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치학 - 기독교 세계 이후 교회의 형성과 실천
스탠리 하우워어스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평

“After Christendom?”에 대한 대답으로 살기



『교회의 정치학』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백지윤 옮김, IVP: 2019.
글_ 김주경
2020년 1월 15일(수)

모르긴 몰라도, 이 책의 표지 디자이너는 운신의 폭이 작았을 것이다. 편집자가 강하게 개입한 흔적이 역력하다. 원서와 역서의 제목과 부제 전부를 넣어서 텍스트 디자인으로만 꾸몄다. 역서의 제목(교회의 정치학)과 부제(기독교 세계 이후 교회의 형성과 실천) 모두 의역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직역하기는 까다로우면서도 묻어두기는 아까웠을 것이다.

원서의 제목은 ‘크리스텐덤 이후(After Christendom)?’이고, 부제는 ‘자유와 정의와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이 나쁜 것이라면, 교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How the Church is to Behave if Freedom, Justice, and a Christian Nation are Bad Ideas)?’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나 정의나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은 ‘굳 아이디어(good ideas)’이다. 저자는 달리 묻는다. 그것이 ‘배드 아이디어(bad ideas)’라면?

정의나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자유주의(liberalism)에 점령당한 정의와 자유라는 개념이 나쁘다는 말이다. 여담이지만, 이 책이 두O노나 규O과 같은 출판사에서 발간되고, 책 제목을 ‘자유주의, 교회를 점령하다’ 또는 ‘자유주의에 물든 기독교’ 정도로 뽑았으면, 보수 기독교인의 지갑을 쉽게 열었을 것이다. 자유주의를 신학적 자유주의로 이해할 공산이 크다. 안타깝게도(?) 저자가 문제 삼는 자유주의는 정치사상으로서의 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사상이다. 전제 왕정 및 봉건시대에 반발하며 탄생했고, 근대 이후 서구 사회의 지배적 이념이 되었다. ‘지배적 이념’이란 말에 주목하자. 자유주의는 정치·사회의 구조를 결정하다 못해 교회의 모습까지 규정했다.

저자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서구의 혹은 미국의) 기독교는 문화적 국교의 지위를 획득‘했었’다가 상실‘하고 있는’ “애매한” 상태이다(37). 자유주의 사회에서 문화적 국교(國敎)의 지위를 획득했을 때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 것으로 전락했고, 그리스도인의 신념과 실천은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종교는 사적(private)이라고 불리는 새롭게 창조된 공간으로 사회적·정치적으로 추방되어야 했다.”(43) 한마디로, 성경이 아니라 자유주의 사상이 현실 기독교를 형성하는 대서사(meta-narrative)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정의, 자유, 교회, 성(性)과 같은 주제를 성경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여 이해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을 돕고 구조적 불의를 제거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개인의 천부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정의(正義)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 개념조차 자유주의의 산물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érrez)의 해방신학조차 그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개인의 요구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신념이 기저에 자리하고 있다. 결국 어떻게 됐는가? 개인은 민족국가에 행복과 복지를 요구했고, 민족국가는 병역의 의무를 지움으로써 개인을 구속했다.

종교의 자유 역시 자유주의의 산물이다. 종교의 자유를 천명한 미국의 수정헌법 1조는 오히려 교회와 사회에 재앙이 되었다. 국가가 종교를 허락한 셈이고, 종교는 국가의 허락 안에서 국가 체제의 존속에 복무하게 되었다. 종교를 개인의 영역에 두려는 사람(R. 로티)이나 종교를 시민사회에 확대하려는 사람(W. 베넷)이나 너나없이 같은 전제를 공유한다. 광신자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믿는 것은 가능하지만, 너무 세게 믿은 나머지 사회를 뒤집어버리지는 말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우리에게 종교의 자유가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교회 안에 국가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이다(101).

