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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1- 노승(老僧)

    

꿈을 꾸는

 

이 고깃덩이 몸.

 

언젠가 깰,

 

언젠가는 반드시 깨야 할,

 

깨야만 할

 

긴 꿈속에서 헤매는

 

이 덧없는 몸을 힘겹게 채찍질하며

 

철 들 무렵부터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질 때까지

 

용맹정진 하였으나

 

비천한 이 몸이 깨달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허망하게 흘러가

 

사라져버린

 

시간들만이 있을 뿐.

 

또 다시 나는 길을 잃었다.

 

이번 생에서,

 

 

다시.......길을 잃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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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2- 뱀파이어(Vampire)

 

 

잊었다.

 

잊어버렸다.

 

나는,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다.

 

보통 인간들의 수명보다

 

훨씬 오래 산 탓에

 

나는

 

많은 것들을

 

잊었고,

 

또한

 

그만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제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내 나이가 올해로 몇 살이 되었는지도,

 

덧없이 흘러가버린 시간 속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조차도,

 

아무 것도, 그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단 하나는

 

이 잔혹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주었던,

 

유일하게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름다운 그 여인의 얼굴에

 

수줍게 피어나던

 

들꽃 같은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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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3- ()

 

 

나는

 

아무것도 없던

 

텅 빈

 

끝없는 어둠으로부터

 

강렬하게 터져 나온

 

거대한 불꽃과 함께

 

태어났다.

 

내가 눈을 떴을 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정지되어

 

 

나는 깊은 상념에 빠진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고독의 화두(話頭)

 

천천히

 

곱씹어 보다

 

깨달은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나 홀로 존재함은

 

 

끝없는

 

무료함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게 주어진

 

이 잔인한 운명을

 

조금이라도 즐겨보기 위해

 

온갖 것들을 만들어내었다.

 

시간

 

공간

 

별들

 

생명체들

 

그것들의 형상은 모두

 

나에게서 나온 것이며

 

그것들의 의식 또한 모두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나는 이 우주의

 

최초의 설계자

 

.

 

나는 나와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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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4- 욕망

 

덧없는 꿈 속에서

  

 

스스로

 

 

미혹

 

   

끝없이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어리석음.

 

 

 

    

 

슬프도다,

 

아아, 인간이여.

 

슬프고 또 슬프도다.

 

=====================================================================

 

-독백 5- 종말의 여신

 

     

빛나는

 

 

 

 

붉은 드레스 자락

 

 

한번 펄럭이면

 

 

사라지네

 

 

하나의 우주가......

 

 

눈부시게 불타

 

 

 

정화되어

 

사라지네.

 

그때마다

 

나는

 

다시 태어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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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6- 건전지

 

 

문득 긴 잠에서 깨어나 보니

 

나는 그 무엇도 아닌

 

그저 건전지에 불과했다.

 

살아 숨 쉰다는 착각에 빠진 채

 

온갖 번뇌에 시달리며

 

살아가던 나의 안에서

 

뜨겁게 뿜어져 나오던

 

고통과 욕망의 에너지를 마시며

 

제 기운을 충전하는

 

온갖 악마와

 

온갖 신들의

 

건전지에 불과했다.

 

 

그렇다.

 

나는

 

처음부터 그 무엇도 아닌,

 

그저

 

그들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건전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차마

 

 

 

떨쳐내지 못하고

 

 

     

또 독() 마시고

 

 

 

 

 

 

 

 

 

 

 

 

새로운 건전지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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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어디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곳에 들어와 있었다.

 

낯설었다.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잠시 집에서 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든 사이에 납치라도 당한 걸까 싶어

 

매우 당혹스러웠다.

 

대체 누가 날, 왜 이런 곳으로 데려왔는지

 

알 길이 없어 더욱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애써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처럼 어디선가 끌려온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머릿수를 세어보았다.

 

여섯 명이었다.

 

물론 나까지 포함해서.

 

나는 힐끔힐끔 그들을 곁눈질하다가,

 

불안으로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내 딴에는 같은 처지에 놓인 친구들끼리

 

서로 말을 튼 다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나서

좀 더 나아가 이 이상한 곳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를

 

의논해보기 위함이었는데,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걸어도

 

그들은 말문이 막힌 듯 하나같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몇 차례에 걸쳐서

 

다시 그들과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여전히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무기력한 태도에,

 

나는 왠지 모를 조바심과 함께 짜증이 났다.

 

-이봐, 말을 걸면 좀 대답을 해 달라구.

다들 벙어리야? 에이, 답답해 죽겠네.

 

내가 짜증스레 말을 툭 뱉자, 그제야 그들 중

 

가장 힘이 세 보이는 덩치 큰 친구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좀 조용히 해줄래?

여기가 어떤 곳인지나 알고 그렇게 떠드는 거야?

 

나는 드디어 때가 왔구나 싶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딘지 모르니까, 이러는 거지.

같은 처지에 놓인 친구들끼리,

서로 말이나 트고 좀 더 나아가서

의논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야.

 

그 녀석은 내 말에 조금 흥미를 느꼈는지,

 

방금 전 보다는 약간 풀어진 표정으로 물었다.

 

-, 그러냐. 의논해보고 싶은 게 대체 뭔데?

 

-뭐긴 뭐야, 여기서 탈출할 방법이지!

우리 여섯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다면

여기서 나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거라구.

 

-흐음......여기서 나가는 방법이라......

 

내 말을 들은 그 덩치 큰 친구는

 

가만히 인상을 쓰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네 명을 힐끔 보더니,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 ,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여기서 나갈 방법을 의논해 보자고?

우리가 의논한다고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 같냐?

니 생각에는?

 

나는 미처 예상치 못한 그의 태도에

 

순간 벙쪘다.

 

-뭐야, 그게 비웃을 일이야?

 

나의 볼멘소리에, 그 덩치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던 녀석이

 

힘이 쭉 빠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여기서 나가는 건, 무리야, 무리.......

