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무리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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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름다운 마무리

 

친구와의 대화속에 각자의 주된 관심사가 다르기에 상대를 봐주는 모양없이 말이 오갔다.
말이 오가지만 상대의 말에 대답은 없다. 서로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도 있고 대답 안하는게 곤란을 피하는 길이기도 허다.
그러면 '그러려니...' 친구의 애써피함에.. 또 어려운.... 나에게 어려운 고민을 친구에게 던졌던거구나 싶어 얼른 친구가 답(?)한 다른 화두에 대답하곤 한다. 

넋두리하듯 대화(?)하고 나면 그렇게 내가 수다스러울 수가 없다.
그저 조용히 홀로 침잠할 걸... 하는 생각에 곧 책을 펴들게 된다.
그러기에 더 없이 좋은 대화상대는 법정스님의 책이다. 
훌훌 털어내듯 
한 마디 한 단락 한 페이지 한 권은 그렇게 길을 내어준다.
조용히 읽으며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지극히 세속적이며 수다스러웠던 나에게 지긋이 답과 조언을 해주는듯하다.
'그래.. 그래서 책이야..' 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도록...
아마도 법정스님의 책은 책을 통해서 가장 내면의 깊은 '나'를 만나게 해주는 책 중의 책이 아닐까 싶다.책을 읽고 있지만, 책의 말씀도 깊지만 순간 순간 읽고 있는 중간 내가 나를 향해 순례를 떠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책.
파울로 코엘료가 그런면에서 대가인데... 이 책을 읽는 중간 [순례자]가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다분히 개인적인 책읽기이기에 그렇지만.. 요번 내 경우엔 그랬었다.

'그곳을 알기 위해서 그곳에 가야 하는 것.' 154쪽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은 진리다. 잊기 쉽고, 쉽게 안다 말한다.

 '좋은 말씀을 찾아'라는 꼭지글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 내심 찔리기도 했는데..
이유인즉슨, 좋은 말씀을 찾아 강연들으러 다니길 좋아하지만 번번히 잊고 살기 바쁘다. 

'천지 만물이 그때 그곳에서 좋은 가르침을 펼쳐 보이고 있지 않은가.' 175쪽 라며 순간을 살라 말하는 법정스님

 말씀(가르침)이란 그렇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삶에 이어지지 않으면 말이란 공허하다. 
자기 체험이 없는 말에 메아리가 없듯이 그 어떤 가르침도 일상적으로 생활화되지 않는다면 무익하다. 176쪽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한다. 
좋은 친구란 주고받는 말이 없어도 마음이 편하고 투명하고 느긋하고 향기로운 사이다.
그 밖에 또 무엇을 찾는다면 그것은 헛된 욕심이고 부질없는 탐욕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좋은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서 있는 바로 지금 그 곳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고 있다면, 그 자리에 좋은 말씀이 살아 숨쉰다.
명심하라. 176-177

