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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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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 소설에 큰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
일본 소설 특유의 하드보일함은 내 생리완 그리 맞지 않는 모양이다.

물론 눈에 띄고 손에 잡힌다면 가리지 않고 읽기는 한다.
그렇게 만난 몇몇 작가는 내 맘을 사로잡기도 했지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살짝 김이 빠진 느낌이다.
닮았지만 한편으론 이해할수 없는 문화와 양식을 가진 다른나라 젊은이들의 글은 약간 모자란 감흥만을 남겼다.   

물론 스치듯 단언해버리는 생각이 얼마나 큰 모순을 안고 있는지 나는 안다.
짧은 식견이 낳은 오만방자함이 얼마나 형편없이 날라가던지.
드디어 만난 것이다. 얼토당토 않는 편견을 멋지게 날려버린 타자를!

쉬지도 못하고 단숨에 읽어 내리면서 나는 기분 좋은 흥분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세상엔 이토록 충만한 즐거움으로 가득 찬 책이 얼마든지 널려있구나.
내가 할 일이라곤 그런 책들을 찾아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즐기는 것 뿐이구나.
취향과 딱 맞아떨어지는 책을 찾았을때 느낄 수 있는 교감은 언제나 독자를 고취시킨다.
철저히 주관적인 잣대를 빌어 단연 최고의 목록에 합류하게 된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내가 아는 고양이는 몸을 숙이고 바싹 엎드려 볼때 비로소 본 모습을 보여주는 요물이다.
제가 알아서 살피고 인간에 맞춰 행동을 수정하는 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물이다.
독립적이다 못해 지독히 제멋대로 구는 고양이는 자기보다 강함이 분명한 인간에게도 숙이지 않는다.
자기 안위만 중요할 따름이다. 맛난걸 내줄 듯 하면 다가갔다 내키면 아양을 떨고 해꼬지할 듯 싶으면 피할 뿐이다.
절대 고개를 꺽지 않는 이 동물을 이해하기 위해선 내키지 않더라도 이쪽에서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많은 편견을 가졌으면서도 많은 예술가의 혼을 사로잡은 동물이기도 하다.

 

나쓰메 소세키는 참 괜찮은 작가였으리라.
천재가 되어보지 못해 알수는 없으나 세간에 보여지는 천재들의 행태를 보고있노라면 그 속이 범인과는 다른 모양이다.
뭐가 그리 들끓는지 생각도 못한 기기묘묘한 것들을 샘처럼, 화산처럼 뿜어내곤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와 같은 천재 작가는 아니였을테다.

천재였다면 내면을 매운 무엇들로 벅차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읽은 소세키는 천재와는 거리가 먼, 주변을 둘러 싼 사람들의 행태와 그 안의 본질적인 것까지 고스란히
읽고자 하는 관찰자에 불과하다. 물론 영민한 관찰력 역시 타고 나야 하는 재능이겠지만 그것은 고통과 함께
발전시켜야 하는 씨앗에 불과하다. 소세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재능을 각고의 노력으로 발전시킨 범재다.

손에 잡치지 않는 세계에 고립된 천재보다 우리네들 틈에서 자괴감에 몸부림치며 무언가를 토하는 범인들은
때로 천재보다 더 큰 깨달음을 안겨준다. 나에게 소세키가 그러했다.

       
고양이든 사람이든, 관찰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대상에 맞춰 몸을 숙여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안 사람이였다.
그렇게 탄생한 주인공 (이름조차 없는)고양이는 사람들이 흔히 스쳐 지나 미처 알지 못하는 고양이 그 자체의 고양이였고.
고양이의 관찰대상이 된 선생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쓰메 소세키 자체의 소세키였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사람 세상에 흔히 볼 수 있는, 사람 자체의 사람들인 것이다.

 

좀 더 본질을 들여자보자면 고양이가 서생이요 서생이 소세키니, 소세키는 자신의 허영심을 그대로 들어낸 인물,
게으르고 영특하지도 못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으로 보이고 싶은 헛된 마음에
몰라도 일단 고개부터 끄덕이고 보는 어리석은 자신의 모습을 우스갯감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그 우스꽝스러운 서생을 포함한 어리석은 인간 자체를 관조하고 있는 고양이 역시 소세키이다.
소세키는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타인처럼 관망하며 글로 써내렸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에서 오는 번뇌가 인생을 갉아먹기라도 한 걸까. 책의 앞머리에 실린 작가 소세키에 대한
자료는 그가 그리 행복치 못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준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삶을 살았던지 간에 그의 작품은 남았다. 그 작품은 나는 고취시켰다.

 

나름 두껍두껍한 책은 별다른 고저 없이 간단한 에피소드들만 나열되어 있다.
구샤미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인생의 대부분을 초등학교 선생으로 허비한 우유부단 고집쟁이 서생은
앞으로도 그리 특별한 계획이 없는 모양이다. 
매일 탁자 앞에 앉아 펼쳐 놓은 책 위에 침을 흘리며 낮잠을 자고, 부인을 닥달하며, 과자를 먹고,
간혹 찾아오는 손님들 앞에서 지식인인양 알아도 아는체, 몰라도 아는체, 하며 살아갈 요량이다.