같은 맥락에서 교회의 현실을 점검해봐야 한다. 자유주의 사상 아래에서 교회는 대안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돌봄의 공동체에 머물게 되었다. “교회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인생의 위기를 잘 통과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섬김을 제공하는 일은 훌륭하게 해내지만, 이것은 단지 교회가 우리 문화에서 사적 영역이 되었음을 보여준다.”(131) 자유주의는 인간의 가능성을 크게 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것을 훈련해야 하고 피조물이기를 배워야 한다. 교회는 돌봄의 공동체이면서 훈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성(性)의 영역 또한 다분히 정치의 문제이다. 자유주의 사회는 성과 사랑과 결혼을 개인의 선택으로 두려 하지만, 성은 개인적 친밀감의 문제라기보다 권력 관계의 문제이며, 사랑은 좋은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할 덕목이고, 결혼은 사랑을 배우는 장이자 서로를 위한 섬김의 장이므로 결혼이나 독신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 성과 결혼은 ‘관계’의 문제이다. 서로를 지배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참된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 이것을 교회 공동체의 서사로 삼아야 한다.

마지막 장의 부제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이다. 자유주의 사회는 객관적이자 공정하게 교육한다고 자부하지만, 국가와 인종과 권력 관계의 지위를 한 치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를 정당화하는 이야기에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190) “신약성경에서는 그러한 파괴적 관습을 권세라고 부른다.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구원은 이러한 권세와 충돌하는 것 그리고 그 권세를 정복하는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196)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자명하다. 세상에는 구원이 필요하다. “구원은 모든 창조 세계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이도록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다.”(53) 하나님의 역사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드러난다. 저자가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할 때,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 배타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이 하나의 정치적 대안이며, 교회라고 불리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존재와 동떨어져서는 세상이 이 대안을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52) 교회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헤게모니의 획득이 아니라 순교의 죽음으로, 세상에 대응한다. 자유주의적 사고는 세상에 목숨을 걸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교회는 응답한다. “진정한 정치는 죽는 기술에 관한 것”이다.(61) 그 옛날 순교자처럼, “당신들은 우리를 죽일 수 있지만, 우리 죽음의 의미를 결정할 수는 없다.”(55)

저자는 이 책이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의 영향권 아래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요더는 『예수의 정치학』(IVP 역간)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삶의 실제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매킨타이어는 주요 저작을 통해 개인의 서사는 거대한 서사 안에 위치함을 역설한다. 두 사람의 영향을 받은 흔적은 다음 문단에 진하게 배어 있다.

“이는 기독교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더하기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우리가 믿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부름받은 것 때문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혹은 변화된 자기 이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일련의 다른 관습을 가진 다른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다.”(145).

저자의 결론은 단순하다. 진정한 교회가 되자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결론에 비해 책을 읽어나가는 일은 쉽지 않다. 저자의 배경인 재세례파의 입장이나 저자가 비판하는 철학 사상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의 글과 주장을 인용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초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번역은 커다란 걸림돌이다. 출발어의 문장 구조를 그대로 옮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모어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독해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출판사 프로세스의 문제이다.

더군다나 저자의 주장은 오해를 받기에 딱 적절하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받아들이라고 ‘명령’하는 근본주의 목사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대목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선의의 해석학’을 총동원하여 읽어야 한다. 선의의 해석학은 내가 만든 용어인데, 어떤 주장/행동의 배경에는 발언자/행위자의 가장 선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믿어주는 것이다. 학문적 글을 읽을 때 특히,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선하게 읽어줘야 한다. 비판은 그 이후의 일이다.

이 책을 비판하기 위해 리처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IVP 역간)를 소환하는 것은 손쉬운 방법이지만 왠지 내키지 않는다. 저자도 니버가 비판하는 바를 알고 있을뿐더러, 저자가 분파주의를 조장하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전통의 자리에서 서면, 저자의 입장이 분파주의적으로 보일 뿐이다. 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신학적 보수주의자와 신학적 자유주의자 양측에서 공격을 받기에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저자를 변호하면서 다소 순진하게 말하자면, 저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하려는 일은 종교를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만 않으면 ‘종교를 갖는 것도’ 괜찮다고들 생각하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습관들을 기르도록 돕는 것이었다. 나는 기독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는 기독교가 좋은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하려 했다.”(『한나의 아이』, 377)