 끝말의 '명심하라'가 푸욱 찌른다. 마치 그날 읽고 있던 그 당일날 나를 두고 말하는듯하여 심히 찌르르했다.
요즘은 사람들이 너나없이 너무 바쁘다. 다들 너무 바쁘긴 한데, 정신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함께 하진 않는것 같다. 
다들 정신없다고 하니 말이다. 나부터도 상대의 시간과 의중을 묻고 대화를 시작하지만 내 심중은 결국 내말을 하고자 함이지 상대를 듣고자 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 실망을 하고 대화가 뚝 뚝 곧잘 단절되는 거였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순간의 소중함을 안다면 그렇게 대화하지 않았을텐데 싶으면서 실망하지 않았을텐데 싶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같은 하늘아래 없는 친구가 있다. 
짐정리를 하다가 그 친구와 주고받았던 엽서를 최근에 다시 읽게 되었는데, 그 순간 엄청나게 명치끝이 따끔하게 아파왔다. 
정말이지 찔끔한다는 것은 실제로 적용되는 구나 싶었던 순간이었다. 자주 연락을 못 주고받으니 손글씨로 쓴 편지를 주고받자는 것이다. 긴 편지는 부담스럽긴 매한가지이니 엽서로 하자고 말이다. 종이 한켠. 그게 어디 어렵던가 말이다. 그런데 어려웠다.
날아온 엽서에 서로 간간히 주고 받던 엽서가 내가 부치지 못한 엽서가 두 장이나 같이 있었던 것이다.
한 장을 써놓고 미쳐 못 부치고 세월을 흘려보낸 엽서가 한 장, 그리고 그 이후에 그걸 한 번 더 발견하고 나서 쓴 또 한 장의 엽서. 
그런데 그 두 장이 전부 내게 있다. 그 친구가 떠난지도 한 참후인데도 말이다.
내용 또한 그랬다. 오늘의 내가 친구와 나눈 대화에서 느꼈던 것처럼....
말을 걸고.. 서로 바쁜듯한 움직임이 서로에게 있고, 더이상 대화는 대화로 오고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대화답지 않은 안부만, 물음만 던지다가 결국 대화창은 닫히는 것이다. 
그러한 내용의 엽서. 
그런데도 아직 나는 정신이 맑게 깨어있지 못했던지 그날 또 잊고선 그러고 대화를 나눴던 것.
그리고 그 친구처럼 느꼈던 것. 
지나고 나서 책을 읽다가 불현듯. 아차, 싶은 거다. 
순간을 살라.. 는 말을 곱씹게 된다.
자꾸 마지막즈음에 나눴던 대화들이 떠오르기때문에 후회가 동시에 같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이 책 읽기에 양서읽기를 강하게 말씀하신다. 
나 또한 실감하는 순간이다. 사람에게 끈을 놓지 않게 해주는, 희망을 갖게 해주는 책이 있는 반면,
무서운 결단을 내리게 하는 책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 또한 받아들이는 사람의 주변환경 탓일 수도 있지만 무서운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테레사효과'라고 있다고 한다. 
테레사 수녀의 선행같은 행동을 보거나 단지 글을 통해 읽는 것 만으로도 체내의 면역력이 증가된다는 것.
마지막 대화로 기억되는 것도 책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때 읽고 있었던 것은 살인을 주제로 펼치는 추리소설. 
책명을 밝히고 싶지도 않고 나 또한 아직 안 읽어봤다. 유혹은 느꼈다. 하지만 어느정도는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에 무서운 생각이 든 건 사실이다. 아마도 내용이 사람의 영혼을 맑히는 책이었다면 그런 결단을 내리게까지 되진 않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물론 나에게도 순간을 사는 최선을 보였더라면 친구에게 그런 친구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영혼을 맑히는 책을 많이 권했더라면, 혹은 순간 순간을 소중하게 진심으로 대화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더라면 아마도 어려운 결단을 내릴 때 곁에 아무도 없는 친구로 만들진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본다.

책와 버렸지만,
그때 그때의 내 생각의 움직임을 밝혀놓지 않으면 금방 금방 나의 하루 하루들이 무미하고 기록없이 흘러가 버리는 듯 하여 세세히 생각의 흐름대로 걸어와 버렸다.

아름다운 마무리.
그건 시작할 때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려고 생각되어지는 이름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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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키우는 사계절 야생화
김필봉 지음 / 학마을B&M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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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 있는 야생화 집에서 키우려면...


