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격렬한 변동으로 자신의 모든 생활과 재산을 빼앗기고도 의연해 보였던 그가, 심경의 변화로 새롭게 얻어진 신비롭고도 불가사의한 충격으로 그의 모든 생활에 깊숙이 퍼져 있던 모든 향락과 애정을 떨쳐 버렸던 것일까?

"거기서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노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폐하."
미리엘 씨는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한 늙은이를 보고 계시고, 저는 한 위인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도 저도 모두 얻는 것이 있겠지요."

미리엘 씨의 젊은 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이 얼마나 진실할까? 그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혁명 이전의 미리엘 가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미리엘 씨는 작은 마을에 혼자 온 낯선 사람이라면 으레 당하게 되는 일을 겪게 되었다. 그런 곳에서는 흔히 뒤에서 쏙닥거리는 자는 많아도 속이 꽉 찬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는 주교였음에도, 아니 주교였기에 그런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한때의 관심사가 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소문이며 험담이며 뒷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뒷말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남부 지방에서 잘 알려진 표현대로라면 ‘뜬구름’ 정도도 못 되었을 것이다.

시중을 들어 줄 사람으로는 바티스틴과 동갑인 하녀가 한 명 있었는데, 바로 마글루아르 부인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주임 사제의 하녀’였으나 이로써 노처녀의 하녀, 그리고 주교 예하의 가정부라는 이중 직함을 갖게 되었다.

바티스틴은 키가 크고 수척하며 순한 여자였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스럽다는 말을 들을 만한 그런 여자였다. 좋은 어머니라는 이미지가 어울린다면 존경을 받을 만하다는 평을 들을 만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쩌면 아름다운 아가씨였던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해 온 그녀의 인생은 그녀에게 성스러움과 밝은 빛을 갖게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녀는 온화한 아름다움의 덕목을 갖게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야위었던 몸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투명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마치 그 투명한 몸에서 천사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것은 여자라기보다는 고귀한 영혼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몸은 마치 무언가의 그림자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 몸은 남녀라는 개념이 섞여 들어갈 틈이 없었다. 무한한 빛을 가진 육체 속에 사물을 지그시 바라보는 큰 눈, 그야말로 하나의 영혼을 지상에 머물게 하는 무언가였다.
마글루아르 부인은 작은 키에 살찐 몸집, 흰 피부를 가진 할멈으로 워낙 일을 많이 하는 데다 해수병에 걸려 늘 숨을 헐떡거렸다.

우리 집 지출 예산서

신학 예비교를 위해 1500리브르
전도회 100리브르
몽디디에의 성 라자로 회원에게 100리브르
파리 외국 선교회 신학교 200리브르
성령 수도회 150리브르
성지 종교회관 100리브르
성모 자선회 300리브르
아를 자선회 50리브르
감옥 개선 사업 400리브르
죄수 위문 및 구제 사업 500리브르
빚으로 복역 중인 가장의 석방을 위해 1천 리브르
관할 교구의 가난한 교사 보조 2천 리브르
오트알프의 곡물 저장고 100리브르
빈민 여인의 무료 교육을 위한 디뉴, 마노스크, 시스트롱 각 지구의 부인 수도회 1500리브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6천 리브르
나의 개인 비용 1천 리브르
합계 1만 5천 리브르

디뉴의 주교직을 수행하는 동안 미리엘 주교는 이러한 예산안을 변경 없이 시행했다. 그는 이것을 위에 쓰인 것과 같이 ‘우리 집 지출 예산서’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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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지바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1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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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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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그래픽 노블)
커트 보니것 원작, 라이언 노스 각색, 앨버트 먼티스 그림,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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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좋은데 이야기를 잘 못 따라가는 느낌이 있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대충 퉁치고 넘어가는 느낌이 강하다. 원작을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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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티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고객님은 아무 주식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스터 보험회사는 파산했어요." - P151

다우티가 나를 붙들고 앉혀줘서 다행이었다. 몸에 아무 힘이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공황 때문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매닉스 그룹이 몰락한 결과입니다만... 물론 그 사실은 모르고 계시겠죠. 공황이 지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공황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됐다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마스터 보험사가 운영 체제 면에서 부정직하고 엉망이지 않았다면 침몰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썩었다고 할수 있겠군요. 자산 관리가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최소한 건질거리는 남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문제가 알려졌을 때 남은 거라고는 빈 껍데기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임이 있는 인물은 이미 범인인도조약을 맺지 않은 외국으로 도망친 뒤였고요. 이런 말씀을 드려도 위로가 될진 모르겠습니다만, 이제는 법적으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 P151

물론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위로는 고사하고 일단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법이 복잡해질수록 악당들이 악용할 기회도 늘어나는 법이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언제든 가진 것을 전부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현명하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얼마나 자주 그 짓을 해야 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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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여 페이백] 가여운 것들
앨러스데어 그레이 / 황금가지 / 2024년 5월
평점 :
판매중지


<프랑켄슈타인>을 항상 읽고 싶었는데 이 책이 그 책과 비슷한 면이 많은 거 같다.
죽은 사람을 소생시킨다는 소재도 그렇고 주인공의 이름도 그렇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마음에 드는 부분과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소재와 이야기의 흥미도는 마음에 들지만
컨셉을 치밀하게 이어나가려는 구성적 측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전에 <장미의 이름> 읽었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컨셉을 만들고 그것을 일관되게 지키려 하는 것에서 나는 반감을 느끼는 것 같다. 소설이 허구임을 컨셉으로써 중화시키려 하나 그 컨셉이 읽는 데 굉장히 방해가 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언제 영화화가 됐는지 모르겠으나 올해 3월에 이미 우리나라에도 개봉했다고 한다.
읽어도, 안 읽어도 그만인 소설. 시간 많음 한번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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