인간의 중대한 착각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자신은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 데에 있다(신형철).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한국 기독교가 썩어가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으려 한다’고 착각하는지 모른다. 저자의 통찰에 기대어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 이 책은 뼛속까지 침투한 현대 사상의 잔류물을 가려내도록 도와준다. 김기현 목사는 이 책의 추천사로 “당신이 촛불을 밝히든 태극기를 흔들든 그 사이에 끼어 있든, 하우어워스는 당신을 불태우고 당신의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라고 썼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몇 가지 난점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정치학(이하 교회정)』을 읽어야 한다. 저자의 대표작 제목을 빌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하 하나백, 복있는사람 역간)”이 되기 위하여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교회정』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교회정』이 『하나백』보다 늦게 출간되었지만, 『교회정』은 『하나백』의 후속작이 아니라 프리퀄(prequel)이라고 했다(10). 서문을 읽을 땐 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책을 덮은 후에 『하나백』을 다시 읽으니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교회정』의 바탕에서 『하나백』을 읽으면 『하나백』의 주장이 한층 날카롭게 다가온다.

저자의 입장에 부합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 될 때만 『하나백』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정』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서의 제목인) “After Christendom?”에 대한 대답으로 존재할 때만 우리는 『교회정』을 제대로 읽은 셈이다. 니버는 분파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분파주의의 저력을 경시하지 않았다.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이 주는 매력은 이처럼 입술의 고백과 행동이 중복(reduplication)되는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언행일치를 이룰 수만 있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임을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입증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그리스도와 문화』, 154)

휘황찬란한 신학적 언사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위한 것이고, 것이어야 한다. 이 삶에 관심 있는 신자에게 일독을 권하며, 『하나백』의 문장을 가져와서 글의 마침으로 삼는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지 않고서는 그를 알 수 없다.”(『하나백』, 80)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안개 2020-01-1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스앤조이> 서평단에 선정되어 작성한 글입니다.
 
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의 끝에서 시작해 사람에게 닿다>


- 서평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지음, 메멘토, 2015)




‘다르다.’ 

책을 덮자마자 이 한마디가 떠올랐다. 


한 십여 년 전부터 글쓰기에 관심을 두었다. 나의 관심은, 누에가 실을 뽑듯, 가늘었으나 끊이지 않았다. 글쓰기 강좌에 참여했고, 쓰기를 가르치는 책도 몇 권 샀다. 글쓰기 책들은 공통의 문법을 소유했다. 글의 종류와 성격을 설정하는 방법(수필은 이렇게 사설은 저렇게라든지), 흐름과 구성을 조직하는 방법(도입은 이렇게 맺음은 저렇게라든지), 단어와 문장을 다듬는 방법(생생한 단어를 권장하고 번역 투의 문장을 질타한다든지) 등을 일러주는 식이었다.


이러한 글쓰기 책은 ‘우리는 왜 글을 써야 하는가?’ 정도의 질문으로 동기를 부여하며 시작한다. 반면 이 책은, ‘나(저자)는 왜 쓰기 시작했는가?’ 하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질문이 실존을 건드리는 만큼 답변의 농도도 진하다. “누구나 사노라면 거대한 물살에 떠밀려 가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기를 쓰고 앞을 향해도 옆으로 저만치 밀려나 있기 일쑤다. 왜 내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을까,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이게 최선이고 전부일까. 그러한 물음에서 나의 글쓰기는 시작되었다.”(5-6)


한마디로 저자의 글쓰기는 삶의 ‘최전선’에서 시작되었다. “삶이 굳고 엉킬 때마다 글을 썼”고, “막힌 삶을 글로 뚫으려고 애썼다.”(9) “지금 여기가 맨 끝”이자 “맨 앞”이라는 시구처럼, 최전선은 끝과 앞의 접점이다. 삶의 끝에서 시작된 글쓰기는 삶의 앞에서 삶을 인도했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23)


책 제목인 <글쓰기의 최전선>은 본래, 저자가 이끄는 글쓰기 수업의 명칭이다. 책 전반에 걸쳐 수업의 풍경이 등장한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합평(合評)한다. 학인(學人)들은 자연스레, 나와는 다른 삶의 이력과 마주하며, 나의 좁은 경계를 넓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며, 과거의 고통에 직면한다. 결국, 자기의 언어를 갖는 데까지 도달한다. 써먹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삶 자체를 건드리는 글쓰기. 그것이 <글쓰기의 최전선>이다. 