내가 야생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대학교 1학년 때 휴학을 하고 국유림관리소에서 일할 때였다. 그 당시 우리 관리소에서 ‘우리들꽃보기’행사를 벌인적이 있는데 그 행사장 가리왕산에서 투명하고 맑게 노오란 “괭이눈”을 처음 봤었다. 그냥 녹색풀들이 군락을 이루며 산바닥에 쫘악 깔려있는데 그냥 걷다보니 그냥 녹색풀이 아니었던 것. 그래서 좀 더 고개를 숙여보니 네모네모난 투명한 노란꽃이 잎과 하나인 듯 그라데이션을 이루며 맑게 피어있는데 그 오묘한 색감이 햇살과 어우러져 있던 모습이란...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 곳엔 현호색, 얼레지, 바람꽃류 등 많은 야생화들도 눈에 들어왔지만 내 눈엔 그 괭이눈이 단연 1위이다. 아직까지도. 하지만, 이렇게 야생에서, 높은 산자락에 자라는 야생화를 집에서 가까이 두고 보며 기를 순 없을까? 하고 사람인지라 욕심이 생겨버리고 만다. 산자락에 있으니 잘 볼 수 없다는 욕심이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게 했다. 그러면서 여러해를 보내는데 집으로 올라가는 마을 입구 이발소집 마당에 괭이눈을 소담하게 자라있는게 아닌가? 그리고는 다음해부턴 이른봄에 다시 고향을 찾는 일이 없어서일까? 괭이눈이 있던 자리에 눈길을 돌려보지만 보질 못했다.  

 

  

야생화는 왜 키우기 어려울까? 그 이유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고 아니면 상상하기 어렵다면 이 책을 통해 이유를 알아봐도 좋을 것이다. 일단, 집안의 환경과 야생의 비바람 과 차가움, 뜨거운 햇살, 혹은 습한 토지와 나무그늘.. 그 모든 것을 집안에서 같은 조건으로 충족시켜주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야생화는 강한 자생력을, 혹은 금방 시들해지고 죽어버리는 결과를 동시에 주기도 하는 털털하면서도 예민한 아이인 것. 그래서 이 책은 각 야생화별로, 계절별로, 꽃피는 시기별로 해서 잘 설명해 놓아 분갈이와 관리요령에 대해 꼼꼼히 배울 수 있어 좋다. 물론 한 권을 다 읽는다고 해서 그 많은 야생화들이 전부 기억나고 관리요령이 한번에 다 숙지되는게 아니기에 읽고 반납기일에 반납은 하지만 나중에 내가 기를 수 있는 환경에 온다면 아마도 이 책을 사야지 싶다. 두고 두고 보면서 길러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야생화의 매력은 담는 그릇이 투박하면 투박할수록, 소담하면 소담할수록 그 맛을 잘 살려내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한 달 전, 강원도립화목원에서 산의날을 맞아 행사를 벌여 놀러갔다 왔는데 그곳에서 ‘춘천우리꽃사랑’동호회 사람들이 잘 가꾸어온 야생화들을 한자리에 펼쳐놓은 것을 구경했는데 그 귀여움과 소박하면서도 화려한 그 본연의 꽃모습이란.... 감탄이 절로 나오고 나도 방 곳곳에, 혹은 야외에 그렇게 키워보고 싶은 욕구가 마구마구 솟아올랐다. 그날 처음 본 대문자초. 이름과 걸맞게 大문자로 생겼지만 그 모습은 어찌나 小담한지 그 귀여움에 사진 셔터를 계속 눌러댔고... 그 외에 눈도장으로 얼마나 가까이서 보고 찍었는지 모른다. 야생화덩굴부터 흔하디흔한 벌개미취까지도 그곳에선 다 이쁘고 화려했다.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어렸을 때 봤던 야생화가 가끔씩 보고 싶고 떠오른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보이지 않는 야생화가 많다. 아마도 저 깊은 산중에 숨어 있거나 관심밖으로 밀려나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를 일. 지금도 그리운 꽃은 논 옆으로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안개꽃처럼 뽀얗게 피어나던 그 꽃이 가끔 보고 싶다. 어렸을 때 난 그 꽃이 너무 예뻐서 늘 안개꽃다발로 만들곤 했는데 어버이날 카네이션보다 그걸 다발로 묶어서 드리곤 했었다. 하지만 그 꽃 이름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습기가 많은(뿌리가 늘 물 속에서 향해 있었다고 할 정도로) 논두렁이나 실개천가에 피었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학년이 올라갈 수록 어버이날엔 가까이에 피어있던 야생화로 꽃을 선물하기보담 가게에서 파는 카네이션으로 대신하였다.