 

녀석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덧붙여 말했다.

 

-......나갈 수도 있겠지....... 원래, 우리가....... 여기로 오기 전에

먼저 온....... 녀석들은......., 여기서...... 나갔거든.

근데, 소름끼치는 건....... 여기서 나간 녀석들은 자신의 힘으로

나간 게 아니라, 어떤, .......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이한 물건에 잡혀서 밖으로 끌려 나갔다는 거야.......

 

 

 

 

그의 이상한 말에, 나는 이게 뭔 헛소린가 싶어

 

다시 그에게 그게 대체 뭐냐고 물어보았다.

 

-하아.......그게 뭐냐고.......? 그건 나도, 우리도 몰라.

다만, 그 괴이한 물건은 우리 머리 위의 천장을 뚫고 나와서는,

먼저 와 있던 녀석들을 하나 둘씩 잡아서 끌고 나갔다.

우리가 아는 건 이게........ 전부야......하아아아아........

 

그의 힘 빠지는 말을 듣고 있자니

 

진짜로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리에 누웠다.

 

그런 내 뒤로 그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녀석, 말은 자신 있게 하던데, 한번 얘기나 해 볼까?

-, 이 멍청아. 우리가 대가리 맞대고 의논한다고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 같냐? 허튼 소리 할 시간에 잠이나 더 자라.

 

-그래도, 밑져야 본전 아니.....!

, 으악 !! X!!!!

 

갑자기 들려온 욕설에 나는 멍 때린 채 있다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왜 그래?

 

그들은,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저 고갯짓으로 내게 천장을 보라고 일러주었다.

 

대체 천장에 뭐가 있기에

 

저 녀석들이 하나같이

 

잔뜩 겁에 질려 떠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시퍼렇게 빛나며 하늘하늘 거리며 움직이는 괴물이

 

천장을 뚫고 들어왔다.

 

그것을 본 나도 당연히, 그들처럼 기겁을 하며,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엄청난 공포로 인해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이 괴물이 방금 저들이 말했던 그것이구나 싶었다.

 

-야이 제기랄, 또 저 괴물이 들어왔어!

 

-어서 피해 ! X! X됐네.

 

-야 신입! 너도 어서 피해 임마!

 

-그래......하아.......나처럼 가만히 있다간......어라? 어엇!

 

 

 

무기력한 표정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힘 빠지게 말하던 그 친구는,

 

자신의 말처럼 괴물에게 잡혀 천장을 뚫고 밖으로 끌려나가버렸다.

 

-후우...... 저런 멍청한 놈.

 

-그러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

 

-이제 하나 줄었으니 다섯이네. 다음은 또 누가 될지 모르.....!

 

녀석들이 저마다 한 마디 씩 하며 떠들던 중,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그 괴물 놈이 내려와 한 녀석을 잡아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제 넷이었다.

 

우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아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제 괴물이 다음에 내려오는 때는 언제인지,

 

그리고 그 타겟은 누가 될지,

 

아무도 몰랐다.

 

아니, 도저히 알 수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 나는 그제야 왜 그들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여기서

 

이러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저 괴물은, 우리가 힘을 합친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렇게 두 녀석이 한꺼번에 괴물에게 잡혀가고 나서,

 

우리는 언제 또 녀석이 천장을 뚫고 들어와 우리를 잡아갈지 몰라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러다가 쏟아지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 나는,

 

눈을 뜬 뒤에도 혹시 누군가 괴물에게 잡혀갔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머지 셋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휴우-, 정말 다행이었다.

 

간밤에 아무도 끌려가지 않았구나 싶어서.

 

그리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에도

 

괴물은 오지 않았다.

 

뭔가 좀 싸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좀 뜸해진 괴물의 출현에

 

우리는 다소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서로 주고받는 말도 많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며칠간의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다시 천장을 뚫고 나타난 그 괴물은,

 

그 동안 벼르고 있었는지

 

이번엔 남은 세 친구들을 한 번에 몽땅 잡아가 버렸다.

 

이젠 여기 이곳에는,

 

나 혼자만 외톨이로 있게 되었다.

 

홀로 남겨진 나는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또 그 괴물이 천장을 뚫고 내려온다면,

 

그 때는 분명히 내 차례일 거라는 생각에.

 

그리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그 때가 오고야 말았다.

 

지난번에 나타났을 때처럼,

 

그 괴물 놈은

 

사납게 천장을 뚫고 내려왔다.

 

나는 어떻게든 그 놈을 피해보기 위해

 

애를 썼지만, 나의 움직임은

 

그 괴물 놈에 비해 너무나 느렸다.

 

결국, 먼저 갔던 친구들처럼 그놈에게

 

붙잡혀서, 강제로 끌려 나갔다.

 

방 밖으로 나오니,

 

그 괴물의 꼬리 끝을 감싸 쥐고 있는

 

다섯 갈래의 우악스런 기둥들이 보였다.

 

그리고 , 다른 한 쪽에서 나를 삼킨 괴물의 뱃속으로

 

그것들과 같은 모양의 것들- 다섯 개의 기둥들-

 

불쑥 들어와 내 몸을 움켜쥐곤,

 

그대로 꺼내어 바깥에 내동댕이쳤다.

 

온 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푸들거리며 경련이 일어나는 내 몸 위로,

 

차가운 물줄기가 와락 쏟아져 내렸다.

 

방금 전의 충격으로

 

어딘가가 잘 못되었는지, 숨도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번쩍이며 내게로 내려오는 거대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본 다음 순간,

 

그 번쩍이는 거대한 물건이 내 살가죽을 벗기더니,

 

매우 빠른 속도로 나의 살을 얇게 발라내어

 

썰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 살을 모두 발라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미 내 온몸의 살들은 발라진 채

 

뼈만 남아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고 살아있었다.

 

엄청난 고통으로 숨이 가빠왔다.

