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인이 잔혹한 것은, 살인이 피해자를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족의 생활과 마음까지 서서히 죽여가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가족을 죽이는 것은 살인자 본인이 아니라 그 가족들 자신의 마음이야.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래. 난 그게 싫어. 난 아무리 자신을 책망해도, 조금씩 죽어가도, 가만히 이를 악물고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인간이 아냐. 이제 더이상은 싫어." 요시오는 신이치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 이번에는 이 할아버지 옆에서 나를 도와줘. 내가 어떤 발악을 하-280쪽
는지 지켜봐. 그러면서 너도 자신을 용서하는 방법을 터득해나가는 거야." 노인의 손이 가볍게 신이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너를 가장 괴롭히고 있는 건 히구치 메구미가 아니야. 바로 너 자신이지. 그애도 그것을 아니까 그렇게 쫓아다니는 것이고,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어떤 마음의 위안을 느끼는 거야." 신이치는 고개를 들어 노인을 보았다. " 마음의 위안이요.....?" " 그럼. 나만 불행한 게 아니다, 내가 나쁜 게 아니라고 그애는 생각하는 거지." 우리는 모두 희생자라고 히구치 메구미는 말했었다. " 너는 이제 도망치지 않는다고 했지.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야. 멋진 결단이야. 그렇지만 도망치지 않고 이자리에 머문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야. 이제 그애에게 말을 해줘. 이제부터 나는 자책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이야." 신이치는 중얼거렸다. " 그애는 먼저 자기 아버지를 만나달라고 할걸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직접 그것을 인정하라고 말이에요." " 그럼 이렇게 말해주렴. 내가 느끼는 죄의식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너의 지시는 필요 없다, 너도 너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지 스스로 생각해라, 아버지 핑계를 대지 말라고 말이야." 아버지 핑계를 대지 마.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신이치는 입술이 떨려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이치는 오랜 병마에서 깨어나는 하나의 징후를 본 듯한-281쪽
기분이었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검은 덩어리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병의 원인은 제거했다. 신이치는 울었다. 길게, 많이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기쁨을 누렸다. 아리마 요시오는 신이치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누군가의 팔에 안겨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주 억세고 따스한 팔이었다. 그것은 단지 부모나 어른의 팔이 아니었다. 고통스런 길을 함께 걸어갈 동지의 팔이었다.-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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