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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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설은 또 처음 접해보는 거다. 아니 어쩌면 내 기억에 남지 않은 책이 스쳐갔을지 모르니 의식한적이 없는 건지도 모른다. 좌우간 책 뒷 표지에 있는 '미국이 낳은 최고의 작가'라는 표현을 읽고 일단 심사가 뒤틀려 버렸다. 딱히 반미 사상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요 근래에 나쁘게 박혀버린 그 나라의 이미지를 버릴수는 없나 보다.

작가의 국적에 너무 치중한 탓에 판단력이 흐려진걸까? 아니면 <달의 궁전>이란 제목에서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기대한 탓일까? 어쩌면 풀 오스터란 이름 뒤에 따라 다니는 유명세를 너무 의식한건지도 모른다. 대화가 거의 없이 일인칭 독백으로만 이뤄진 책은 말라 비틀어진 바게트처럼 딱딱하고 지루했다. 나오는 인물들이나 가끔 등장하는 달에 대한 이야기 역시 아무 개연성 없이 그저 빨랫줄에 걸린 빨래처럼 줄줄이 나열되었을 뿐 나를 확 사로잡을 건덕지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적어도 절반을 읽을때 까지는.

그래도 한번 펼쳤고 책을 샀으니, 적어도 끝까지는 읽어야 판단을 내릴수 있을거야 하는 생각에 몇번의 끊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까지 꾸역꾸역 다 먹어 치웠다. 처음에는 인스턴트 식품처럼 플라스틱 맛이 났다. 적어도 내 구미에 맞지 않는건 확실했다.

하지만 절반을 넘어서면서 부터 어느정도 문체에 적응이 되자 꾹 참으며 읽어온 인내에 보답이라도 하듯 지나온 장면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그려졌다. 딱히 묘사가 아름답다거나 특별하지 않다 생각했건만 무미건조하게만 보였던 글들이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장님이였던 에핑이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처럼 세세하고 정확한 묘사를 요구했던 것처럼 작가도 눈으로 읽어지는 상황을 생생히 표현해냈다. 여기서부터 풀 오스터란 작가의 역량을 느끼며 점점 기대가 생겨났다.

달의 궁전은 세 사람의 연대기를 다루고 있다. 먼저 가난의 극한까지를 경험한 젊은이와 그 젊은이가 처음으로 얻은 일자리에서 보살피게 된 괴팍한 늙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독한 신체적 컴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중년이다. 앞의 두 사람인 젊은이와 늙은이는 꼭 닮아 있는데 절대 타협할줄 모르고 자신만의 세계가 강한 고집쟁이들이다. 두 사람의 경험은 달랐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았고 시간과 거리는 떨어져 있었지만 개요만은 일치했다.

마지막의 중년만은 예외였는데 좀더 온유하고 열려있는 사고를 가져 지독한 비만이라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나를 가장 매료시킨 인물이다.

결국 뒤죽박죽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듯 보였던 이야기는 종결에 다다르자 상상도 못했던 결말을 토해내고 한동안 충격에 휩싸인 내 심장은 마지막 부분을 읽어가는 동안 두근거렸다. 뛰어난 상상력과 거기에 붙여진 살들이 경의로울 정도였다. 어느새 나는 그에게 쏟아지는 모든 찬사를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내 취향은 아니였지만.

그러나 역시 초반에 집중하기 힘든 책이란 것에서 입은 데미지가 너무 컸다. 재미를 얻기 위한 기다림이 너무 긴 탓에 설렁설렁 넘겨버린 부분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조만간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을 작정이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아직도 이 책에서 달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수가 없다는 것이다. 종종 등장하기는 하지만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인물들과 어우러지지 못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여러각도로 그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고 다시 읽을땐 뭔가 답을 찾을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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