 

-으으으....... 먼저 끌려나왔던 녀석들도 이렇게 되어

 

죽은 건가...... 나처럼, 이렇게 끔찍하게......

 

 

내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마지막 남은 한숨을

 

뱉으려고 하기도 전에,

 

내 머리는 뼈만 남은 몸통에서 분리가 되었다.

 

머리 없는 내 몸통도, 그 번쩍이는 거대한 것에

 

큼직큼직하게 썰려 토막이 나 버렸다.

 

 

-제기랄, 잔인한 괴물 놈들......

너희들은 대체, 정체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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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오래 걸리네, 아직 멀었어요?”

 

모처럼 기분을 내려고 횟집에 외식을 나온 연인 두 명이,

 

주문한 메뉴가 늦자 짜증 섞인 목소리로 주방장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는 관록이 붙을 대로 붙은 사람이라,

 

조금도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사람 좋게 미소지으며

 

친절한 말투로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렇다 보니, 그들도 더 이상 짜증을 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뒤,

 

생각보다는 조금 늦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늦지는 않게

 

음식이 그들 앞에 놓여졌다.

 

 

~! 손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문하신 광어 C코스!

광어 한 마리로 뜬 광어회 한 접시에 회 뜨고 남은 걸로 매콤 시원하게 끓인

서더리탕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십쇼! 하하하하. 그리고 늦었으니까

  개불 한 접시 무료로 서비스!”

 

어머, 주방장님, 감사해요. 아까 짜증내서 미안했어요.”

됐어, 자기야. 왜 사과를 해. 어서 먹자, 이야~ 정말 맛있겠다.

자기 ~’ 해봐. 내가 먹여줄게.”

 

못 말린다니까, 정말, ~.”

 

여자의 입 안으로 들어간

 

광어의 살점이 쫄깃하게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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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탈주사건이 있은 뒤로, 시설의 아동 관리체계는

 

 

더욱 엄격하고 철저하게 바뀌었다.

 

그래서 아이는 더욱 더 시설의 아이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몸과 마음은 더욱 더 괴로워졌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티 하나 내지 않고

 

원래부터 난 이랬으니까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견뎌내고 있었다.

 

그렇다. 아주 조금 더 괴로워졌을 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진 것을 굳이 꼽자면,

 

아이가 정신이 다소 불안정한 아동으로

 

소문이 나는 바람에, 시설 선생님들 사이에서

 

일종의 특별관리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언제 또 어디서 이상한 사고를 칠지 모르니,

 

미연에 방지하자는 차원에서 그렇게 정해진 듯 했다.

 

그래서 , 아이는 등교할 때도, 하교할 때도

 

아이의 멘토 역할을 하는 상급생이 따라붙었으므로,

 

전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실, 말이 좋아서 멘토지, 그 상급생은 실질적으로는

 

아이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더 이상 하교 후에

 

나무 아저씨와 어울릴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 그동안 어울렸다고 해봐야 두세 번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물론, 그렇게 된 후로도 오다가다 몇 번 더 마주치기는 했지만

 

아이는 자신에게 따라붙은 상급생의 눈치가 보여

 

그에게 눈인사조차도 못한 채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무 아저씨는 서운해 하기는커녕

 

그저 빙긋이 미소 지으며 멀어져가는 아이의 뒷모습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아이가 현재 처한 모든 상황을 훤히 안다는 듯이.

 

그리고 점점 자신의 기이한 능력과 행동에 사람들이

 

이목이 쏠리는 것을 의식했는지,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의 그 기이한 능력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는 그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멍한 표정으로 하루 종일 나무들만을 빤히 바라보며

 

공원 벤치에 앉아있기만 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걸던, 그를 건드리던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그 자리만을 지켰다.

 

때때로 뜻 모를 미소만을 지으면서.

 

서로 그렇게 되다 보니, 아이와 그의 사이도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는 마음 한 구석에서 씁쓸함과 함께,

 

왠지는 모르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을 느꼈다.

 

아이는 언제든 혼자 몰래 밖으로 나가

 

그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 궁금한 것들도 많았고,

 

아직 더 맛보고 싶었다.

 

그 남자의 신기한 능력들을.

 

하지만 아이는 꾹 참고 하루하루를 견디어내었다.

 

그러다가 때때로 마음이 힘들어질 때면,

 

그 남자가 데려다 주었던 그 이상한 곳의 아름다웠던 밤하늘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달래었다.

 

그렇게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던 아이는,

 

문득 일전에 그 남자가

 

언제든, 네가 어디서 왔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질 때 펼쳐봐라

 

는 말과 함께

 

아이에게 건네주었던

 

희한한 감촉의 종이쪽지가 생각이 나,

 

밤중에 몰래 화장실 대변 칸에서

 

그것을 꺼내어 펴 보았다.

 

그러자,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았던

 

그 쪽지에서 하늘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글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글자들은 처음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이상한 낙서 같은

 

모양으로 나타났다가, 아이가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그것은 순식간에 한글로 바뀌었다.

 

종이에 떠오른, 홀로그램 같은 하늘 색 글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이스타우사라, 이라엔쿠스 아레데프 우스흐파하르

 

세흐가라바투사 호아스바레 우스흐파하르산 시그카나부 하스유레

 

마리세투아나 이스타우사라]

 

 

글자는 한글이 틀림없었지만, 두 번 세 번 읽어봐도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호기심에 글자를 손가락 끝으로 한 번 더 건드리자,

 

이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라엔쿠스출신 이스타우사라는 지구로 여행을 떠났다.

 

지구인들의 영적 진보를 돕기 위하여.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바로 그 사람, ‘이스타우사라본인이다.]

 

하지만, 읽고 대강 의미는 알 수는 있어도, 아이 입장에선

 

뜬금없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같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요새 잔뜩 화가 쌓여있는 상태였던

 

아이는, 짜증이 확 치밀어 올라 그 쪽지를 구긴 뒤, 갈기갈기 찢어서

 

변기에 흘려보낼까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겉보기엔 좀 이상해 보여도

 

이 물건은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았다.