이렇게 자연에서도 잘 사라지는 야생화. 더욱 오래두고 보려면 우리의 관심뿐일 것이다. 자신의 자생력 또한 중요하겠지만 그 야생화가 살고 싶어하는 환경을 우리네는 어느새 야금야금 좁혀 그 아이를 이 세상에서 내쳤을지 모른다.

 

화서역에서 나오면 농진청으로가는 길이 있다. 옆엔 풀밭이 가득했고 새가 날아올랐던 모습이 기억났다. 그리고 잊혀졌던 개미딸기부터 시작해 여러 들풀들이 있어서 신기하게 바라보며 들어갔던 기억이 나는데 요 며칠전에 가보니 그곳은 수자원생태공원이 한창 건설중이었다. 그리고 사라진 들판 옆 공사를 가리는 판 위에 살포시 앉아 까악깍 울고 있는 까치를 여러번 보았다. 친구를 만나러 그 곳을 자주 지나게 되는데 어차피 사라진 생태. 다시 지어지는 공원 속에서 많은 나무와 꽃들에 보금자리를 찾아 내려왔으면 싶다. 요즘은 사람이 자연과 가까워지기 보다 자연이 사람과 가까워지기로 한듯하다. 다가오는 것이 위험에 빠질까봐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 같다. 같이 살기로 작정한 새들처럼, 자연처럼 사람 몸에 붙고 가까이 다가오면 묘한 감정이 인다. 여름날 내 몸에 두세 마리씩 달라붙어 놀던 잠자리들도 기억나고....

이젠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는 자연을 어떻게 친구를 맺어야 상처를 덜 받을지도 늘 고심하며 살아야 할 듯 싶다. 

 



<너무나도 이쁜 금괭이눈^^  출처 : http://cafe.naver.com/jaoll/9469, 촬영 : 허브(ko1091)님> 허브님 사진사용 허락 감사드립니다..^^

 

아, 그리고 덧붙이는 말!

이책엔 금괭이눈에 대한 자료는 없습니다. 오해마셔요~;; 저도 그게 제일 아쉬웠어요.^^;

하지만 많은 수종의 야생화와 기르는 방법 등이 나와있습니다. ^^ 참고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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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밥상 - 유기농 대표농부 10집의 밥상을 찾아서
안혜령 지음, 김성철 사진 / 소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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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밥이 뭔가.

 

'삐알', '분추' 등등 엔간해서는 도시 사람들이 잘 못알아듣는 시골말들이 이 책에선 종종 나온다.

나는 강원도 촌에서 자란 아이라 그런지 이런 단어가 무시로 등장하는 이 책이 얼마나 웃겼고 반가웠는지 모른다. '삐알'은 비탈을 가르킬 때 하는 말이고.. '분추'는 초등학교 내내 그렇게 알고 지냈던 '부추'의 다른 말이다. 학년이 올라가고 다른 아이들과도 만나고 TV도 보면서 '부추'라고 불러야 함을 알았다. 하지만 우리네 식구들과의 대화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친구들은 우리식구끼리만 하는 말이 좀 많다는 말을 하긴 했었다.ㅋㅋ 그러면 그냥 나는 고개만 갸우뚱 거리고 넘어갈 뿐 큰 어려움은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크면서 나도 그 말을 안쓰게 되고 혹은 엄마 아빠한테 표준어 쓰기를 강요하기도 하는 딸이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로 우리를 키워준 것이 감사하기도 하고 재미있기까지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엄마 아빠가 더욱 생각나게 했기 때문에....  그리고 결혼 8년차가 된 형부도 이제는 별 통역없이 우리엄마의 말을 잘 알아듣는다.ㅋㅋ

