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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 국제노동기구(ILO) 이코노미스트 이상헌이 전하는 사람, 노동, 경제학의 풍경
이상헌 지음 / 생각의힘 / 2015년 7월
평점 :
_언저리어강독모임
_2015년 10월 6일(화)
*** 들어가는 글
처음엔 편집장 때문에 읽기 시작했다. 책의 책임 편집을 맡은 사람은 나에게 제2의 독서 인생을 열어준 분이다. 그가 추천하는 책들 때문에 내 지갑은 늘 가벼웠었다. 한때 내 책장의 40%가 그가 일하던 출판사의 책들이었던 적도 있다. 새로운 출판사로 이직한 후 출간한 첫 책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구입해 읽었다.
다른 동기도 없지 않았다. 마침 요새 경제(와 노동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기독교의 경전을 공부하면서 ‘정치’와 ‘경제’가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성서는 외형상 ‘종교’를 말하지만, 그 속살은 결국 정치와 경제였다. 성서가 줄기차게 강조하는 ‘하나님의 통치’는 결국 ‘정치’ 문제이고, 성서에서 가장 빛나는 법안인 ‘희년법’은 결국 ‘경제’법이다. 이 모든 것이, 야웨란 신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먹어야 사는 존재고,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먹는 문제가 경제 아니고 또 무엇이며, 더불어 사는 문제는 정치 아니고 또 무엇일까? 때문에 요새 내 관심사는 ‘경제’이다. (시대적 요청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에 함몰되지 않는 삶과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에 관심이 있고, 무엇보다 성서의 근거를 들어 돌파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서론이 길었다. 재빨리 돌아오며 마무리하자만, 하여튼 의리와 신뢰로 읽기 시작했지만 이내 내용에 사로잡혔다. 경제학에 무지한 나 같은 사람도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전문성과 대중성을 적절히 겸비한 칼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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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총 4부로 구성되었다. 흩어진 칼럼들을 모아 주제별로 엮은 듯 했다. 1부의 제목은 ‘일터의 풍경’이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인권에 관해 말한다. 시작하는 글의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저자는 “노동자는 정말 게으른가”(17쪽) 라고 묻는다. 이러한 “편견”에 적절한 인용과 상세한 설명으로 맞선다.
“회사 주차장에 주차된 직원들의 차가 해마다 좋아지는 걸 보는 게 즐거움”이라는 영국 애드미럴(Admiral) 보험사 사장 이야기는 한편의 영웅담 같았다. 나를 감동(?)시킨 대목은 생뚱맞게도 다음 대목이었다.
_임원이나 신입사원이나 모두 똑같은 의자를 쓴다. 누군가 조금 나은 의자를 쓰게 되면, 인간인지라 욕심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좋은 의자에 신경이 가게 마련이다. 이런 것으로 회사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도 경계한다. 그래서 모두에게 좋은 의자를 준다. (27쪽)
지난 이야기지만 일터에서 책상/의자 교체 문제로 작은 소음이 있었더랬다. 누가 조금 더 큰 책상을 쓰고 누가 새 의자를 쓰는, 어찌 보면 유치한 문제였는데 미묘하게 민감한 분위기가 연출됐었다. 신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감수성이 일개(?) CEO보다 못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노동자를 개무시하는 한국 기업을 다룬 꼭지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격을 보여주며 착각에서 헤어나오라는 듯 했다. 2013년 영국에서 노동자의 종교를 고려하지 않은 업무 배치로 한바탕 소란이 있었나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달랐다.
_한국의 어느 대학은 청소부에게 콧노래를 허하지 않았다. 종교가 ‘신념’이라면, 콧노래는 ‘본능’일 테다. 남들은 종교적 신념과 직무 배치를 고민하는데, 우린 너무 치사하지 않나. (37쪽)
대한민국이 도달한 지점은 딱 여기까지였다. 일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신명나게 일할 수 있을까...... 우리의 노동 감수성은 왜 이리 천박한가...... 누워서 침 뱉기와 같은 생각들이 줄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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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가 노동하는 개인들의 이야기였다면, 2부 “경제학과의 불화”는 헛발질하는 경제학에 관한 글들이다. 사실 경제학의 기초도 모르기 때문에 약간 뻑뻑하게 넘어갔다. (결코 저자의 탓이 아니라 무지한 독자인 나님의 탓이다.)
요새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를 궁금해하는 나에게 “자본주의, 그동안 수고하였습니다”(65쪽)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명쾌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 질문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토마 피케티에 관한 글이 빠질 수 없었다. 대학원 수업에서 경제와 기업 윤리를 가르치는 어느 교수님은 피케티의 이름도 정확히 모른 채 그의 책에 쿨한 무관심을 보이던데, 하여튼 이젠 “소득분배와 자산 불평등을 논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피케티를 거론하지 않고서는, 경제정책을 논하기란 어렵게 되었다.”(100쪽)는 상황을 알고는 계셨을까...... 깊은 빡침이 되살아났다.
경제학자 쿠즈네츠와 그의 히트 상품 ‘GDP’에 관한 얘기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매우 왜곡된 정보들을 배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2장의 내용이 더욱 많지만, 경제학에 밝지 않아 이 정도만 쓰고 말아야겠다. (아! ‘최고임금제’를 상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는 말은 꼭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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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사람을 읽다”에서는 인간다운 세상을 꿈꿨던, 혹은 실패한 사람들의 일화를 소개한다. 위인(?)들의 감춰진 역사도 있었다.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만, 그 때문에 받은 곤경까지는 자세히 몰랐었다. 아인슈타인이 흑인 차별 문제와 팔레스타인 문제에 개입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엄친아(나는 천재 아빠는 부자)였다는 것도 나는 몰랐고, (물론 그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는 아니었다만...) 러셀의 여자 관계도 처음 알았다.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백석, 마종기, 황현산... 내가 코를 처박고 읽었던 문인들의 이야기에 차라리 나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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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4부 “기억을 위하여”에서는 함께 투쟁(이란 표현은 좀 거칠다. ‘애쓰다’라는 뜻으로 읽어도 좋겠다.)하며 살았던 (그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냈다. 사상의 스승이자 동지였던 김수행 교수와 밀양의 할머니들과 굴뚝에 올라선 이(아마 김진숙을 두고 쓴 글이겠지...)와 팽목항의 부모들을 새겨 넣었다. 결국은 사람들 때문에 싸우고 사람들 때문에 힘겨워도, 사람들 때문에 위로 받고 또 의지를 삼으며 살아가기 마련이라고, 넌지시 말하는 듯 했다.
*** 나가는 글
찬사만 늘어놓는 서평은 차라리 조롱에 가깝다지만, 딱히 흠잡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읽었다. 저자의 글솜씨가 그만큼 유려했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주는 것도 모자라, 비유력까지 탁월했다. 간단하지만 명료한 비유들이 기억난다. 그리스의 위기를 그리스 신화의 강들에 비유하며 쓴 글도(127쪽), 금융 자본의 문제를 간파한 헨리 포드가 유대인들을 몰아내려는 대목을 두고 “매번 한 아이가 독식하는 구슬놀이라면, 구슬을 나누어 가지도록 규칙을 바꾸면 된다. 손재주가 뛰어난 아이를 두들겨 패고 쫓아낼 일은 아니다.”(125쪽)라고 설명한 부분도 맘에 들었다.
무엇보다 저자가 사람답게 일하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서 좋았다. 이 정도 상식선의 이야기에 즐겁고 흥분해서도 부끄러웠고, 이 정도 얘기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시대와 또 교회를 생각하며 부끄러웠다. 즐거워하며 또 부끄러워하며, 한 권의 책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