"고

대답했지요. 그때는 농담처럼 했던 말이었는데, 돌이켜보면 정말 잘한 대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삶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일에는 명백한 시한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주어진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되, 내가 전력을 기울여오던 일이 어느 순간 벽에 부딪치게 되면 미련 없이 손에서 놓아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태도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포기란 부조리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 조금 덜 불행해질 수 있는 유효한 기술인지도 모릅니다. -p, 148

 

 

누군가의 흔한 권태가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가 된다면, 그게 죄가 아니라고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p, 268

 

 

 

요즘은 이렇게 자기가 읽은 책을 묶어 소개하는 형식의 에세이가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런 에세이를 읽다보면, 내가 읽었던 책을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읽었구나. 하는 생각과 제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죠.

저도 언젠간 제가 읽은 책을 이렇게 모아 책 한 권 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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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새
에쿠니 가오리 지음 / 문일출판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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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마시는 '차'라고 하는 건 바로 물이다. 나는 내가 마실 뜨거운 홍차를 끓이고 녀석한테 줄 컵에는 찬물을 가득 채웠다.

녀석은 물밖에 안 마시는 주제에 내가 마시는 것하고 똑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내가 커피를 마실 때면 녀석의 물은 커피가 되는 거고,

내가 와인을 마실 때면 녀석의 물은 와인이 되는 것이다. 

조용한 밤이었다. 간간이 주방 히터에서 들려오는 딱, 딱 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거야?" 녀석이 진지한 얼굴로 물어왔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래?"하고 말하면서 녀석은 멍하니 창 밖을 보았다.

"너는?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거야?"

"으응"

창 밖을 바라본 채로 녀석은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내가 모르는 전혀 다른 녀석의 모습이었다. -p, 94

 



제 블로그를 오래 봐오신 분들이라면 제가 에쿠니 가오리를 좋아한다는 걸 아실텐데요,

그래서 에쿠니의 책은 한 권도 빠짐없이 다 읽어야지 하는 소위 '전작주의'를 해보려했지만 손에 안잡히는 두 권의 책이 있었어요. 그 중 한 권이 바로 이 '나의 작은 새' 입니다. 출판된지 10년도 더 된 책이라 에쿠니의 감성이 덜해 읽고 실망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까요? 하지만 그런 걱정을 했던 절 비웃기라도 하듯, 이 책에서도 역시나 에쿠니의 감성이 가득가득했어요.

 

오래된 책이라 소담출판사에서 예쁜 표지와 함께 다시 책이 출판됐다고 하는데, 전 도서관에서 빌려봐서 1999년도 문일출판사에서 출판된 책으로 읽었답니다. 소장은 소담에서 나온 책으로 해야겠어요 :) 목요일에 서울 갈 일이 있어서 버스타고 가는 도중에 읽으려고 챙겨갔는데 (책이 얇고 가볍거든요!!) 1시간도 안되서 다읽어서 나머지 2시간은 멍때렸지요.... 그만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어요.

 

겨울이 배경인 책이라 '겨울동화'같다는 평을 많이 들었는데, 정말 이 책과 딱 어울리는 말인 것 같아요. 겨울에 갑자기 날아온 새와 동거를 하게 되는 내용이라니, 그것도 끝말잇기를 좋아하고 가끔은 질투도하고 럼주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좋아라하는 새라니, 읽는 내내 이런 새와 겨울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네요.

 

 

딱 한 번, 녀석에게 여자 친구 험담을 한 적이 있다.

낮에 내가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이 원인이 되어 그녀하고 싸우고 말았다. 

그리고 저녁때까지 내내 상처받은 기분으로 있었던 것이다.

"걘 좀 획일적인 구석이 있어." 내가 말했다.

"꼽사나운 노처녀의 기질이 철철 넘친다니까." 이런 말에 녀석은 한바탕 깔깔대며 웃더니, 예리한 어조로 "그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

자못 비난이라도 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입을 다물었을 때, 시시하고 재미없다는 듯, "뭐야, 벌써 끝났어?" 하는 것이다. -p, 62

 

 

"나, 있지. 오늘 하루 종일 스케이트 연습했었어." 

목욕을 마치고 침실에서 잠옷을 입고 있는 나한테 와서 녀석이 말을 걸었다.

"꽤 탈 수 있게 된 것 같아."

"거 반가운 얘기네."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온 몸이 깨끗하고 홀가분해서 시원한 것이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었다.

"근데, 연습이라니? 어떻게 연습했어?"