 

희한한 감촉하며, 푸른 빛 이상한 글자들이 떠오르는 것만 봐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직 어린 아이가 보기에도 이 물건은 충분히 단순한 장난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아이는 다시 한 번 더 쪽지에 떠오른 글자를 읽어보았다.

 

이라엔쿠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 희한한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아 잠시 동안 눈을 감은 채

 

그 동안의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그 말이 어디서 들었던 말인지를 알아내었다.

 

바로, 사람들이 나무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그 남자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원래 자신과 아이가 속해 있던,

 

지구에서 108만 광년 떨어져 있다는, 별의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그 남자의 말과,

 

그가 준 이 이상한 쪽지에 나온 말이 사실이라면- ,

아이는 본래 이 별에서 지구로 여행을 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았지만,

 

단순한 속임수나 거짓말 같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는 일단 쪽지를 잘 접어서 주머니 안에 넣고는,

 

조용히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잠자리로 돌아갔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아이는 신기하기도 하고,

 

단순히 호기심이 생겨 한 번 더 몰래 그 종이쪽지를

 

화장실 칸에서 펴 보았지만, 아무리 오랫동안 그것을

 

들여다보아도 그 때처럼 글자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에 흥미가 사라진 아이는, 그것을 화장실 휴지통에

 

버리고 나왔다.

 

신기한 것을 보았다가도, 그것에 흥미가 떨어지면

금방 뒤돌아서는, 실로 아이다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따분하고 지치는 시간들은 느린 것 같으면서도

 

빠르게 흘러갔다.

 

느릿한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빠르게 흘러

 

쏟아져 내려가는 물의 흐름처럼.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 나무 아저씨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들로는, 대강 이런 예들이 있었다.

 

1 .공원 관리인에게 쫓겨났을 것이다


   

2. 근처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항의로 쫓겨났을 것이다

 

3.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4. 교통사고로 차에 치여 죽었다.

 

5. 길 가던 불량배들에게 맞아 죽었다.

 

등등.

 

어째 소문들이 하나같이 그다지 좋게 들리지 않는,

 

그런 것들이었다.

 

아이는,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은근히 그 남자가 걱정이 되었다.

 

진짜 소문대로 죽거나, 쫓겨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 소문을 확인할 길은 전혀 없었고,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하루에 지친 아이는

 

자연히 그에 대한 기억을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다.

 

그저,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흐릿한 추억으로

 

머릿속 한 구석에 남겨둔 채.

 

그렇게 시간은 건조하게 흘러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생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어느새 아이는 꽤 건장한 체격의 청소년으로

 

자랐고, 여전히 조용한 아웃사이더 기질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친구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나무 아저씨를 제외하고는 얘기를 주고받고 할 친구 하나 없었던 과거에 비하면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아직도 많이 내성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하지만, 그런 성격이 아이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글을 쓰는 재주였다.

 

아이는 늘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였던 때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다보니 자연히 사람보다는 책을 더 가까이하게 되었다.

 

(물론, 교과서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리고 , 유일한 말벗이었던 나무 아저씨와 어울리지 못하게 된 뒤로 부터

 

아이는 전보다 더 책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 그 아저씨가 사라져 버린 뒤로는

 

그러한 행태가 더욱 심해졌었다.

 

아마도 자신의 텅 빈 마음속을

 

그렇게, 글로 채운 것이 아닐까.

 

그러다 보니, 자연히 아이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읽어도 그것의 구조가

 

한 눈에 확 들어와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정리가 되었고,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는지도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내공(?)을 바탕으로,

 

고등학생이 된 후부터 조금씩

 

습작삼아 짤막한 소설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것들을 한 열서너 편쯤 써 놓았을 때 쯤,

 

우연히 한 친구가 아이의 단편소설 노트를 훑어보곤,

 

이런 말을 했다.

 

, 인수야, 잠깐 훑어봤는데, 니가 쓴 소설 재밌다.

 

이렇게 버려두기 좀 아까운데 말야,

 

인터넷 같은 데에 함 올려보는 건 어떠냐?

 

내 친척 중에 그렇게 해서

 

책까지 낸 형도 있거든.

 

근데 내가 봤을 땐 니가 그 형보다 좀 더

 

잘 쓰는 것 같아. 글을 재미있게.

 

내가 눈이 조그매도 나름 보는 눈이 있거든. 함 생각해봐라.”

 

그리고 그 친구의 말에 솔깃해진 아이는,

 

사람들이 꽤 많이 몰리는

 

인터넷 소설 게시판에 자신이 써 두었던 것들을

 

한편 두 편씩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나서, 아이가

 

먹고 살기 위해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여러 일용직들을 전전하며 힘겹게 지낼 때,

 

어느 새인가 아이의 작품들은 제법 인터넷에서 유명해져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이의 인터넷 소설 게시판 아이디로

 

쪽지가 왔다.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모 출판사 관계자인데, 우리와 손잡고 책 한번 내보지 않을래요?”

 

공모전을 통하지 않고 그저 이런 식으로 제의가 오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라서, 아이는 처음엔 좀 놀랐지만,

 

이번 기회에 자신의 재능을 한 번 더 시험해 봐야겠다 싶어

 

그 제안을 수락했다.

 

아이는 그 인터넷 쪽지에 적혀있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인터넷 소설 게시판의 이스타우사라입니다.

 

본명은 박인수구요. 쪽지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아이의 전화를 받은 담당자는 매우 반갑다는 투로 답했다.

 

아하, 제가 남긴 쪽지 보시고 연락 주셨군요?

 

선생님 소설 그동안 잘 읽었습니다. 근데 생각보다 목소리가

어리시네요? 하하.”

 

, 고등학교 졸업한지 한 1년 지났어요. 지금은 이것저것 노가다 하고 있구요.”

