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공식 한국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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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진 서양이 동양의 묵은 지혜를 들춰낸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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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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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언저리어강독모임

_2011년 4월 2일 (토)

 

 

지금 시각은 4월 2일 오전 2시 14분. 10분 전에 <가난한 사람들>을 완독했습니다. 분량이 짧아 망정이지, 습관적인 게으름 때문에 이번에도 벌금을 물 뻔 했네요. 천만 다행입니다. 이왕에 벌금 얘기가 나왔으니, 저의 재정 상태 얘기로 글을 시작할까 합니다. 며칠 전 통장 잔고를 살펴보다가 화들짝 놀랐었거든요. 월급일 지난 지 보름도 채 안 됐는데, 급여의 60%가 사라져 있는 겁니다. 카드 명세서를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헤프게 쓰진 않은 것 같은데, (본인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수중에 돈이 없는 거에요. 약간의 공황 상태를 포함한 멍한 정신으로 부랴부랴 남은 20일을 버틸 궁리를 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외식/커피/택시를 끊고 필수 지출 내역들을 대강 추려보니, 빠듯하게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 다음 날부터 학교 친구들을 만나서는 ‘나 돈 없어’를 연발하며 커피도 안 마시고, 밥도 얻어먹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나마 어머니께서 보내시는 부식 덕분에 밥 안 굶고, 아버지께서 대주시는 집세 덕분에 한데서 잠 안 자고, 동생이 내주는 난방비 덕분에 추위에 안 떠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제 처지가 제부쉬낀만 하겠습니까마는, 그나마 이런 상황 덕에 소설 속의 궁핍한 주인공들의 처지가 아주 멀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저에겐 자발적 가난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향했던 나사렛 예수의 삶에 한 발짝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자발적 가난은 선택이 아니라고 늘 생각하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 ‘자발적’이란 말조차 오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부쉬낀과 그 주위에 그득그득한, 온갖 몸부림을 쳐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상대와 팔려가듯 혼인을 올리는 바렌까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어째서 어떤 사람은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운명의 새가 행운을 점지해주고, 왜 어떤 사람은 양육원에서 태어난단 말입니까!’(169) 라고 부르짖는 제부쉬낀의 절규 앞에서, 사랑하는 바렌까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마부들’이 끄는 ‘거울처럼 맑은 유리창’이 달린 ‘비로드와 비단’으로 장식된 마차에 태우고 싶지만,(169) 결국 마누라 따위는 집에 팽개치고 ‘토끼나 잡으러’ 다닐 비꼬프 같은 인간에게 보내야 하는 제부쉬낀의 절망 앞에서 그렇습니다.(215)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자발적 가난’이라는 관념적 명제는 참으로 칭송 받을만한 덕목이라, 장려되어야 할 미덕이라 생각하지만, 막상 ‘가난한 삶’ 자체는 못 견뎌 할 제 자신입니다. ‘가난한 삶’이라는 단어가 멀게 느껴진다면, ‘구질구질한’ 이란 형용사가 더 잘 어울리겠네요. 다시 말해, ‘자발적 가난’은 원하지만, ‘옷 사이로 맨 팔뚝이 보인다든지 단추가 실에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는 것은 정말 무서우리만큼 부끄러운 일’(131)이라는 제부쉬낀의 처지가 나의 현실이 되는 일은 결코 바라지 않는 게지요. 가난하더라도 모양 빠지는 삶은 도무지 싫은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어쩜 저는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았을 때 주위 사람들이 쏟아낼 존경 어린 눈빛이 흐뭇해 ‘자발적 가난’을 지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니, 제 자신의 천박함이 몹시 눈꼴사납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저는 가난은 참아도 교양 없음은 못 참더군요. 막말로, 누군가 저에게 밥을 사주지 않는 것은, 돈을 쥐어주지 않는 것은 참을만합니다. 하지만 지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대는 반갑지 않아 합니다. 그 때문에 뽀끄로프스끼에게 일말의 동질감(?)을 느꼈나 봅니다. 그도 ‘돈만 생겼다 하면 바로 책을 사러 나갔다’죠?(49) 소설의 역자인 석영중 교수가 평론의 말미에 언급한 ‘미학과 존재론의 상관성’(227)이 와 닿은 이유도 거기에 있나 봅니다. ‘한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읽는 책, 그가 쓰는 글이라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미학 공식’(227)에 저 또한 십분 공감합니다.