학인 중 하나는 그 수업을 이렇게 평가했다.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187) 그렇다면 ‘사람’과 ‘삶’을 성찰하는 쓰기는 어디에 당도할까? 대답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있다. 인터뷰 쓰기와 르포르타주 쓰기. 이것은, 나를 넘어 너에게 닿는 글쓰기, 너와 나를 연대하게 하는 글쓰기, 너와 내가 사는 세상을 고쳐 읽는 글쓰기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글쓰기의 최전선>이다. 게다가, 그 최전선에서 직접 썼던 학인들의 글을 실어 현장감을 더했다. 


정리하면, 이 책에는 ‘글쓰기의 철학’이 짙게 담겼다. 그렇다고 쓰기의 ‘기술’을 빠뜨리지도 않았다. 유려한 글을 위한 비기를 압축해서 전수한다.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사람은 이 책에 실망할 것이다. 자소서 비법에 갈급한 사람, 글쓰기 책을 자기 계발서처럼 써먹고 싶은 사람, 글쓰기를 발판으로 명성과 돈을 구하는 사람. 반면 이런 사람은 이 책이 반가울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나’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 삶의 끝에서 시작하여 사람에게 닿으려는 사람.


한마디만 더 하자. 저자는 부록으로 “글쓰기 수업 시간에 읽은 책들”을 소개해두었다. 시, 소설, 산문, 르포, 인문 등, 다양한 장르에서 60여 권의 책을 추렸다. 목록 자체도 빛나지만, 더 빛나는 것은 책마다 적어둔 서너 줄의 소개글이다. 예를 들어 백석의 시집은 이렇게 소개한다. “읽을수록 뭉클해지는 언어들의 성찬. [중략] 한 편씩 낭독하는 순간, 그곳이 고향이다.” 소개글을 읽으며 연신 인터넷 서점을 뒤졌다. 맛집 리스트를 확보한 사람처럼 달큼한 포만감을 느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 평균 14권을 더 구입하면 전체 0.1%에 든다고 하네요. 그냥 저는 0.5% 선에서 만족(?)하겠나이다. ㅋㅋㅋ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알라딘 첫 주문일이 궁금해서 페이지를 뒤졌습니다. 2007년 3월이더군요. 10년 넘게 애용했다는 얘기고, 심지어 플래티넘 등급을 유지 중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껏 제 마음 속 1위 서점은 알라딘입니다. 사람 나이 18세이면 낭랑한 나이라고 하죠. 굴러가는 낙엽에도 까르르 거릴, 참 좋은 시절입니다. 18주년을 맞는 알라딘과 독자들 모두, 즐거운 독서지절(讀書之節)이길 빕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광주 5월 민주항쟁의 기록, 전면개정판
황석영.이재의.전용호 기록,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 창비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대의 증언에 바치는 부끄러운 고백


글_ 김주경 (2017년 5월 30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창비, 2017)



/

5월의 반환점을 돌았을 때, 내 맘과 가까운 사람이 내게 물었다. 80년 5월의 광주를 아느냐고. 그는 태생적으로 광주의 아픔을 체감한 사람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어.’ 예상했다는 듯 그가 대답했다. 실망도 체념도 아닌 담담한 목소리였고, 익숙하다는 반응이었다. 무엇을 모른다는 사실이 죄스러웠던 적이 또 있을까? 나는 간신히 미안하다고 말했다. 더 모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노라고 덧붙였다. 지금부터의 고백은 그 사람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

구차하더라도 변명으로 글을 연다. 나는 서울올림픽의 해에 (당시엔 국민학교라 부르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80년대의 끝자락이었지만, 여전히 반공교육이 남아 있었다. 반공 글짓기, 반공 표어 짓기, 반공 그림 그리기와 같은 대회가 줄곧 열렸다. 반공 그림 대회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친구의 뛰어난 그림을 보고 좌절했던 어린 마음이, 그 기억을 마음에 새긴 탓이다. 친구는 한국전쟁에서 수류탄을 던지는 국군의 뒷모습을 그렸다. 그것이 여덟 살 난 아이들에게 주어진 소재였다.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다 죽은 이승복 어린이는 우리의 어린 영웅이었다. (나는 이승복의 고향과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 