 

암튼,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말부터가 구수한 단어와 달콩달콩한 요리말들을 입에 올리며 우리네 밥상 이야기를 차려낸다. 시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먹거리를 취재, 연재했던 글들을 한데 모아 엮어낸 것이다. 표지사진에서부터 느껴지지 않는가. 저 소박하고 깔꼼한 밥상을. 속에서도 쌓여 속을 부대낄일 절대 없을 것 같은 밥상. 자연그대로 소화되어 그대로 공중분해 될 것 같은 그런 밥상이다.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먹거리를 키워주는 농부들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키워내나. 과연 안전한가.

그런 밥상을 늘 무시로 대하고 먹는 농부들의 생각과 일상이 어떤지 이 책을 통해 들여다 보기에 더 없이 좋았던 책. 이 농부들과 같은 맘으로 자식키워내듯이 농사일 하시는 분들도 많을 테고 아닌 분들도 계실터이다. 그러나 일단 여기에 실린 농부맘 같은 사람들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네 먹거리는 정말 청정 그 자체일텐데...

 

얼마전 읽은 만화책 [리틀 포레스트], 세미콜론에서 한 주인공이 말한 게 생각난다.

"난 말야. 타인에게 죽여 달라고 하고는 죽이는 법에 불평하는 그런 인생 보내기가 싫어졌어."

 

이들은 온전히 자신이 살아온 삶으로 말하시는 분들이기에 우리가 더욱 가타부타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네 먹거리를 책임지고 바지런히 움직이시고 자연을 지킨다는 개념도 아닌, 그저 함께 그 속에 같이 사는 삶. 소박해지는 것이 아닌 그런 자연 모습 그대로를 닮다보니 그렇게 사시는 분들.

그리고 또 저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생각과 방식대로 살고 몸으로 보여주시는 분들.

그 따스함이 가을철 햇살 못지 않으시다.

 

경북 울진에 사시는 "신바람농법"으로 지으시는 한 부부는 천둥번개가 치자 진딧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착안하여 그렇게 농사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신바람농법"이 무엇이냐면 그런 소리에 진딧물이 떨어지니 신기하여 자세히 관찰한 결과 실제로도 진딧물이 다른 밭작물보다 없고 잘 자라 징과 꽹가리 등으로 신명나게 그 농작물과 놀아주며 농사를 짓게 된 것.

 

그리고 유기농을 고집하는 농부들의 한결같은 말은 결국 이거다.

"화학농업은 땅도 죽고, 사람도 죽는 살생농업"이기 때문이란다. 이말도 허투루 그냥 생각으로 하시는 법이 없으시다. 다 다년간의 관행농과 유기농을 다 겪어보시고 나오신 말이시니.. 우리가 어찌 유기농에 대한 비판의 말을 들을세가 있겠는가. 몇 십년씩의 결과물과 삶으로 말씀하시는 말일진데 어찌 연구소 안에서 몇 년만에 나온 데이터와 자료들로 나온 말과 비슷하다 비기겠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속세를 끊고 자기자신만의 고집만으로 세상을 사는 농부도 아니다.

 

자연과 인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좀 더 자연스럽고 좀 덜 인위적인 삶"을 궁리하되, "인위도 하나의 자연계이자 그 일부"라고 보기 때문에 야마기시즘 농법에서는 과학 기술을 활용한다. ....... 식성이 같을 수 없듯이 사람마다 남들과는 다른 개성이 있는 까닭에 상안마을에서는 무엇보다 이 다름을 인정한다. 나아가 "다른 것이 원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p.112

 