 

종합하면, 제가 꿈꾸는 ‘자발적 가난’의 실체란, 가난함을 선택함으로 뭇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고, 게다가 학식도 풍부하여 더욱 존경 받는 상태인 게죠. 뒤집어 말해, 가난도 좋고 청렴도 좋고 다 좋지만, 가난 때문에 무시 당하고 싶진 않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소설이 보여주는 인간사 현실은 냉혹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단지 수중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어김없이 인격적인 모욕을 당합니다. 제부쉬낀의 말을 들어보세요. ‘바렌까, 제 목을 조이는 것은 사람들이에요, 그렇죠? 제 몫을 조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느껴지는 불안감, 사람들의 수군거림, 야릇한 미소, 비웃음입니다.’(153) 소유로 사람의 가치를 가늠하는 일은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네요. 짧은 한숨 섞인 탄식 외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요?

 

A4 한 장이 다 채워져 가지만, 글은 결론이 없이 떠도는 느낌입니다. 가난을 지향하는 관념, 일상에서 경험하는 경제적 쪼들림, 경제적 능력이 사람됨을 결정하는 현실 속에 끼여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딱히 해결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지향도 놓지 않고 현실도 외면하지 않은 채, 그 틈바구니 속에서 좌충우돌 하다 보면 조금씩은 영글어 가겠지요. 그런 소박한 바람이라도 있어야 다 함께 일관적으로 미쳐가는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애써 자위해 봅니다.

 

여하튼,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우리는 묵은지 감자탕을 거하게(?) 먹은 뒤, 향긋한 커피를 앞에 두고 있겠죠? ‘가난한 사람들’을 입에 올리며 말입니다. 참 좋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2011년 4월 2일 새벽 3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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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 국제노동기구(ILO) 이코노미스트 이상헌이 전하는 사람, 노동, 경제학의 풍경
이상헌 지음 / 생각의힘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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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언저리어강독모임
_2015년 10월 6일(화)

 

 

*** 들어가는 글

 

처음엔 편집장 때문에 읽기 시작했다. 책의 책임 편집을 맡은 사람은 나에게 제2의 독서 인생을 열어준 분이다. 그가 추천하는 책들 때문에 내 지갑은 늘 가벼웠었다. 한때 내 책장의 40%가 그가 일하던 출판사의 책들이었던 적도 있다. 새로운 출판사로 이직한 후 출간한 첫 책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구입해 읽었다.

다른 동기도 없지 않았다. 마침 요새 경제(와 노동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기독교의 경전을 공부하면서 ‘정치’와 ‘경제’가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성서는 외형상 ‘종교’를 말하지만, 그 속살은 결국 정치와 경제였다. 성서가 줄기차게 강조하는 ‘하나님의 통치’는 결국 ‘정치’ 문제이고, 성서에서 가장 빛나는 법안인 ‘희년법’은 결국 ‘경제’법이다. 이 모든 것이, 야웨란 신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먹어야 사는 존재고,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먹는 문제가 경제 아니고 또 무엇이며, 더불어 사는 문제는 정치 아니고 또 무엇일까? 때문에 요새 내 관심사는 ‘경제’이다. (시대적 요청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에 함몰되지 않는 삶과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에 관심이 있고, 무엇보다 성서의 근거를 들어 돌파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서론이 길었다. 재빨리 돌아오며 마무리하자만, 하여튼 의리와 신뢰로 읽기 시작했지만 이내 내용에 사로잡혔다. 경제학에 무지한 나 같은 사람도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전문성과 대중성을 적절히 겸비한 칼럼들이었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었다. 흩어진 칼럼들을 모아 주제별로 엮은 듯 했다. 1부의 제목은 ‘일터의 풍경’이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인권에 관해 말한다. 시작하는 글의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저자는 “노동자는 정말 게으른가”(17쪽) 라고 묻는다. 이러한 “편견”에 적절한 인용과 상세한 설명으로 맞선다.