 

아아, 그렇구나, 생각보다 어리시네요, 하하하, 전 최소 20대 중후반은

 

되실 줄 알았는데. , 그건 그렇고요, 지금까지 쓰신 소설,

분량이 꽤 되는데 한번 싸그리 모아서 단편집 내실 생각 있으세요? 혹시?”

 

담당자의 말에, 아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 뜸을 들였다.

 

자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OK를 하고 싶었지만,

 

담당자의 의중을 잘 알 수가 없었기에 일부러 더 대답을 질질 끌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그가 아이에게 매달려왔다.

 

에이, 왜 이렇게 뜸을 들이세요, 이번에 책 내시면, 정식으로

 

데뷔하시는 거나 다름없어요. 선생님. , 그리고 저희 출판사, 사기꾼 아닙니다.

 

그건 아시죠? 하하하하하.

 

이미 이런 식으로 데뷔한 분들도 소수지만 몇 분 있어요.

 

근데 그 분들도 선생님 소설처럼 이렇게 딱 뭐랄까,

 

이거 괜찮은데? 물건이다, 마케팅만 잘 하면 꽤 팔리겠는데?

 

하는 그 뭐야, , 그래, 삘링, 그런 삘링이 있었거든요.

 

장담컨대 이거 엮어서 딱 내면 대박까진 아니더라도

 

최소 중박 이상은 칠겁니다. 10년 동안 여기서 소설 편집자로

 

근무한 제 말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하하하핫.”

 

 

 

 

담당자가 확실하게 자신의 글을 원한다는 걸 확인한 아이는,

 

그제야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네 그러죠. 저야 영광입니다.”

 

예에, 감사합니다, 박인수 선생님, 아니 이제 작가님이라고 불러드려야죠, 하하하,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그 닉네임, ‘이스타우사라’? 그거 어감이 독특한데,

 

그거 무슨 뜻이죠? 어디 외국말인가요?”

 

그의 말에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 그거 말이죠, 사실 별 뜻 없어요. 그냥 제가 지어낸 겁니다.”

 

아이의 말에 담당자는 크게 웃어대었다.

 

그리고 , 그 통화가 끝나고 한 달 뒤, 아이는 소설가로 데뷔했다.

 

자신의 첫 단편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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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곤하다. 일단 절반 정도 쓰긴 썼는데, 뭔가 맘에 안 들어.......”

 

밤을 새워서 나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소설로 적은 나는,

 

기지개를 켜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잠에서 깨어난 뒤,

 

자신이 적었던 소설을 쭉 다시 훑어보았다.

 

대강 쓰고 싶었던 것들은 다 썼는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 진짜 맘에 안 드네. 나무 아저씨 분량을 더 늘려줄까.......

 

소재는 좋았는데, 그걸 제대로 못 살렸네.

 

좀 더 영적인 느낌으로, 좀 더 환경주의적인 접근으로

 

가서 좀 더 신비롭게 꾸민 성장소설 같은 그런 소설이 되어야 하는데

 

..........짜증나네. 그냥 전부 다 갈아엎고 새로 다시 써야겠는걸. ”

 

나는 내 능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며, 적어두었던 원고를 읽다가 그대로 바닥에

 

휙 팽개쳤다.

 

됐다, 일단 고치기 전에 산책하면서 머리라도 식혀야겠다.”

 

대강 옷을 걸치고, 밖에 나가 바람을 쐬었다.

 

때마침 휴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밖에 운동 삼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맨날 글만 쓴다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 보니,

 

바깥 공기와 풍경이 한층 더 상쾌하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장시간의 작업으로 어깨와 등이 뻐근해진 나는 기지개를 쭈욱 크게 켜며

 

빠르게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가던 도중, 내가 어릴 적에 보았던 그 나무 아저씨

 

어딘가 닮은 느낌을 주는 한 노숙자가 내 옆으로 스윽 스쳐지나갔다.

 

나는 혹시 그 사람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이미 저 멀리까지 달려가

 

자리를 잡고 누워버렸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더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다시 저기까지 걸어가서 보고 올까도 싶었지만

 

귀찮기도 했고, 혹시라도 해코지를 당할 까봐

 

그러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 뭐 노숙자들은 다 행색이 비슷해 보이기 마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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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유난히 따스한 봄날.

 

지구 시간으로 정확히 2020, 날짜는 32.

 

나는 다시 이곳으로 여행을 왔다.

 

첫 여행 이후 정확히......몇 년 만이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역시 인간의 몸은 한계가 많아 이런 것도 잘 기억이 안 나는군.

 

하지만, 나는 방금 보았다.

 

스쳐지나간, 과거의 친구를.

 

다른 건 다 잊었어도, 그것만큼은 잘 기억하고 있었지.

 

그 아이는 어릴 때 모습이 좀 남아있긴 했지만,

 

이젠 제법 어른 티가 나는 듯 보였어.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겠지, 아니, 시작이다.

 

나의 두 번째 여행은. 그리고........,

 

때가 왔다, 드디어.

 

인수, 아니 이스타우사라 네가 이곳에 온 목적을 인지하고,

 

각성하여 지구인들의 의식을 한 단계 올려줄 발판이 될

 

그 소설을 쓸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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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로 2018-02-23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활한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이번에는 2회차 분량을 한 번에 올렸습니다. 만약 보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참고 부탁드립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강렬했던 첫 만남 이후

 

아이가 그와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은

 

그 때로부터 딱 일주일 후였다.

 

아이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시설로 향하던 중에

 

또 다시 공원에서 그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아이는 어딘가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희한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가 왠지 모르게 두렵게 느껴져 일부러 걸음을 재촉했다.

 

그 때, 공원 벤치에 앉아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남자가

 

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

 

거기 너, 잠깐 이리로 좀 와보련?”

 

그의 말에 깜짝 놀란 아이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이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약간 겁먹은 것 같았다.

 

하지만, 처음 마주쳤을 때와는 달리 곧바로 도망가지는 않았다.

 

아마도 남자의 말투와 눈빛에서 아주 약간의 악의조차도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탓인 듯 했다.

