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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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언저리어강독모임
_2016년 3월 19일 (토)



***들어가는 말

갖고 있는 책을 또 사는 바보가, 저만은 아니겠지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개정판’에 유혹당하며, 컬러 도판들이 대량 추가됐다는 문구에 치명상을 입었던 적이 없지 않을 겁니다. 최근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개정2판을 들여놓고 하는 자위입니다. 여하튼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_‘황금시대’의 전설은 아득히 먼 옛날부터 있어왔다. 우리는 오래된 것을 존중하는 태도의 사회학적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

최근 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가 떠올랐습니다. 영화는, 21세기를 살면서 1920년대를 동경하는 남자와, 1920년대를 살면서 19세기 말을 동경하는 여자와, 19세기 말을 살면서 르네상스 시대를 동경하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황금시대’는 허상이라고 꼬집습니다.

20세기에 크게 활동했던 문화예술인들이 2000년대 말부터 재조명 받는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불후의 명곡’에 등장하는 새파란(?) ‘전설’들을 보면서 하는 얘깁니다. 한편으로는, 내 나이가 언제 이렇게 됐을까 하며 자조의 웃음도 짓습니다. 특히,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등질 때엔 그 기분이 묘합니다.

2014년 가을, 처음으로 유명인의 죽음을 추모했던 기억이 납니다. 故 신해철 씨의 비보를 들은 날, 그의 음악을 틀어놓고 술 한 잔과 기도를 올렸습니다. 10대 중반 텅 비어있던 마음을 채워줬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리고 올해 초, 또 한 번 유명인사의 죽음을 추모했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운명하셨을 때입니다. 주일이었음에도 빈소를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말과 글을 통해 마음에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직접 배운 적 없더라도, 마음의 스승으로 여겼을 테지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이런 마음에서 3월의 책은 『담론』으로 정했습니다.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가 붙은 책입니다.


 ***책 속으로

# 1부 ::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담론』은 성공회대에서 했던 강의를 녹취하여 정리한 책입니다. 선생님은 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자신만의 독법으로 동양 고전들을 강의하셨습니다. 그 결실들이 지난 2004년,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으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담론』의 1부 역시 동양고전 강독입니다.

『담론』의 1부는 『강의』에서 다뤘던 책들을 거의 그대로 다룹니다만, 『강의』보다 분량이 적고 설명도 쉽습니다. 『강의』는, 동양고전(과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저로서는, 읽기 어려웠습니다. 그에 비해 『담론』은, 어르신 곁에서 옛이야기를 듣는 듯 했습니다. 고전의 주제에 맞춰 생생한 경험들을 예로 들어줍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언어를 뛰어넘고 사실을 뛰어넘는 진실의 창조”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할 때, 신입 재소자 불러 자전적 얘기를 할 때마다 이야기를 각색하는 노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평합니다.

_만약 저분이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최소한 각색해서 들려주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색한 인생사에는 이루지 못한 소망도 담겨 있고, 반성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인의 실제 인생사와 각색된 인생사를 각각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전자를 ‘사실’이라고 하고 후자를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저 노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망과 반성이 있는 진실의 주인공으로 그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1)

이렇게 적절하게 예시를 들어 설명하니 훨씬 쉽게 읽힙니다. 『담론』을 먼저 읽고, 상응하는 『강의』의 장들을 읽으면 알맞겠습니다.

고전 강독이라고 해서 활자의 뜻만을 새기지 않습니다. 새긴 뜻을 바탕으로 반드시 현재를 읽습니다. 각 장의 내용들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시경』을 읽으며, 사실을 넘어 진실을 읽자고 역설합니다. 『초사』를 읽고서는, 문사철로 얻는 추상력과 함께, 상상력도 함께 배양하자고 말합니다. 『주역』이 괘를 읽는 방식을 통해, 존재론에서부터 관계론으로 이동하자고 권합니다. (수번囚番으로 불리던 사람에게 이름을 묻고는, 이름에 한 일 자를 확인하더니, “뉘 집 큰 아들이 징역 와 있구먼.”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논어』를 읽을 때엔 화동 담론을 중심으로 화화和化하자고 합니다. 『맹자』의 ‘이양역지以羊易之—양과 소를 바꾼 이야기’를 들어, 관계 맺은 것(만남)과 맺지 않은 것의 엄청난 차이를 지적합니다. 『노자』에 관해서는 무위無爲와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주로 설명합니다만, 제게는 대직약굴大直若屈—최고의 곧음은 마치 굽은 것 같다; 대교약졸大巧若拙—최고의 기교는 마치 졸렬한 것과 같다; 대변약눌大辯若訥—최고의 언변은 마치 말을 더듬는 듯하다, 이 세 개의 대구가 와 닿았습니다.