“회사 주차장에 주차된 직원들의 차가 해마다 좋아지는 걸 보는 게 즐거움”이라는 영국 애드미럴(Admiral) 보험사 사장 이야기는 한편의 영웅담 같았다. 나를 감동(?)시킨 대목은 생뚱맞게도 다음 대목이었다.


_임원이나 신입사원이나 모두 똑같은 의자를 쓴다. 누군가 조금 나은 의자를 쓰게 되면, 인간인지라 욕심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좋은 의자에 신경이 가게 마련이다. 이런 것으로 회사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도 경계한다. 그래서 모두에게 좋은 의자를 준다. (27쪽)


지난 이야기지만 일터에서 책상/의자 교체 문제로 작은 소음이 있었더랬다. 누가 조금 더 큰 책상을 쓰고 누가 새 의자를 쓰는, 어찌 보면 유치한 문제였는데 미묘하게 민감한 분위기가 연출됐었다. 신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감수성이 일개(?) CEO보다 못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노동자를 개무시하는 한국 기업을 다룬 꼭지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격을 보여주며 착각에서 헤어나오라는 듯 했다. 2013년 영국에서 노동자의 종교를 고려하지 않은 업무 배치로 한바탕 소란이 있었나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달랐다.


_한국의 어느 대학은 청소부에게 콧노래를 허하지 않았다. 종교가 ‘신념’이라면, 콧노래는 ‘본능’일 테다. 남들은 종교적 신념과 직무 배치를 고민하는데, 우린 너무 치사하지 않나. (37쪽)


대한민국이 도달한 지점은 딱 여기까지였다. 일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신명나게 일할 수 있을까...... 우리의 노동 감수성은 왜 이리 천박한가...... 누워서 침 뱉기와 같은 생각들이 줄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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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가 노동하는 개인들의 이야기였다면, 2부 “경제학과의 불화”는 헛발질하는 경제학에 관한 글들이다. 사실 경제학의 기초도 모르기 때문에 약간 뻑뻑하게 넘어갔다. (결코 저자의 탓이 아니라 무지한 독자인 나님의 탓이다.)


요새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를 궁금해하는 나에게 “자본주의, 그동안 수고하였습니다”(65쪽)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명쾌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 질문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토마 피케티에 관한 글이 빠질 수 없었다. 대학원 수업에서 경제와 기업 윤리를 가르치는 어느 교수님은 피케티의 이름도 정확히 모른 채 그의 책에 쿨한 무관심을 보이던데, 하여튼 이젠 “소득분배와 자산 불평등을 논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피케티를 거론하지 않고서는, 경제정책을 논하기란 어렵게 되었다.”(100쪽)는 상황을 알고는 계셨을까...... 깊은 빡침이 되살아났다.


