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 삼순이도 안보고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엉터리로 돌아가는 mp3p소리에 잠이 홀딱 깨고 말았다. 그리고 이 두꺼운 걸 왜 샀나 싶은 '파이 이야기'를 펼쳤다. 베스트셀러라 대강의 줄거리는 왠만큼 알 것이다. 열 여섯살 소년의 표류이야기라는 것. 이 책도 서론이 길고 지루하다. 그런데 자야한다는 압박에 짓눌려 읽었더니 괜히 재밌어진다. 반도 못 읽고 잠들긴 했지만.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습성과 종교에 대한 얘기부분을 읽었는데 전혀 딱딱한 논리는 아니다. 주인공 '파이'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동물원에서 자랐고, 인도인으로 주변의 '이슬람교','힌두교','기독교'를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물과 종교이야기가 나온 것일 뿐이다. 아무튼 내 전공과 겹치는 부분이니 이 책을 잘 샀다는 생각도 해봤다. 그런데 난 딴 생각에 빠졌다.
나는 어렸을 때 성경 얘기를 무지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다. 그때는 신화같은 성경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었다. (지금도 요한계시록에 있는 계시들이 정말일까 믿는 구석이 있긴 하다.) 지금은 진화론 위주의 공부를 하다보니 창조론이 의심된다. 그때 배우기론 진화론은 이미 과학적으로 그 허점이 밝혀진 허구 이론일 뿐이었다고 했다. 난 그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뭔가 되돌려서 생각하는 응용력이 조금 많이 떨어졌다.
그 옛날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의 갈비뼈 하나로 하와(이브)를 짝으로 만드셨으니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정하셨을 것이다. 이것부터 참 재밌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명을 하나 내렸는데 동식물의 이름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난 이 세상 동식물의 이름을 아담이 지었다고 믿었으니 얼마나 천진난만했는지..
이것저것 따지고 들어가면 성경의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와 비슷해진다. 다시 말해, 무수한 신화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난 종교를 믿지 않지만 어느 날 문득 죽는다는 것이 두려워졌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종교를 갖는다. 그런데 하나하나 따져보면 믿을만한 종교가 없다. 내가 만약 의지할 '신'이 필요할 때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예전에 한 독실한 기독교인이 말하길, 보이지 않는 걸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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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워 다 읽었는데 역시 최고였다. 요번에 읽은 책들은 소설을 지루해하는 나를 심하게 웃겨주었다. 갖다 붙이자면 다음과 비슷한 기대 이상의 발견이다.
배의 가장자리에 U자 모양 노걸이가 여섯 개 있었다. 노걸이에 든 노는 다섯 개였다. 하나는 내가 리처드 파커(같이 조난당한 뱅골 호랑이)를 밀어내다가 잃어버렸다. 노 세 개는 길게 놓인 벤치 한쪽에, 하나는 맞은편에, 또 하나는 내 목숨을 부지해준 뱃머리에 있었다. 이 구명보트(32인용)는 경주용 배가 아니었다. 항해를 목적으로 만든 배가 아니라, 안전하게 떠 있을 수 있도록 무겁고 튼튼하게 만든 배였다. 32명이 타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었겠지만.
이 모든 것을-그보다 많은 것을-한번에 알아내지는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눈에 띄었고, 필요에 의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미래가 황량한, 더할 수 없이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는 작은 일, 사소한 세부사항도 저절로 변해서, 내 마음에 새로운 빛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전처럼 사소한 일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될수도 있었다. 내 목숨을 구해줄 것이. 이 일이 일어났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란 말은 얼마나 맞는 말인가. 정말 얼마나 맞는 말인지.파이 이야기, 얀 마텔, p177
나는 열여섯살 소년의 이야기를 믿었다. 그러나 조난당한 배를 조사하러 온 어른들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답답한 소년의 말과 나의 질문에 답변을 보내주신 교수님 말씀이 교차한다.
"... 하지만 당신이 탄 구명보트에서 호랑이가 살았다는 것은 못 믿겠어요."
"단순한 것도 못 믿는다면, 왜 살아가고 있죠? 사랑이라는 건 믿기 힘들지 않나요?
... 예절바른 태도로 날 물먹이지 말아요! 사랑은 믿기 힘들죠, 어느 연인한테든 물어보세요. 생명은 믿기 힘들어요, 어떤 과학자한테든 물어보라구요. 신은 믿기 힘들어요, 어느 신자한테든 물어봐요. 믿기 힘들다니, 왜 그래요?"
파이 이야기, 얀 마텔, p368,369
난 종교와 학문은 별개라고 생각하고있어요.
종교는 가슴으로 하는것이고 학문은 머리로 하는것이거든요.
난 어렸을땐 창조론은 믿지않았어요. 그땐 물론 종교도 없었고, 어쩜 그 때문에 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정말 어려운 고비도 있고, 행복한 순간도 있습니다.
행복한 순간은 꿈같이 지나지만, 어려운 고비는 정말 사람의 육신과 정신을 함께 황폐화시킬수도 있어요.
이럴때 종교는 정말로 힘이됩니다.
.... 내가 머리로 이해해야하는 부분보다
내 가슴에서 받아들이고 힘을 주는 부분이 더 많았어요. 난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친절한 00교수님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