그를 찾아오는 손님 가운데 가장 빈번한 자가 미학자 메이테이인데 꽤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짐짓 세상사를 초월한 것마냥 재미를 위한 허풍이며, 거짓말로 사람들을 골리길 좋아하고
늘 유쾌하게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메이테이는 어찌보면 다른 인물들과 다른 듯 보이나
그 역시 모순을 바로잡을 용기 없이 적당히 타협하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래도 그런 메이테이의 기지 덕분에 자꾸 웃게 되니 재밌는 인물임엔 확실하다.

 

이름난 사업가의 영양과 스캔들에 휘말리는 젊은 간게쓰군을 보자.
대학을 다니며 논문을 준비하고 나름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보이나 그가 연구하는 주제라는 것이
목을 메어 자살하는 역학이라거나 개구리 눈알의 전동작용에 대한 자외 광선의 영향따위라니,

연구랍시고 유리알만 진지하게 갈아대는 양은 웃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다. 

 

간게쓰군과의 스캔들의 주인공인 가네다양은 갈대처럼 청혼자들을 비웃으며 하녀의 가짓것마저 탐내는
여자지만, 그의 어머니 하나코가 거대한 코를 앞세워 남편의 권세를 자랑하고 다니는 꼴을 보면

그 엄마 아래 어찌 반듯한 딸로 자랄 수 있겠느냐,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하나코는 간게쓰군이 박사라도 되면 졸부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여 가문의 지성을 세우겠다는 요량인데..

그걸 보고 있는 고양이의 한마디 한마디가 어찌나 경쾌한지.

 

구샤미 선생을 위시로 한 지식인들은 진흙탕을 뒹굴며 재물을 탐하는 사업가들을 욕하고
사업가 간게쓰를 위시로 한때 구샤미의 제자였으나 사업에 뛰어든 미즈시마들은 급변하는 세상에 등 돌린채
독야청청 달관한 척하는 지식인들을 비웃는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닮고 싶어하니 모순이랄밖에.

 

소설의 배경이 일본이든, 막 개화가 시작된 백년전이든 중요할게 뭐란 말인가.
소세키가 보고 쓴 책 속의 세상은 지금 내가 처한 이곳과 하나 다를게 없었다.

그네들의 행태가 우스워 깔깔대다가도 뜨끔한 것이다.

 

[뜨끔]

 

백년이라는 간극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지 오웰과 더불어 나쓰메 소세키는 풍자소설이란 것이 얼마나 씁쓸한 웃음인지 뼈아프게 깨닳게 한다.
웃으며 즐겁게 볼 수 있는 책이지만, 노트에 옮겨적고 싶은 번득이는 구절로 가득 찬 책이지만,

읽고 나서 남는건 쓸쓸함 뿐이다.

그래도 인간이기에 인간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소세키의 모순이 슬프다.
작가 소세키가 고뇌속에서 몸부림쳐 토해낸 부조리의 진상이니 쓸쓸함이 당연하다.

 

그렇게 실컷 웃고 많이 생각케한 책이였다. 
인간적인, 그래서 더 어려운 고민을 싸안은 일본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노력을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책이기도 했다.

 

 

/

 