한마디로 나는, 전통적으로 보수당의 텃밭인 곳에서, 보수적인 정치 성향의 부모님 밑에서, 반공 교육의 마지막 세대로 살았다. 그 후로 제도권 교육을 받으며, 역사에 무지한 상태를 유지했다. 역사와 정치에 무관심했고, 어린 시절에 받은 반공교육만 가슴에 남아 ‘좌(左)’에 대한 심리적 반감을 일으켰다. 김대중, 노무현에 대해, 전라도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과 실체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내 나이 스물여덟,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당연히(라고 써서 미안하지만),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민주화운동’이란 표현보다 ‘사태’ 혹은 ‘폭동’이란 표현에 익숙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가사 한 줄 모르면서 찝찝하게 여겼고, 5·18 북한군 개입설을 반박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 잘못은 했겠지’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동시에, ‘괜히 국가가 폭력을 가했겠어?’라고도 생각했다. ‘세상에 털어서 죄 없는 사람 없듯이, 역사에서 전적으로 잘못한 쪽이 어디 있겠어?라는 양비론적 사고도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이렇게 살았다. 


/

가까스로 책 얘기를 시작한다. 책은 공권력이 시민을 압살한 사건의 기록이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 생생하다고들 하는데, 이 책을 두고 한 말 같았다. 무장한 군인들은 학생, 어른, 여자, 노인 할 것 없이 무차별로 폭행했다. 골목을 쫓아가 때리고, 버스에 들어가 때리고, 운전석에서 끌어내 때리고, 옷을 벗기고 때렸다.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대가 자국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살상했다. 그중에 압권은 다음 대목이었다. 


“오후 1시 정각 도청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그 순간 일제히 사격이 시작됐다. 1시 이전의 발포가 급작스런 상황에서 이뤄졌다면 1시부터는 명령에 따라 ‘집단 발포’가 시작된 것이다. / (중략) 그때 곽형렬(21세, 전투경찰)은 ‘애국가가 울려퍼지면 모두들 부동자세를 취하니까 흥분되어 있는 시민들을 잠시 멈추게 하려고 애국가를 울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국가가 채 끝나기 전에 한꺼번에 여러발의 총성이 울렸다. 탄피가 아스팔트 위에 툭툭 떨어지고 분수대 주변에 연기가 자욱했다. (중략) 장교인 듯한 사람이 소리쳤다. / “이 새끼들! 조준사격 안 하냐?” / 공수대원들은 그때부터 조준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중략) 이때까지 시민들에게는 총이 없었다.”(200-201쪽)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시민은 무의식적으로 예의를 표하고, 공권력은 ‘조준사격’을 자행한다. 국가주의의 비극을 이보다 생생히 보여주는 장면이 또 있을까! 신(神)이 된 국가는 애국가로 재림했고, 신의 대리자인 군부는 저항 세력을 신성 모독으로 몰았으며, 공권력은 사제의 신분으로 이단자를 처단했다. 국가가 종교의 권위를 취할 때 세상이 경험하는 기괴함을 단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준다. 20세기 초 세계사(世界史)는, 국가주의의 출현과 기승, 파괴력과 몰락을 보여줬다. 그 어떤 형태의 국가주의를 향해서도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수백만의 피를 흘려 인류가 얻은 교훈이다. 우리는 뭐가 부족해 그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다시금 피를 흘려야 했을까....... 


2017년 5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단 한 건의 유혈사태 없이 최고 통치자를 끌어내렸다. 나 역시 지난가을 내내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을 찾았다. 수줍게나마 ‘증언’하자면,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들은 질서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우리는 시위를 즐기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짧은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진일보했다. ‘국가의 폭력은 언제나 정당한가?’라는 질문은 더는 어색하지 않다. 그러나 이 땅의 민주주의가 80년대에 빚지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혹자가 역사를 왜곡하려 해도, 질문과 증언과 행동을 시작한 대중을 막을 길은 없다. 