다른 것이 원칙일지도 모른다.. 며 심히 고심하며 사는 삶. 그 속에서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고 고민하고 균형있게 조화롭게 살고자 하는 삶. 멋스럽지 않은가. 아직 나는 내 삶으로 말할 수 있는 여지가 터럭 한 올만큼도 없다. 이 글 읽고 저 글 읽고 이말에서 저말로 옮기는 작업만 해대는, 말 그대로 천박한 멍청이라고 하기엔 좀 가슴아프지만, 그 만화속 주인공이 던지는 말이 내게 던지는 말 같아 따끔거렸던 기억이 새삼 자꾸 떠오르게 했던 책. 모 개그프로그램에서 장난처럼 하는 말. "그렇게 살아봤어요? 살아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라고.... 내가 그렇게 정직하게 살아낼 게 아니라면 다른 잣대로 남을 평할 수도 없지 않을까 싶다. 우리네 밥상 위가 안전치 못하네 어쩌네 하면서 아이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 외려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에겐 어떻게 들렸을까...

 

 

"먹는 법은 사는 법이다." 라 헬렌 니어링이 말했다. 나도 내가 살아온 삶으로 말하는 날이 어여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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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 - 자연결핍 장애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
리처드 루브 지음, 김주희 옮김 / 즐거운상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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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가까워지는 사고갖기

 

자연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먼 거리감을 느끼는 나와 동떨어진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가?

그도 아니면 나의 주변 환경에 늘 그 자리에 있는 존재로, 보호해야 하는 자연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자연과 가까이 가려 할 때 느꼈던 수치심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게 해 준 책이었다. 그간 우리가 어른들에게 받아온 교육은 꽃은 꺽지 않아야 하며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그 해함이 아주 죄악스러운 거며 그 행동은 마냥 훼손의 이미지로만 각인시켜 왔다. 그래서 예쁜 꽃을 보면 다가가 꺽고 싶고 만져보고 싶고 안에 들어 있는 열매도 관찰해보고 싶고 하던 충동은 자연스러운 우리네 본능임에도 불구하고 그건 자연을 해하는 위험하고도 못된 행동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먼발치에서 자연을 바라만 보고 유리안에 갇혀 있는 식물을 육안으로만 봄이 과연 교육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아니, 실질적인 자연에 도움이 될까?

 

무엇인가를 잘 알려면 그 상대와 함께 놀고 가까이 다가가고 만지고 느끼고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체험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그래야 자신 스스로가 그 대상에 대한 관심도 늘고 주체적인 자각이 설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있는자만이 그 대상에 대한 연구를 더욱 실질적으로 행동에 옮길 수도 있고 그 자연물에 대해 더 잘 알 것이다. 잘못된 자연에 대한 인식과 교육은 아이들로하여금 거리를 더욱 멀게 만든다. 자연은 결코 아름다움뿐인 에덴동산도 아니며 그렇다고 징글징글한 정글뿐인 그런 대상도 아니다. 그 모든 걸 다 지닌 하나의 우주다. 그런 우주와의 만남을, 교류를 자주 갖을 수 없는 환경 속에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

 

멸종 위기에 놓인 식물도 아닌데 건드리면 움츠리는 식물(미모사 같은 신경초)을 전시해 놓고 아이들의 고사리같은 손이 닿기도 거절한 이런 문구가 있기 마련이다. "눈으로만 관찰해 주세요." 이런~! 아이들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그 식물을 눈으로만 보고 다른 식물체나 생명이 날아온다하면 어떻게 움츠리는지 알 수 있겠는가? 누가 말해주기 이전에 그러한 사실을 어찌 짐작하겠는가? 그렇다고 그걸 TV화면에서만 보여주면 과연 실질적으로 자기의 손에 닿아 움츠러드는 그 신비스러운 순간의 체험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커다란 유리통 안에 사슴벌레 한 마리만 넣어놓고 제발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봐달라고 말한 문구를 또 봤다. 안타깝다. 잘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그 순간 주변의 아이의 말, "책이랑 똑같네.. 잘 안움직여.." 그 뿐이다. 그러고 지나간다.