경제학자 쿠즈네츠와 그의 히트 상품 ‘GDP’에 관한 얘기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매우 왜곡된 정보들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2장의 내용이 더욱 많지만, 경제학에 밝지 않아 이 정도만 쓰고 말아야겠다. (아! ‘최고임금제’를 상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는 말은 꼭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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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사람을 읽다”에서는 인간다운 세상을 꿈꿨던, 혹은 실패한 사람들의 일화를 소개한다. 위인(?)들의 감춰진 역사도 있었다.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만, 그 때문에 받은 곤경까지는 자세히 몰랐었다. 아인슈타인이 흑인 차별 문제와 팔레스타인 문제에 개입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엄친아(나는 천재 아빠는 부자)였다는 것도 나는 몰랐고, (물론 그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는 아니었다만...) 러셀의 여자 관계도 처음 알았다.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백석, 마종기, 황현산... 내가 코를 처박고 읽었던 문인들의 이야기에 차라리 나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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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4부 “기억을 위하여”에서는 함께 투쟁(이란 표현은 좀 거칠다. ‘애쓰다’라는 뜻으로 읽어도 좋겠다.)하며 살았던 (그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냈다. 사상의 스승이자 동지였던 김수행 교수와 밀양의 할머니들과 굴뚝에 올라선 이(아마 김진숙을 두고 쓴 글이겠지...)와 팽목항의 부모들을 새겨 넣었다. 결국은 사람들 때문에 싸우고 사람들 때문에 힘겨워도, 사람들 때문에 위로 받고 또 의지를 삼으며 살아가기 마련이라고, 넌지시 말하는 듯 했다.

 

*** 나가는 글


찬사만 늘어놓는 서평은 차라리 조롱에 가깝다지만, 딱히 흠잡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읽었다. 저자의 글솜씨가 그만큼 유려했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주는 것도 모자라, 비유력까지 탁월했다. 간단하지만 명료한 비유들이 기억난다. 그리스의 위기를 그리스 신화의 강들에 비유하며 쓴 글도(127쪽), 금융 자본의 문제를 간파한 헨리 포드가 유대인들을 몰아내려는 대목을 두고 “매번 한 아이가 독식하는 구슬놀이라면, 구슬을 나누어 가지도록 규칙을 바꾸면 된다. 손재주가 뛰어난 아이를 두들겨 패고 쫓아낼 일은 아니다.”(125쪽)라고 설명한 부분도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저자가 사람답게 일하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서 좋았다. 이 정도 상식선의 이야기에 즐겁고 흥분해서도 부끄러웠고, 이 정도 얘기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시대와 또 교회를 생각하며 부끄러웠다. 즐거워하며 또 부끄러워하며, 한 권의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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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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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언저리어강독모임
_2016년 3월 19일 (토)



***들어가는 말

갖고 있는 책을 또 사는 바보가, 저만은 아니겠지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개정판’에 유혹당하며, 컬러 도판들이 대량 추가됐다는 문구에 치명상을 입었던 적이 없지 않을 겁니다. 최근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개정2판을 들여놓고 하는 자위입니다. 여하튼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_‘황금시대’의 전설은 아득히 먼 옛날부터 있어왔다. 우리는 오래된 것을 존중하는 태도의 사회학적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최근 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가 떠올랐습니다. 영화는, 21세기를 살면서 1920년대를 동경하는 남자와, 1920년대를 살면서 19세기 말을 동경하는 여자와, 19세기 말을 살면서 르네상스 시대를 동경하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황금시대’는 허상이라고 꼬집습니다.

20세기에 크게 활동했던 문화예술인들이 2000년대 말부터 재조명 받는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불후의 명곡’에 등장하는 새파란(?) ‘전설’들을 보면서 하는 얘깁니다. 한편으로는, 내 나이가 언제 이렇게 됐을까 하며 자조의 웃음도 짓습니다. 특히,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질 때엔 그 기분이 묘합니다.

2014년 가을, 처음으로 유명인의 죽음을 추모했던 기억이 납니다. 故 신해철 씨의 비보를 들은 날, 그의 음악을 틀어놓고 술 한 잔과 기도를 올렸습니다. 10대 중반 텅 비어있던 마음을 채워줬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리고 올해 초, 또 한 번 유명인사의 죽음을 추모했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운명하셨을 때입니다. 주일이었음에도 빈소를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말과 글을 통해 마음에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직접 배운 적 없더라도, 마음의 스승으로 여겼을 테지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이런 마음에서 3월의 책은 『담론』으로 정했습니다.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가 붙은 책입니다.


 ***책 속으로

# 1부 ::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담론』은 성공회대에서 했던 강의를 녹취하여 정리한 책입니다. 선생님은 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자신만의 독법으로 동양 고전들을 강의하셨습니다. 그 결실들이 지난 2004년,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담론』의 1부 역시 동양고전 강독입니다.