커다란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내면서 물었더니, 

"어떻게 하긴. 머리 속에서 했지." 녀석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연습은 머리 속에서 하는 게 제일이야."

이불을 들춰 줬더니 바구니  안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가 누우면서 녀석이 말했다.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잖아."

스탠드를 켜고 나도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잘 자라, 짹짹이." 책을 펴면서 말했다. 내가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좀처럼 잠을 잘 수 없다고 녀석은 이따금씩 말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읽지 않아도 꼭 책을 펴 든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것이다. 몇 분이 지난 후에 희미하긴 하지만 규칙적이고 앙증맞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p, 8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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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스텝 & 트위스트 - 줄을 서서 기다리게 만드는 히트상품과 서비스의 비밀
제임스 가드너 지음, 정재완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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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시리즈>는 어떻게 작가 롤링과 출판사에게 돈을 찍어내는 기계가 되었을까? 물론 책이 잘 팔린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에따른 연계 상품들의 생태계 때문이었다. 영화, 장난감과 게임, 장식용품, 포스터, 그 외의 것들이 책의 수요와 독자를 경이적으로 창출해냈다. 그렇다면 왜 일부 판타지 서적들만 그렇게 많은 수요를 만들어낼까? 유독 페이스북만 인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둘 다 더 좋아지고 개선되어 더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최근 10여 년 동안 보아온 수많은 상품의 카테고리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성공의 핵심 열쇠는 다음과 같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사이드스텝 & 트위스트'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소비가 늘어나면서 상품의 판매가 점점 향상되도록 하는 전략이다. -p, 20



경영, 마케팅에 관심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배워본 적은 없는지라 이 책을 읽는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여러 예를 통해 사이드 스텝과 트위스트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네요.

여기서 말하는 사이드 스텝은 이미 성공한 상품을 약간 병형하는 원리이고, 트위스트는 최고의 상품을 생산하려하지 말고, 최고의 (그리고 최대한의)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한번 쯤은 궁금증을 가져볼 만한 주제이기에 다른 분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거에요.

 

 

 

예전에는 그 분야에 처음 등장한 상품들이 역사를 써나갔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보다 좋게 만들어준 대가가 그 주인공들에게 돌아간 경우는 정작 드물다. 20세기의 '10대 과학적 성과'를 보면, 자신의 아이디어로 부자가 된 천재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오히려 개발자들이 진보의 열매를 수확하고 경제적으로 큰 보상을 받은 경우가 많다. -p, 22

 

 

 

전공이 영문학이다보니 문학을 배우면서 이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요, 작가가 작품을 썼을 땐 그 작품이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 작품이 관심을 받게 되어 영화, 드라마 등으로 제작이 되어 그 제작자가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경우와 비슷하죠. 바로 이런 게 이 책의 저자 제임스 가드너가 말하는 '사이드스텝 & 트위스트'의 다른 예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의 소비자는 정보의 희소성에 익숙하지도,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디지털 상품이나 서비스들은 수익을 남기지 않는 구조 내에서 유통된다. 구글 등을 통해 누구에게나 제공되는 색인 데이터(Indexed Data) 때문에, 특허의 법마을 피해갈 방법을 찾기가 매우 쉬워졌다.

 

영업 비밀조차도 종종 비밀 파헤치기를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밝혀지기도 한다. 일례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영업 비밀 중의 하나인 코카콜라의 시럽 제조법을 들어 보자. 코카콜라의 시럽은 자격을 가진 탄산음료 제조업자들에게 판매되는데, 회사 내에서도 소수의 중역들만 그 제조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코카콜라 사에서는 이 정보를 너무나 귀중히 여겨, 법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두 차례 이상 공개를 거부한 바 있다.

 

2001년, 캐나다의 한 작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소스 코드를 공개해 누구나 특별한 제한 없이 그 코드를 보고 사용할 수 있는 오픈소스 라이선스를 만족하는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자신들의 프로그래밍 기술이 어떻게 시장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증명하기 위해 실험을 했다. 그 방법으로, 극비인 콜라 제조법 복제를 선택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잇따라 시도된 제조법을 인터넷에 올렸다. 각각의 제조법에 따라 만들어진 콜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음을 거쳐, 사람들이 제안한 개선방안을 적용하여 새로운 버전으로 계속 재탄생했다. -p, 84~85

 

 


페이스북, 구글,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의 성공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읽어보셔요,

전 이 책을 읽고 특허 제품을 유심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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