『장자』의 기계론에서는 ‘노동과 생명’의 가치를 읽습니다. “노동은 ‘생명의 존재 형식’”이라는 말은, 책을 덮고도 곱씹게 됩니다. 『묵자』의 이웃사랑도 언급하고, 끝으로 『한비자』를 들려주며 이론보다 현실이 중요하다는 지적을 잊지 않습니다. 말미에서 망국론亡國論을 언급한 것은 시의적절합니다.

1부 요약의 끝문장을 고민하다가, 『노자』 강의의 끝말을 인용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이 더 읽기 바랍니다.”(137)


# 2부 ::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

1부에서 세계를 공부했다면, 2부는 인간(과 나)에 관해 공부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더불어 숲』 들에서 가져온 에피소드들을 읽습니다. 1부가 『강의』의 안내서였다면, 2부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해설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적어도 인간 이해에 있어서 감옥은 대학”이었다고 술회합니다. “20년 세월은 사회학 교실, 역사학 교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간학’의 교실이었습니다.”(205)

2부의 많은 에피소드 중에서 여러분 마음에 각인된 것은 무엇이었는지요? 저는 우선, 저자의 자기개조기가 기억납니다. 10년, 20년에 걸쳐 부단히 변화를 꾀하는 자세도, 똘레랑스라든지 노마디즘같은 철학언어를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는 일상언어로 설명하는 표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출소 전 수의를 입고 앉았던 호텔 라운지 커피숍을 출소 후 찾아가, 변화와 개조에 관해 사색하는 대목에서 멈춰섰습니다. 저자는, 과연 자기가 변한 것인가, 하는 상념에
빠져 있다가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_내가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근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 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43)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239)라던 말씀이 이런 뜻이었습니다.

위선과 위악을 구분하자는 가르침도 기억납니다. “테러가 약자의 전쟁이라면, 전쟁은 강자의 테러입니다”(270) 라는 전복적 문장이 여기 있습니다.

야간 작업하다가 짜장면 얻어 먹을 줄 착각했다는 에피소드에는 내심 뜨끔했습니다. 저 역시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기대하며 살았거든요. 바로 앞에 소개됐던, 밤마다 문짝 소리를 크게 내던 청년의 한마디도 강렬했습니다. “없이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사정을 구구절절 다 얘기하면서 살아요? 그냥 욕먹으면서 사는 거지요.”(325) 비난과 질책에 방어하고 변명하기 바빴던 나를 떠올렸습니다.

소지품 중에서 상품 아닌 것을 찾아보자던 얘기는 평소 제 생각과 부합했습니다. 선생님은, 감옥에서와 달리, 지금 자신에게는 독서도 상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는, 전도사 시절 제 성경읽기와 설교도 일종의 상품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자각했었고, 괴로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전락하지 않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피 뽑기 위해 물을 마시면서 자신은 양심적이라고 항변했던 사람을 읽을 땐, 부끄러움을 일깨워줬던 영화 <동주>를 떠올렸습니다. 옥중에서 햇볕 때문에 자살하지 않았고, 하루하루의 깨달음과 공부를 삶의 이유로 삼았다던 말씀에는 괜시리 숙연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을 두고, 투옥 경험을 우려 먹으며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하긴 최영미 시인이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썪은 뒤에 / 그는 여우가 되었다”(<돼지의 변신> 중에서)라고 쓴 적이 있지요. (여우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만...) 하지만 대학 교수들은 10년, 15년 공부한 것 갖고 평생을 우려 먹는데, 20년의 진한 공부를 여생의 거리로 삼는들 무슨 문제가 될까요? 오히려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이 말한 것처럼, “여정에서 돌아와 자신의 비범한 경험을 나눔으로써 공동체에 깊은 유익을 끼치는 이타적인 행위”로 여정을 끝낸 영웅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요? 비약한 경험과 사유를 종교적 권위로 포장하는 뭇 인종들에 비하면 충분히 영웅적이지 않을까요.


***나가는 말

책을 덮으며 반성했습니다. 아니, 반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성하게 하는 능력이야말로 선생님 글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그 힘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선생님을 마음의 스승으로 모셨을 겁니다. 아무튼 저의 반성은 이것입니다. 여태껏 나의 공부는 머리에서 머리를 맴도는 것뿐이었구나. 손과 발은커녕 마음 언저리에도 닿지 못했구나. 이렇고 또 저렇던 관계의 실패들은, 내가 변화하지 않았다는 증거였구나. 선생님께서 독서는 삼독三讀이라,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나를 읽어야 한다 하셨는데, 저는 저 하나 쪼끔 읽었을 뿐입니다. 책을 덮었으니, 선생님께서 요청하신 ‘여행’을 시도해야겠습니다.

딱 한번, 그것도 멀리서 뵀던 선생님의 얼굴과 목소리가 괜히 그립습니다. 그리움은 남은 자들의 몫이라니, 저는 늘 그리워하며 살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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