/

‘간행의 말’에서 저자 대표는 이렇게 썼다. “5·18 왜곡세력들은 (중략) 이 책의 집필과정에 대한 왜곡과 집필자들에 대한 비난,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4쪽) 저자를 공격하는 것으로 책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도 이런 시도는 가시지 않은 것으로 안다. 여기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 설명을 위해 우회하는 것을 용서하시라. 


<마가복음>은 기독교 신약성서의 복음서 중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마가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마가는 다소 유약한 젊은이였다. 그는 바울의 선교여행에 수행원으로 동행했다가 중도에 하차했다. 그 다음 선교여행 때 바나바가 마가를 데려가려 했으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고(행 15:38, 새번역), 이 일로 두 위대한 사도(바울과 바나바)는 심하게 다툰 후 갈라섰다. 게다가 마가는, 예수를 배반한 베드로의 제자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마가란 위인은 미덥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마가의 전력(前歷)을 이유로 마가복음을 비판한다고 해보자. ‘선교지에서 도망간 사람이 쓴 복음서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어?’ ‘예수를 배반한 제자의 제자라며?’라는 식으로 비판할 것이다. 이 비판은 설득력이 있을까? 마가복음이 마가 개인의 저작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어디 가서 ‘복음서는 마가 개인의 저작이다’라고 말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삼가시라. 복음서가 경전(經典)이기 때문이 아니다. 복음서는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여러 증인의 증언이며, 교회 공동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저명한 신약학자 보컴(R. Bauckham)은 복음서를 ‘증언’으로 보며, “증언으로 이해하는 복음서는 예수라는 역사 속 실체에 다가가는 방법으로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한다(리처드 보컴, 『예수와 그 목격자들』(새물결플러스, 2015), 27쪽).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현대의 역사비평 철학과 방법의 발전 양상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강력한 경향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곧 증언을 신뢰하는 것을, 역사가가 독립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진리에 혼자 힘으로 다가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는 경향이다. 하지만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바로 다른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증언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위의 책, 같은 쪽)


복음서가 증언의 산물이라면, 복음서의 정당성을 마가 개인에게만 귀속할 수 없다. 그 속에는 마가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예수를 경험한 증인들의 목소리가 겹겹이 녹아 있다. 역사적 인물로서 예수는 증인들의 증언에 기초한다. 예수를 경험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예수를,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 기억했다. 그 기억이 모여 복음서의 뼈대가 되었다. 이로써 자기 손으로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던 예수의 말과 행적이 책으로 남을 수 있었다. 예수는 죽기 전 마지막 의식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를 기억하여라.”(고전 11:24, 새번역) 초대 교회는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다. 


『넘어넘어』의 85년 초판은 약 300쪽인데 비해, 이번 개정판은 600쪽에 달한다. 거의 두 배로 늘었다. 725번까지 이어지는 미주만 70쪽 분량이다. 30년의 세월을 반영하느라 분량이 늘었고, 늘어난 분량은 더 많은 목소리를 끌어안았다. “(전략) 기록의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몇몇 사람이지만 취재에 응하고 자신이 겪은 바를 구술한 시민들이 또한 함께 참여했으니 이 기록이야말로 동시대 민중의 증언이라고 할 만했다.”(10쪽) 누구의 말마따나, 양의 증가는 질의 향상을 수반한다. 기록으로 남은 증언은 시대의 어둠을 알렸다. 복음서가 증언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넘어넘어』 또한 증언의 산물이다. 복음서가 예수의 메시지를 매개했던 것처럼, 『넘어넘어』는 민주주의의 도래를 매개했다. 


/

책 한 권으로 역사의 전모를 파악했다고 말하지 않겠다. 그것 또한 다른 의미에서 무지이며 오만이다. 다만 피와 눈물로 80년대를 지켜내고 기억한 사람들을 지금 여기서 기억하겠노라 다짐할 뿐이다.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면, 기꺼이 투쟁하겠다. ‘기억하라’를 최소한의 당위로 삼겠다. 역사의 진보에 이름없이 기여하겠다. 이것은 시대의 증언에 바치는 부끄러운 고백이나, 부끄럽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진 않겠다. 부끄러워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됨이니까.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