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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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언저리어강독모임

_2011년 4월 2일 (토)

 

 

지금 시각은 4월 2일 오전 2시 14분. 10분 전에 <가난한 사람들>을 완독했습니다. 분량이 짧아 망정이지, 습관적인 게으름 때문에 이번에도 벌금을 물 뻔 했네요. 천만 다행입니다. 이왕에 벌금 얘기가 나왔으니, 저의 재정 상태 얘기로 글을 시작할까 합니다. 며칠 전 통장 잔고를 살펴보다가 화들짝 놀랐었거든요. 월급일 지난 지 보름도 채 안 됐는데, 급여의 60%가 사라져 있는 겁니다. 카드 명세서를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헤프게 쓰진 않은 것 같은데, (본인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수중에 돈이 없는 거에요. 약간의 공황 상태를 포함한 멍한 정신으로 부랴부랴 남은 20일을 버틸 궁리를 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외식/커피/택시를 끊고 필수 지출 내역들을 대강 추려보니, 빠듯하게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 다음 날부터 학교 친구들을 만나서는 ‘나 돈 없어’를 연발하며 커피도 안 마시고, 밥도 얻어먹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나마 어머니께서 보내시는 부식 덕분에 밥 안 굶고, 아버지께서 대주시는 집세 덕분에 한데서 잠 안 자고, 동생이 내주는 난방비 덕분에 추위에 안 떠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제 처지가 제부쉬낀만 하겠습니까마는, 그나마 이런 상황 덕에 소설 속의 궁핍한 주인공들의 처지가 아주 멀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저에겐 자발적 가난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향했던 나사렛 예수의 삶에 한 발짝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자발적 가난은 선택이 아니라고 늘 생각하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 ‘자발적’이란 말조차 오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부쉬낀과 그 주위에 그득그득한, 온갖 몸부림을 쳐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상대와 팔려가듯 혼인을 올리는 바렌까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어째서 어떤 사람은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운명의 새가 행운을 점지해주고, 왜 어떤 사람은 양육원에서 태어난단 말입니까!’(169) 라고 부르짖는 제부쉬낀의 절규 앞에서, 사랑하는 바렌까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마부들’이 끄는 ‘거울처럼 맑은 유리창’이 달린 ‘비로드와 비단’으로 장식된 마차에 태우고 싶지만,(169) 결국 마누라 따위는 집에 팽개치고 ‘토끼나 잡으러’ 다닐 비꼬프 같은 인간에게 보내야 하는 제부쉬낀의 절망 앞에서 그렇습니다.(215)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자발적 가난’이라는 관념적 명제는 참으로 칭송 받을만한 덕목이라, 장려되어야 할 미덕이라 생각하지만, 막상 ‘가난한 삶’ 자체는 못 견뎌 할 제 자신입니다. ‘가난한 삶’이라는 단어가 멀게 느껴진다면, ‘구질구질한’ 이란 형용사가 더 잘 어울리겠네요. 다시 말해, ‘자발적 가난’은 원하지만, ‘옷 사이로 맨 팔뚝이 보인다든지 단추가 실에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는 것은 정말 무서우리만큼 부끄러운 일’(131)이라는 제부쉬낀의 처지가 나의 현실이 되는 일은 결코 바라지 않는 게지요. 가난하더라도 모양 빠지는 삶은 도무지 싫은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어쩜 저는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발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았을 때 주위 사람들이 쏟아낼 존경 어린 눈빛이 흐뭇해 ‘자발적 가난’을 지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니, 제 자신의 천박함이 몹시 눈꼴사납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저는 가난은 참아도 교양 없음은 못 참더군요. 막말로, 누군가 저에게 밥을 사주지 않는 것은, 돈을 쥐어주지 않는 것은 참을만합니다. 하지만 지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대는 반갑지 않아 합니다. 그 때문에 뽀끄로프스끼에게 일말의 동질감(?)을 느꼈나 봅니다. 그도 ‘돈만 생겼다 하면 바로 책을 사러 나갔다’죠?(49) 소설의 역자인 석영중 교수가 평론의 말미에 언급한 ‘미학과 존재론의 상관성’(227)이 와 닿은 이유도 거기에 있나 봅니다. ‘한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읽는 책, 그가 쓰는 글이라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미학 공식’(227)에 저 또한 십분 공감합니다.

 

종합하면, 제가 꿈꾸는 ‘자발적 가난’의 실체란, 가난함을 선택함으로 뭇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고, 게다가 학식도 풍부하여 더욱 존경 받는 상태인 게죠. 뒤집어 말해, 가난도 좋고 청렴도 좋고 다 좋지만, 가난 때문에 무시 당하고 싶진 않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소설이 보여주는 인간사 현실은 냉혹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단지 수중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어김없이 인격적인 모욕을 당합니다. 제부쉬낀의 말을 들어보세요. ‘바렌까, 제 목을 조이는 것은 사람들이에요, 그렇죠? 제 몫을 조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느껴지는 불안감, 사람들의 수군거림, 야릇한 미소, 비웃음입니다.’(153) 소유로 사람의 가치를 가늠하는 일은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네요. 짧은 한숨 섞인 탄식 외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요?

 

A4 한 장이 다 채워져 가지만, 글은 결론이 없이 떠도는 느낌입니다. 가난을 지향하는 관념, 일상에서 경험하는 경제적 쪼들림, 경제적 능력이 사람됨을 결정하는 현실 속에 끼여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딱히 해결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지향도 놓지 않고 현실도 외면하지 않은 채, 그 틈바구니 속에서 좌충우돌 하다 보면 조금씩은 영글어 가겠지요. 그런 소박한 바람이라도 있어야 다 함께 일관적으로 미쳐가는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애써 자위해 봅니다.

 

여하튼,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우리는 묵은지 감자탕을 거하게(?) 먹은 뒤, 향긋한 커피를 앞에 두고 있겠죠? ‘가난한 사람들’을 입에 올리며 말입니다. 참 좋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2011년 4월 2일 새벽 3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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