 

하지만 어느 화목원은 직접 만져보라고 써 놓기까지 한 걸 보았다. 울타리가 없기에 신기하다(들어가지 못하게 울타리를 쳐놓는게 더욱 당연한 요즘 현실) 싶었는데 다가가 만져보고 식물의 털과 까츨까츨함을 느껴보라고도 했다. 또 같은 사슴벌레인데도 뚤린 통유리안엔 많은 개채수의 사슴벌레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른인 나마저도 신기하게 바라보게 만들었고 작은 꼬마아이가 옆으로 반갑게 다가와 열심히 눈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부모로 보이는 분이 만져봐도 된다고 써 있으니까 만져봐.. 라고 하자 조심스럽게 만진다. 그리고 신기해 하는 그 눈빛. 분명 그 아이가 보고 느낀 사슴벌레에 대한 생각과 관심은 '책이랑 똑같네'라며 시큰둥거리며 지나갔던 아이와 다를 것이다. 직접 자신이 느끼고 본 사슴벌레, 사슴벌레의 색깔, 촉감, 움직임을 기억할 것이다. '책이랑 똑같네'라고 말한 아이는 분명 책에서 나온 그대로의 사슴벌레의 모습과 특성을 기억할 뿐일 것이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관심있게 대상을 생각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자신이 관찰하고 체득한 배움이 있었을까? 자연에 대한 놀라움이라던가 그런게 생길까? 아마도 그건 어려울 것이다. 직접 만져보고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그 아이의 관찰력만이 자신의 관찰에서 온 배움을 얻을 것이다.

 

이는 작은 차이같지만 커다란 차이를 가져오게 할 것이다. 이 책이 가지는 주된 주장도 이것이다.

우리가 지금 행동하고 갖게된 자연에 대한 생각(너무 높게 보는 이상화나 혹은 복잡하고 징그러운 정글스러움이나, 인간 환경 속에서 낯선이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이 정말 자연적인 것인가? 당연한 것인가? 어디로부터 잘못된 인식이 박히게 되었는가? 사회는, 환경은, 자연은 정말 인간만이 일방향으로 보호하고 스스로 주의해야만 하는 공간인가? 생태계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동물일뿐임을, 서로 상호작용으로 살아감을 인식하고 좀 더 자연과 자연적으로 가까워지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고 여러 대안들을 주장한다.

우리가 내걸은 자연보호란 구호는 정말 정당하고 앞으로 먼 미래에도 효율적인 교육인가?

인간의 정신적 건강과 육체적 건강, 환경의 조화는 어떻게 해야 이루어질 것인가 이 책을 필독으로 하여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빌리게 된 책이지만, 생각보다 너무 알차서 서평이 길어지게 되었다. 내가 그간 가졌던 자연을 훼손하는 길인가 하는 수치심은 이 책을 통해 말끔히 해소되었다. 오히려 내가 갖는 자연에 대한 입장과 생각으로 아이들과 함께 할 것이며 체험을 통한 경험이 많아지도록 도울 것이다.

 

우리나라 토종 종자를 찾아내고 보존하고, 실질적으로 자연에서 볼 수 있도록 한 길을 걸어오신 안완식님이 계시다. 그 분의 말을 빌어 내가 자행(꽃이나 열매의 종자를 채취하는 일 등)하고 다니는 수치심을 덜고자 한다.

 

"국제식물유전자원연구소에서 하는 얘기가 있어요. 토종 종자를 저온 저장고에 보존하는 방법도 있지만 농가에서 직접 재배하면서 보존하는 방법도 있다고요. 종자를 채집해서 저온 저장하는 건 잠을 재우는 거예요. 100년 후에도 똑같은 종자지요. 하지만 농가에서 보존하면 100년 동안 변화하는 환경과, 미생물, 병충해에 적응한 종자가 되죠."  <좋은생각> 2008. 11월호

 