『담론』의 1부는 『강의』에서 다뤘던 책들을 거의 그대로 다룹니다만, 『강의』보다 분량이 적고 설명도 쉽습니다. 『강의』는, 동양고전(과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저로서는, 읽기 어려웠습니다. 그에 비해 『담론』은, 어르신 곁에서 옛이야기를 듣는 듯 했습니다. 고전의 주제에 맞춰 생생한 경험들을 예로 들어줍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언어를 뛰어넘고 사실을 뛰어넘는 진실의 창조”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할 때, 신입 재소자 불러 자전적 얘기를 할 때마다 이야기를 각색하는 노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평합니다.

_만약 저분이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최소한 각색해서 들려주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색한 인생사에는 이루지 못한 소망도 담겨 있고, 반성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인의 실제 인생사와 각색된 인생사를 각각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전자를 ‘사실’이라고 하고 후자를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저 노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망과 반성이 있는 진실의 주인공으로 그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1)

이렇게 적절하게 예시를 들어 설명하니 훨씬 쉽게 읽힙니다. 『담론』을 먼저 읽고, 상응하는 『강의』의 장들을 읽으면 알맞겠습니다.

고전 강독이라고 해서 활자의 뜻만을 새기지 않습니다. 새긴 뜻을 바탕으로 반드시 현재를 읽습니다. 각 장의 내용들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시경』을 읽으며, 사실을 넘어 진실을 읽자고 역설합니다. 『초사』를 읽고서는, 문사철로 얻는 추상력과 함께, 상상력도 함께 배양하자고 말합니다. 『주역』이 괘를 읽는 방식을 통해, 존재론에서부터 관계론으로 이동하자고 권합니다. (수번囚番으로 불리던 사람에게 이름을 묻고는, 이름에 한 일 자를 확인하더니, “뉘 집 큰 아들이 징역 와 있구먼.”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논어』를 읽을 때엔 화동 담론을 중심으로 화화和化하자고 합니다. 『맹자』의 ‘이양역지以羊易之—양과 소를 바꾼 이야기’를 들어, 관계 맺은 것(만남)과 맺지 않은 것의 엄청난 차이를 지적합니다. 『노자』에 관해서는 무위無爲와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주로 설명합니다만, 제게는 대직약굴大直若屈—최고의 곧음은 마치 굽은 것 같다; 대교약졸大巧若拙—최고의 기교는 마치 졸렬한 것과 같다; 대변약눌大辯若訥—최고의 언변은 마치 말을 더듬는 듯하다, 이 세 개의 대구가 와 닿았습니다.

『장자』의 기계론에서는 ‘노동과 생명’의 가치를 읽습니다. “노동은 ‘생명의 존재 형식’”이라는 말은, 책을 덮고도 곱씹게 됩니다. 『묵자』의 이웃사랑도 언급하고, 끝으로 『한비자』를 들려주며 이론보다 현실이 중요하다는 지적을 잊지 않습니다. 말미에서 망국론亡國論을 언급한 것은 시의적절합니다.

1부 요약의 끝문장을 고민하다가, 『노자』 강의의 끝말을 인용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이 더 읽기 바랍니다.”(137)


# 2부 ::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

1부에서 세계를 공부했다면, 2부는 인간(과 나)에 관해 공부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더불어 숲』 들에서 가져온 에피소드들을 읽습니다. 1부가 『강의』의 안내서였다면, 2부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해설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적어도 인간 이해에 있어서 감옥은 대학”이었다고 술회합니다. “20년 세월은 사회학 교실, 역사학 교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간학’의 교실이었습니다.”(205)

2부의 많은 에피소드 중에서 여러분 마음에 각인된 것은 무엇이었는지요? 저는 우선, 저자의 자기개조기가 기억납니다. 10년, 20년에 걸쳐 부단히 변화를 꾀하는 자세도, 똘레랑스라든지 노마디즘같은 철학언어를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는 일상언어로 설명하는 표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출소 전 수의를 입고 앉았던 호텔 라운지 커피숍을 출소 후 찾아가, 변화와 개조에 관해 사색하는 대목에서 멈춰섰습니다. 저자는, 과연 자기가 변한 것인가, 하는 상념에
빠져 있다가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_내가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근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 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43)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239)라던 말씀이 이런 뜻이었습니다.

