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태릉선수촌. 오후훈련을 마친 선수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숙소로 향한다. 레슬링 선수들도 하나 둘씩 연습장을 빠져 나온다. 얼굴에는 힘든 기색이 역력하지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어느새 텅 비어버린 레슬링 연습장. 선수들은 모두 가버렸지만 열기는 채 식지 않은 듯 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뜨거운 기운이 훅 끼쳐왔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매트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 붓고 있는 레슬러, 문의제(자유형 84kg급)를 만났다.

♦ '시드니의 한' 꼭 푼다

'승자는 넘어지면 일어나 앞을 보고, 패자는 뒤를 본다'. 시드니 올림픽 레슬링(자유형 76kg급) 은메달리스트 문의제를 보면 이 말이 떠오른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은 '악몽'이었다. 알렉산더 레이폴트(독일)와의 준결승에서 종료 1초를 남겨놓고 뼈아픈 역전패를 당한 것. "아쉬워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게임이었어요". 문의제는 상대선수의 벌점으로 1-0으로 앞서나갔다. 남은 시간 10초. 승리가 눈 앞에 아른아른 거렸다. '이겼구나' 싶었다. 순간 무아지경에 빠졌다. 하지만 섣불리 공격하다 3점을 내주고 말았다. 경기는 그대로 끝이 났다.

"제 실수였죠". 잠깐의 방심이 화를 불러일으켰다. 땅을 치며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얼마 후 약물복용 사실이 발각된 레이폴트는 금메달을 박탈당했고, 문의제는 동메달에서 은메달로 격상됐다. 그래서 더 아쉽지 않았을까. "오히려 복이죠. 덕분에 한 단계 올라갔으니까요. 그 선수가 약물을 했든 안 했든 이길 수 없는 경기를 못 이겨서 아쉽죠". 그 누구를 탓하랴.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문의제에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팔팔한 20대 청년이었던 그는 어느덧 30줄에 들어섰다. 국가대표 8년차 베테랑으로, 김인섭(그레꼬로만형 66kg급)과 함께 대표팀 최고참이 됐다. 그 사이 결혼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굳건해졌다. 바로 올림픽 금메달을 염원하는 마음. "금메달은 천운이라고 하죠. 꼭 따보고 싶어요". 그의 표정에서는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혹시 주위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은 없을까. "부담감이 있긴 하지만 제가 아니면 딴 선수는 금메달을 못 딴다는 생각을 갖고 훈련하고 있어요". 그의 말투에서는 자신감이 뚝뚝 묻어났다. 아울러 문의제는 "84년 L.A올림픽부터 이어져온 레슬링 금맥을 잇고 싶다"는 소망도 피력했다.

♦ 가족사진 세리머니, 기대하세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문의제는 당시 감기몸살로 컨디션이 영 꽝이었다. 마고메드(카자흐스탄)와의 자유형 84kg급 결승전에서도 힘겨운 승부를 벌였다. 1회전에서 0-2로 끌려가던 그는 2회전에서 가까스로 1점을 만회해 연장전에 돌입했다. 이미 체력은 바닥난 상태. 하지만 문의제의 막판 투혼이 빛을 발했다. 그는 2점을 내리 따내며 극적인 승리를 일궈냈다. 98년 방콕대회에 이어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제가 0-2로 지다가 3-2로 역전승한 건 아들(유빈) 덕분이었어요". 문의제는 13일 전 태어난 아들에게 꼭 금메달을 선물하고 싶었단다. 아들과의 '금메달 약속'이 그에게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쏙 빼닮은 아들에게 또 한 가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주었다. 시상대 위에서 금메달과 함께 아들의 사진을 목에 거는 감동적인 세리머니를 보여줬던 것. "결승까지 올라갔는데 아무 것도 안 하면 섭하잖아요. 물리치료사한테 금메달 따면 사진 갖고 오라고 했죠”.(웃음) 아들을 사랑하는 아빠의 마음이 듬뿍 담긴 세리머니. 안정환의 '반지 세리머니', 이천수의 '속옷 세리머니'보다 훨씬 멋지지 않은가. 물론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준비하고 있는 세리머니가 있다. "그때는 아들 사진만 걸어서 아쉬움이 남았어요. 이번에는 가족사진 붙이고 시상대에 서고 싶어요". 이번엔 업그레이드 판인 셈. 아테네에서 '문의제표 세리머니'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길.

♦ 아내에게..

나답지 않게 무슨 편지냐구? 요즘엔 외박이 없어서 집에도 자주 못 가고 겨우 전화통화만 하잖아. 그래서 글로나마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정미야, 너한테 항상 미안하고 고맙고 그래. 우리가 결혼한 지 회수로 벌써 4년 째잖아. 근데 만날 연습이다 시합이다 뭐다 해서 같이 지낸 시간은 2~3개월도 안 되는 것 같다. 주말에 와도 '힘들다'는 핑계로 잘 해주지도 못하구. 유빈이 임신했을 때도 어리광 한 번 못 부렸잖아. 내색은 안 해도 많이 서운했지?

정미야, 그동안 꾹 참고 기다려준 거 언제나 고맙게 생각해. 늘 바쁜 남편 때문에 결혼생활도 제대로 못 즐겼는데, 오히려 나한테 힘이 되어주는 말만 해줘서 말이야. 네가 나한테 항상 해주는 말이 있지. '세 끼 똑같이 먹고, 체중도 같고, 모든 조건이 비슷한데 질 이유가 어디 있냐'고. '우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라.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그럼 꼭 금메달 딸 수 있을 거'라고.(가만 보면 나보다 더 터프하다니깐.^^)

올림픽 끝나면 그동안 못 해줬던 거 다 해줄게. 제주도로 '리허니문' 가고 싶다고 했지. 예전에 우리가 신혼여행 갔을 때 거닐었던 곳 다시 거닐고, 먹었던 곳에서 다시 먹고, 묵었던 호텔에서 다시 묵고.. 다시 가도 그때 기분 날 거야. 그치? 근데 유빈이도 데려가야 하나.^^

♦ 프로필

생년월일: 1975년 2월 10일 신장,몸무게: 178cm, 89kg 국가대표 경력: 97년 2월부터 현재까지 주요대회 경력: 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98년 세계선수권 은메달,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은메달 2001년 세계선수권 은메달,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가족관계: 3형제 중 막내, 아내(김정미), 아들(유빈) 종교: 불교 별명: 낙지대갈빡 취미: 여행, 맛집 찾아다니기 징크스: 시합 다가오면 게임(당구, 볼링)을 안 한다. 게임에서 이기면 기를 빼앗기는 느낌이 들어 일부러 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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