 

그래도 아직 아이가 자신을 경계하며 다가오지 않자,

 

남자는 미소 지으며 이리 오라고 계속해서 손짓했다.

 

왜요?”

 

아이가 퉁명스레 물었다.

 

너한테 할 말이 있단다.”

 

겉보기와는 다른, 상냥하면서도 어딘지 위엄이 느껴지는,

 

맑고 우렁찬 목소리였다.

 

순간 아이는 흠칫 놀라면서도,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마치 그의 목소리가 가진 이상한 힘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할 말이 뭐에요? 저 바빠서 얼른 가 봐야 해요.”

 

아이의 그 말에, 남자는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허허허, 그러니. 그럼 짧게 말하마. 그 전에, 네 이름은 뭐니?”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인수......,박인수에요.”

 

그래, 인수라...... 이름 좋구나.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남자가 잠시 뜸을 들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너는 나와 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란다.”

 

너무도 황당한, 뜻밖의 말에 아이는 당황했다.

 

같은 기운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이의 물음에, 남자는 차분히 대답했다.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끔, 아니 거의 매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다고 느껴본 적 없니? 아니면

 

아예 그러기 싫거나.”

 

남자의 말에, 아이는 정곡을 찔린 듯 화들짝 놀랐다.

 

?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았어요?”

 

말했잖니. 너와 나는 같은 기운을 갖고 있다고.

 

, 우리는 동류라는 거지.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다.”

 

남자의 그 말에, 아이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듯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무슨 헛소리에요. 그런 얘기는 나 같은 어린애도 안 믿어요.”

 

아이의 말에, 남자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빙긋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허허,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눈으로 판단해 보건대, 네 부모님 중 한 쪽은

 

이 세상 사람이지만, 다른 한 쪽은 아니란다.”

 

아이가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지자,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말을 바꾸었다.

 

으음, 으음......, 으음, 아니, 아니야. 네 부모님은 두 분 다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거야.

 

, 그렇고말고. 그 분들은 내가 살던 세상의 존재들 이란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틀림없어.”

 

남자의 해괴한 말에, 아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일었다.

 

약간 정신 나간 것 같은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어딘지 제법 그럴싸하게 느껴져서.

 

아저씨가 살던 세상이요? 그럼 아저씨 대체 어디서 온 거에요?”

 

아이는 머리로는 남자의 말을 의심스럽게 여겼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마음에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끌림을 느꼈다.

 

나는 말이지, 지구로부터 108만 광년 떨어진 이라엔쿠스별로부터 왔단다.

 

이곳은 아주 멋진 별이란다. 지구 사람들 눈으로 본다면 극락, 천국, 낙원 같은 곳이지.

 

지구처럼 가난한자, 굶주리는 자, 남을 괴롭히는 자들도 없고, 그러니 당연히 전쟁도,

 

슬픔도, 고통도 없고, 돈 같은 것도 없단다. 모두 다 자연과 함께 어울려서 살고,

 

그러니 더 가진 자, 더 못 가진 자 같은 것도 없지.”

 

남자는 꼭 무슨 삼류 SF소설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를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청산유수처럼

 

쏟아내었다. 하지만, 어린 아이가 듣기에도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라엔쿠스라는

 

이상한 이름의 별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가만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아이를 바라보며,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 말했다.

 

아마 네 부모님께서도 나와 같은 별 출신일 거야. 너 아기 때 보육시설 앞에 버려져있었지?

 

그건 네 부모님께서 널 버린 게 아니라, 일부러 그러신 거야. 네가 장차 자라서 지구인들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하게 성장하도록 이끌라는 뜻에서. 하지만, 이것은 네가 원해서

 

이렇게 된 일이기도 해. 사실 우리별은 지구와 같은 우주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상위차원의 우주에 속한 별이란다. 그러니, 이곳 사람들은

 

여기 지구사람들처럼 물리적인 몸,

 

아니 물질적 육체, 아니아니, 이렇게 말하면 네가 어렵게 느끼겠구나. , 이걸 어떻게

 

말해야하지......, 그래. 이렇게 손에 잡히는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단다.

 

일종의 몸다라카이나 상태지. 아니, 이런, 나도 모르게 우리 고향 말이 튀어나왔네.

 

지구 말로 하면 영혼개념과 비슷하단다. 너도 그건 알겠지? 그래서, 정리하자면

 

우리 별 사람들은 영혼상태로 살다가 계속되는 평화로운 삶에 질리면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 다른 세계, 다른 우주로 여행을 떠난단다.

 

물론, 이 여행은 강제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 하는 것이란다.

 

, 자신이 원하기에 시작하는 것이지.

 

이 여행은 좀 특별한 의미로, 지구 사람들의 여행과는 좀 다르단다. 우리 별 사람들이

 

여행이라 부르는 이것은-, 물질계에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한참동안을 가만히 남자가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이가 남자의 말이 잘

 

이해되지가 않는 듯, 따분하다는 듯 하품을 했다.

 

죄송해요, 아저씨. 그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우리 부모님이 외계인이라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요.

 

물질계는 또 뭐구요. 호기심이 일긴 하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두 모르겠어요.

 

난 이제 가볼래요. 늦게 들어가면 선생님들이 화내요.”

 

아이의 짜증스런 말투에 남자는 약간 당황한 듯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허허, 이런, 아직 네겐 좀 어려운 이야길 했나 보구나. 그럼 가 보거라. 하지만,

 

내 말은 전부 사실이란다. 그러니 네가 어디서 왔는지, 네가 이리로 여행 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해 보거라. 당장은 아니더라도 네가 살아가다 보면 그 이유를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게 될 거다.”

 

남자는 뜻 모를 말을 하고는, 마지막으로 덧붙여 말했다.

 

네 스스로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손등 위로, 어디선가 날아온 참새가 앉았다.