위선과 위악을 구분하자는 가르침도 기억납니다. “테러가 약자의 전쟁이라면, 전쟁은 강자의 테러입니다”(270) 라는 전복적 문장이 여기 있습니다.

야간 작업하다가 짜장면 얻어 먹을 줄 착각했다는 에피소드에는 내심 뜨끔했습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기대하며 살았거든요. 바로 앞에 소개됐던, 밤마다 문짝 소리를 크게 내던 청년의 한마디도 강렬했습니다. “없이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사정을 구구절절 다 얘기하면서 살아요? 그냥 욕먹으면서 사는 거지요.”(325) 비난과 질책에 방어하고 변명하기 바빴던 나를 떠올렸습니다.

소지품 중에서 상품 아닌 것을 찾아보자던 얘기는 평소 제 생각과 부합했습니다. 선생님은, 감옥에서와 달리, 지금 자신에게는 독서도 상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는, 전도사 시절 제 성경읽기와 설교도 일종의 상품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자각했었고, 괴로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전락하지 않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피 뽑기 위해 물을 마시면서 자신은 양심적이라고 항변했던 사람을 읽을 땐, 부끄러움을 일깨워줬던 영화 <동주>를 떠올렸습니다. 옥중에서 햇볕 때문에 자살하지 않았고,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를 삶의 이유로 삼았다던 말씀에는 괜시리 숙연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을 두고, 투옥 경험을 우려 먹으며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하긴 최영미 시인이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썪은 뒤에 / 그는 여우가 되었다”(<돼지의 변신> 중에서)라고 쓴 적이 있지요. (여우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만...) 하지만 대학 교수들은 10년, 15년 공부한 것 갖고 평생을 우려 먹는데, 20년의 진한 공부를 여생의 거리로 삼는들 무슨 문제가 될까요? 오히려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이 말한 것처럼, “여정에서 돌아와 자신의 비범한 경험을 나눔으로써 공동체에 깊은 유익을 끼치는 이타적인 행위”로 여정을 끝낸 영웅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요? 비약한 경험과 사유를 종교적 권위로 포장하는 뭇 인종들에 비하면 충분히 영웅적이지 않을까요.


***나가는 말

책을 덮으며 반성했습니다. 아니, 반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성하게 하는 능력이야말로 선생님 글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그 힘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선생님을 마음의 스승으로 모셨을 겁니다. 아무튼 저의 반성은 이것입니다. 여태껏 나의 공부는 머리에서 머리를 맴도는 것뿐이었구나. 손과 발은커녕 마음 언저리에도 닿지 못했구나. 이렇고 또 저렇던 관계의 실패들은, 내가 변화하지 않았다는 증거였구나. 선생님께서 독서는 삼독三讀이라,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나를 읽어야 한다 하셨는데, 저는 저 하나 쪼끔 읽었을 뿐입니다. 책을 덮었으니, 선생님께서 요청하신 ‘여행’을 시도해야겠습니다.

딱 한번, 그것도 멀리서 뵀던 선생님의 얼굴과 목소리가 괜히 그립습니다. 그리움은 남은 자들의 몫이라니, 저는 늘 그리워하며 살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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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삶
헨리 나우웬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0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기도에 관한 책들은 넘쳐난다. 내 서가에도 여러 권 꽂혀 있다. 하지만 선물해야 할 때엔 망설이지 않고 이 책을 택한다. 누구보다 친절하고 부드럽게, 기도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기도를 존재의 축으로 삼˝(32쪽)고 싶은 분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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