그렇다. 자연 속 사람도 이렇게 자랐으면 한다. 위험한 곳에 노출을 적게 하여 아이를 기르는 것이 진정하게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기르는 것일까? 그리고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그 공원이나 자연도 정말 실질적인 위험 가득한 곳인가? 모든 물음에 우리의 바보스런 행동들과 편견의 그림자만 보일 뿐이다. 그렇게 길러진 아이들, 혹은 자라난 우리는 스스로의 강한 내성도 적응력도 행동력도 보이지 못하는 나약한 꽃이 되고 말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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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기관차 미카 어른을 위한 동화 13
안도현 글, 최성환 그림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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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어른을 위한 동화 '증기기관차 미카'

 



“이번 역은 의왕. 의왕역입니다. 철도대학이나 철도박물관으로 가실 손님은 이번역에서 하차하여 주십시오.”라고 안내멘트를 듣는 노선. 지하철 보라색 1호선 천안행, 혹은 구로.용산.서울역으로 향하는 전철 노선안에 있는 의왕역. 오산에서 인천으로 학교를 다니는 길에 늘 지나는 길인지라 안내멘트만 무시로 들어왔다. 그런데 학교를 오가는 전철안에서 읽게 된 안도현의 어른을 위한 동화 [증기기관차 미카]를 읽는데, 그제서야 그 공간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다. 진행방향의 왼쪽 창을 바라보며 늘 가다가 한 번은 반대편의 창을 보며 책을 읽고 가는데 그곳에 바로 미카가 웅장하게 우리를 바라보며 서 있었던 것. 내가 그렇게 몇날 며칠을 무시로 지나다닐 때마다 늘 미카는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그 책속에 주인공이 ‘왜 나를 못 알아보고 책만 보며 지나가니?’ 하고 묻는 것처럼. 이번에도 스치고 지나갔다.




별 일 아니건만, 그 당시 혼자 디잉- 하고 머리가 울렸다. 읽으면서 ‘이야기가 참 따뜻하다’ 생각했었는데, 내가 늘 그 곳을 지나치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렇게 바로 옆을 매일같이 스쳐지나가면서도 잊어버리고 사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많은 추억과 기쁨을 선사했던 그 웅장했던 그 거대함들도 세월 속에, 발전 속에 고스란히 먼지옷으로 갈아입으며 가끔 자신을 보러 오는 방문객을 맞으며 호호 미소만 짓는 그런 고철할아버지로 변하는 것이다. 이틀전 잠시 들렸던 이승복기념관도 그렇게 세워진 탱크와 군용 비행기. 물론 그 탱크와 군용비행기가 다시 날아오른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기에 그렇게 녹슬어감이 슬프진 않지만, 그렇게 서 있는 모습이 새삼 세월이 흘렀어도 위용있게 보이기도 하고 또 반대로 초라해 보이게도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예전엔 저 한대가 그렇게 무섭고 위험하게 돌진하고 빠르게 지나갔을진데 지금은 그것보다도 더 빠르게 더 무시무시하게 많은 것들을 잃게 하고 있을 것이다. 빠르고 무서운 효율(?)을 대신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미카를 대신해서 나온 지금 내가 타고 다니는 전철뿐만 아니라 지금의 전철 모습을 과거엔 미카가 지녔던 것이다. 그래서 그 미카가 빠르게 지나치면서 못 본 것들을 그 후대가 나옴으로써 자신이 지나쳤던 것들과 사연들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들도 돌아봄은 물론이면서.




돌아봄에는 항상 따듯함이 있어 좋다. 어딘가 빨리 빨리 발전해야겠고, 성공해야 하는데,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하는 조급함이 들때면 더욱 돌아보게 되고 먼 아주 먼 미래에 내가 과연 그 시간을 거치고 났을 때 난 어디에 어떻게 서 있을 건가라는 질문을 던지다 보면 따뜻함과 여유를 주는 이런 어른을 위한 동화책을 자꾸 자꾸 찾게 된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어른을 위한 동화를 따뜻하게 쓸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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