 

남자는 자신의 손등에 앉은 참새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는, 잠시 참새와 무슨 교류라도

 

하는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참새를 쓰다듬다가 잠시 뒤 녀석을 날려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나무를 쓰다듬으며 무어라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런 그의 모습에 잠시 벙 찐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대로 공원을 지나 시설로 걸어갔다.

 

정말, 이상한 아저씨야.’

 

아이가 생각하기에 그 남자는 정신이 약간 맛이 간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희한하게 그다지 싫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겉보기와 달리 목소리가 좋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럴싸하게 동화 같은 이야기를 잘 지어내서 그런 걸까.

 

아이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시설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담당 선생님께 잔소리를 들었다.

 

정해진 귀가 시간 보다 1시간이나 늦게 들어왔다며.

 

아이는 무성의하게 죄송합니다, 한 마디를 내뱉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오자마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방 안의 아이들은 숨죽인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방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 시설 상급생들이 하급생들을 갈구는 것 같았다.

 

그들은 늦게 들어온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이에게 단 한 마디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늘 그랬듯이 무자비한 구타를 가했다.

 

아이의 작은 몸 위로 쏟아지는 무수한 발길질과 주먹질,

 

그리고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설들.

 

하지만 아이의 몸과 정신은 이런 일에 이미

 

신물 날 만큼 적응되어 있었다.

 

아프면 아픈 거고, 기분이 나쁘면 나쁜 것.

 

그게 전부였다.

 

어차피 조금만 참으면 때리다 지쳐서

 

그만두겠지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까 전에 공원에서 만났던 그 이상한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원래 이 세상보다 더 좋은 곳에서 살던

 

자신이 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아니면 무엇을 하기 위해

 

이런 세상으로 온 걸까 싶은.

 

아이는 그 남자의 말이 전부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대강의 큰 줄거리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은 어린 아이가 듣기에도

 

전부 정신 나간 헛소리처럼 들렸지만,

 

정말로 그의 말이 맞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일들이

 

다 스스로가 원해서 이리 된 것이니,

 

너무 괴롭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차례의 구타가 끝난 후, 상급생들은 방을 나가며 하급생들을 을러대었다.

 

너네 앞으로 똑바로 해라. 1시간이나 저 혼자 늦게 들어오는 놈이 있는데

니들끼리만 슥 들어오고 말야, 아무리 X같은 놈이라도 다 같은 집에서 사는 한 식구야.

 

앞으로 서로 잘 챙겨라, 알았냐?”

 

상급생들이 나가자, 방에 있던 아이들은 곧바로 굳어있던 행동과 표정이 풀어졌다.

 

, XXX, XX이야. 지들은 우리만할 때 몇 시간이나 맨날 늦게 오고선.”

 

그러게, 누가 들으면 지들만 X나 의리판줄 알겠네.”

 

아 몰라, 다 그게 저XX 때문 아냐, 박인수 저 병XXX.”

 

, 박인수 너 하나 땜에 우리가 다 단체로 욕먹어야겠냐? 좀 잘하자, .”

 

, 아 진짜. 오늘 나 저 XX 한번 손봐줘야겠어. 더 맞아야 앞으로 정신차리지.”

 

야아, 아 진짜 너 왜 그러냐, 이미 형들이 XX하고 나갔잖아, 참아라, 참아 인수 저 새X

 

원래 이상한 애잖아.”

 

, 놔보라고 이 XXXX.”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이는, 한숨을 쉬며 말없이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마자 때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시설의 선생님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아이를 보자마자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싸늘한 말투로 물었다.

 

, C생활관 인수구나. 조금 있음 저녁식사 시간인데, 어딜 가니? 그것도

 

너 혼자서.”

 

아이는 그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지금 오줌이 좀 급해서요.”

 

, 그래서 혼자 급하게 나왔구나. 그럼 나랑 같이 가자. 너 일 보는 동안

 

내가 밖에서 기다릴게.”

 

고맙습니다.”

 

아이는 화장실로 급하게 후다닥 달려갔다.

 

하지만 시간이 꽤나 흘렀음에도,

 

아이는 좀체 화장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선생님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소변기 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대변기 칸막이 안에도 아무도 없었다.

 

다만, 화장실 창문이 열려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1층이라 아이가 그리 어렵지 않게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 것 같았다.

 

보육원생의 돌발행동으로, 시설엔 비상이 걸렸고,

 

보육교사는 당직 몇 명만 시설에 남아 아이들을 관리하고,

 

나머지 교사 등 직원들은 사라진 아이를 찾기 위해

 

시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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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렸다.

 

아이는 달렸다.

 

싸늘한 공기로 가득 찬

 

세상 속을.

 

어느새 해는 저물고

 

어둠이 짙게 깔렸다.

 

아이는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 지도 모르는 채,

 

그저 달리기만 했다.

 

이제는 다 짜증이 났다.

 

이제는 다 꼴 보기 싫었다.

 

이제는 다 지겨웠다.

 

규칙을 들먹이며 구타를 일삼는 상급생도,

 

아이를 따돌리는 동기 아이들도,

 

아이를 요주의 인물로 정해놓고 매번 감시만 하는

 

선생님들도.

 

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등에 날개라도 갑자기 생겨나서

 

저 높은 하늘로 날아올라

 

이 세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이는 한참을 달리다가, 숨이 차서 공원 언저리에서 달리기를 멈추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비단 그것은 숨이 차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아이는 숨을 헐떡헐떡 몰아쉬다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 동안 감정을 죽이고 지냈는데,

 

이번 일로 그동안 쌓여왔던 서러움이 폭발한 듯 했다.

 

아이는 한참을 울다가, 갑자기 자신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검은 형체에

 

소스라치게 놀라,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소리가 공원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검은 형체는 적잖이 당황한 듯 쉬잇하며

 

입가에 손가락을 올려 아이를 진정시켰다.

 

다시 아이가 놀란 마음을 추스린 후에,

 

자세히 보니 아까 하교할 때 만났던 그 이상한 남자였다.