책의 서두, 실린 글에 나온 것처럼 처음엔 가로안의 한문들과 역주, 낮선 문체가 거슬리기도 한다.
하지만 소세키의 성찰로 부터 우러나는 명문과 경쾌하게 이어지는(어쩌면 음율을 타는듯도 한) 글 본연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 옛스러운 구어체를 사용했다는 설명에 아! 아!
정말이지 잘못했으면 느끼지 못했겠구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더불어, 어째서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일본작가들에게서 느끼지 못한 일체감을 소세키에게서 찾았는지 아직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미 죽어 썩어버렸을 사람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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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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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모나리자의 미소에서 美를 찾을 줄 모르는 무지렁쟁이 입니다. 뚱뚱하고 볼이 빵빵한 아줌마가 날 비웃고 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더라구요. 언젠가 지나치듯 북구의 모나리자라 불린다는 베르메르의 진주귀고리소녀를 보게 되었을때도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땐 그저 설 익은 과일처럼 여자라 부르기엔 어린 소녀가 그려진 초상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풀려 보이는 눈이랑 살짝 벌어진 입이 멍청해 보인다고까지 느꼈어요. 확실히 대중매체에서 쏟아내는 정형화된 아름다움에만 익숙해있던 전 진짜를 보는 눈이 없었던 거죠.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작가는 완벽하게 나를 사로잡았어요. 내가 놓쳤던 그림속에 무수한 해석과 아름다움을 완벽한 묘사로 풀어내어 몇번이고.. 책을 읽는 도중 수차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표지를 펼쳐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전 아까보다 더 애절하고 더 긴박한 망설임을 담고 있는 소녀를 보게 됩니다. 베르메르가 붓을 들어 그림에 빛을 한번 두번 덧칠해 나간 것처럼 저 역시 점점 생명을 얻어 나와 시선을 교차하는 소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고백하건데 그림의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책 한권이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이 그림을 평생 잊지 못할 환상으로 각인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제 진주귀고리소녀 라는 그림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따끔따끔 아파옵니다. 슈발리에가 나에게 들려준 그리트라는 영민한 소녀의 시작도 하기 전에 접어야만 했던 절제된 사랑의 감정이, 그 미묘한 감정을 화폭에 담아 낸 베르메르라는 화가가 생각 나니까요. 물론 이 모든 것은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이지만 그림에 더할나위 없이 어울리는 이 이야기야 말로 실화보다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로서 나는 나를 감싸고 있던 하나의 껍질을 더 깨부셨고 바늘귀보다 좁은 시야를 조금이나마 더 넓혔습니다. 이제부턴 어떤 그림을 보더라도 그게 왜 아름다운지, 거기에 그려진 빛이 무얼 비추고 있는지, 혹은 화가의 시선이 왜 거기에 가 닿았는지 등등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그냥 보았을땐 미처 찾을 수 없었던 의미들이 생겨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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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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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설은 또 처음 접해보는 거다. 아니 어쩌면 내 기억에 남지 않은 책이 스쳐갔을지 모르니 의식한적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좌우간 책 뒷 표지에 있는 '미국이 낳은 최고의 작가'라는 표현을 읽고 일단 심사가 뒤틀려 버렸다. 딱히 반미 사상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요 근래에 나쁘게 박혀버린 그 나라의 이미지를 버릴수는 없나 보다.

작가의 국적에 너무 치중한 탓에 판단력이 흐려진걸까? 아니면 <달의 궁전>이란 제목에서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기대한 탓일까? 어쩌면 풀 오스터란 이름 뒤에 따라 다니는 유명세를 너무 의식한건지도 모른다. 대화가 거의 없이 일인칭 독백으로만 이뤄진 책은 말라 비틀어진 바게트처럼 딱딱하고 지루했다. 나오는 인물들이나 가끔 등장하는 달에 대한 이야기 역시 아무 개연성 없이 그저 빨랫줄에 걸린 빨래처럼 줄줄이 나열되었을 뿐 나를 확 사로잡을 건덕지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적어도 절반을 읽을때 까지는.

그래도 한번 펼쳤고 책을 샀으니, 적어도 끝까지는 읽어야 판단을 내릴수 있을거야 하는 생각에 몇번의 끊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까지 꾸역꾸역 다 먹어 치웠다. 처음에는 인스턴트 식품처럼 플라스틱 맛이 났다. 적어도 내 구미에 맞지 않는건 확실했다.

하지만 절반을 넘어서면서 부터 어느정도 문체에 적응이 되자 꾹 참으며 읽어온 인내에 보답이라도 하듯 지나온 장면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그려졌다. 딱히 묘사가 아름답다거나 특별하지 않다 생각했건만 무미건조하게만 보였던 글들이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장님이였던 에핑이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처럼 세세하고 정확한 묘사를 요구했던 것처럼 작가도 눈으로 읽어지는 상황을 생생히 표현해냈다. 여기서부터 풀 오스터란 작가의 역량을 느끼며 점점 기대가 생겨났다.

달의 궁전은 세 사람의 연대기를 다루고 있다. 먼저 가난의 극한까지를 경험한 젊은이와 그 젊은이가 처음으로 얻은 일자리에서 보살피게 된 괴팍한 늙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독한 신체적 컴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중년이다. 앞의 두 사람인 젊은이와 늙은이는 꼭 닮아 있는데 절대 타협할줄 모르고 자신만의 세계가 강한 고집쟁이들이다. 두 사람의 경험은 달랐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았고 시간과 거리는 떨어져 있었지만 개요만은 일치했다.

마지막의 중년만은 예외였는데 좀더 온유하고 열려있는 사고를 가져 지독한 비만이라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나를 가장 매료시킨 인물이다.

결국 뒤죽박죽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듯 보였던 이야기는 종결에 다다르자 상상도 못했던 결말을 토해내고 한동안 충격에 휩싸인 내 심장은 마지막 부분을 읽어가는 동안 두근거렸다. 뛰어난 상상력과 거기에 붙여진 살들이 경의로울 정도였다. 어느새 나는 그에게 쏟아지는 모든 찬사를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내 취향은 아니였지만.

그러나 역시 초반에 집중하기 힘든 책이란 것에서 입은 데미지가 너무 컸다. 재미를 얻기 위한 기다림이 너무 긴 탓에 설렁설렁 넘겨버린 부분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조만간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을 작정이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아직도 이 책에서 달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수가 없다는 것이다. 종종 등장하기는 하지만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인물들과 어우러지지 못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여러각도로 그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다시 읽을땐 뭔가 답을 찾을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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