 

이봐, 이 오밤중에 너, 왜 예까지 와서 우는 거니 ?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구나. 잠깐 휴식이 좀 필요하겠어.

 

날 따라와라.”

 

그 남자는 내 손목을 끌어당겨 어딘가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마치 축지법을 쓰는 것 같았다.

 

아이는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그에게 거의 끌려 다니다 시피 하다가,

 

그가 걸음을

 

멈추자 그제야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맙소사.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깊은 산 중턱에 올라와 있었다.

 

아이는 동네에 이런 큰 산이 있었나 싶어 매우 놀란 얼굴을 하곤,

 

남자에게 물었다.

 

, 아저씨, 여긴 , 여긴 어디에요?”

 

남자는 다소 당황한 듯한 아이를 보며 크게 허허허 웃더니,

 

어디긴 어디야, 공원 뒷산이지.”

 

하고 대답했다.

 

네에? 공원 뒷산이라뇨? 여기 공원에는 산은커녕 주변에 작은 언덕도 없는데.”

 

아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따지듯 묻자, 남자는  가만히 수염을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허허허허, 그렇지. 그러고 보니 공원 주변엔 이런 곳이 없었지.

 

하지만, 그건 지구인들이 사는 공간에서의 이야기고-”

 

남자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얘야, 하늘을 한번 바라보렴.”

 

아이는 남자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빛깔은 아이가 익히 알던 새카만 색이 아니었다.

 

수십, 아니 수백, 수천가지의 아름다운 색깔들이 눈부시게 빛나며,

 

마치 유동하는 액체처럼 흘러내리고, 그 아름다운 빛의 물결들이

 

바로 눈앞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지만, 너무도 아름다웠다.

 

, 저기 아저씨...... 하늘이......색이......!”

 

남자는 예의 그 푸근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놀란 아이의 어깨에 손을 툭 얹어 그를 진정시키곤,

 

이렇게 말했다.

 

어때, 아름답지? 이 멋진 풍경을 본 사람은 지구에서 너밖에 없을 거야. 아마도.”

 

남자는 잠시 눈을 감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라지 마라.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가 익히 알던 공원 한가운데란다.

 

작은 분수대가 중앙에 서있고, 주변엔 소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는 곳.

 

너도 잘 알거다.”

 

아이가 놀라서 무어라고 말하려는 찰나, 남자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쉬잇 하며

 

아이의 입을 막았다.

 

 

여기는, 바로 그 공원 한가운데의 다른 모습이란다.

 

다시 말해, 이곳은

 

지구에 무수히 중첩되어

존재하는 다차원들의 공간들 중 하나란다. 그래서 산이 없는 곳에 산이 있고, 밤하늘이

 

저렇게 화려하게 빛나는게지.”

 

하지만 아이는 남자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죄송한데요, 아저씨.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치만, 멋지긴 하네요.”

 

그 말에, 남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허, 그래 뭐, 이해 못하더라도 괜찮다. 어차피 네가 좀더 크면

 

내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 올 테니. , 그럼 이제 우리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볼까.”

 

남자가 아이의 손목을 꽉 붙잡더니, 발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 같은 것이 아이의 얼굴을 때리고 지나가는 가 싶더니,

 

다음 순간 강렬한 빛이 확 눈으로 들어오면서, 정신이 얼떨떨해졌다.

 

어지러운 눈을 비비며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빛이었다.

 

그리고 주변 풍경도 원래 아이가 익히 알던 공원의 한가운데였다.

 

어허, 이런. 괜찮니?”

 

남자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아이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아이는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 괜찮아요.”

 

남자는 아이의 몸에 묻은 흙을 털어준 뒤, 자신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었다. 낡은 종이쪽지 같은 것이었는데,

 

종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감촉 또한 희한했다.

 

언제든, 네가 어디서 왔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질 때, 이것을 펼쳐보렴.”

 

아이가 잠시 망설이다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게......, 뭔데요?”

 

그 때였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떼거지로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아이를 찾으러 헤매던 시설의 선생님들과 직원들이었다.

 

인수야! 박인수 !”

 

너 거기서 뭐하니? ”

 

어서 일로 와 ! 너 찾느라 진짜......!”

 

그들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어느새 인수를 에워쌌다.

 

그러다가, 그들과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씩 웃어 보이더니, 뒤돌아서 성큼성큼 걷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장면을 목격한 그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수에게 연달아

 

괜찮니?’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던 중, 직원들 중 하나가

 

잠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 선생님들. 방금 그 남자...... 누군지 생각났어요.”

 

그의 말에, 선생님들과 다른 직원들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대체 저 수상한 사람, 누구에요?”

 

아는 사람이에요?”

 

그들의 물음에, 직원은 안경을 벗더니 이마의 땀을 훔치고는,

 

입을 열었다.

 

저 남자, 이 동네 주변에서 꽤나 유명한 노숙자에요.

 

언젠가부터 갑자기 여기 나타나서는, 하루 종일 공원 벤치에 앉아

 

나무랑 이야기하질 않나, 새들을 자기 몸 위에 앉히곤 노래를 부르지 않나,

 

한 번은 그냥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 나비며, 새들이며, 길고양이들이

 

그의 주변을 에워싼 적도 있었어요. 물론 이건 부풀려진 소문이 아니라-,”

 

직원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여 말했다.

 

제가 직접 그걸 봤어요. 그리고, 이 동네에서 그를 사람들은 이렇게 불러요.”

 

“ ‘나무 아저씨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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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그거 아니? 본디 사람이란 존재는 말이지-.

 

이 세상 만물과 소통할 수 있단다.”

 

어딘지 수상쩍어 보이는, 남루한 옷차림의 사내가 아이를 보며 씩 웃어보였다,

 

바보 같지만, 왠지 모르게 그 모습에서 티 없이 맑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아저씨, 만물이 뭐에요?”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 하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아무래도 아직 어려서 그 말의 뜻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만물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란다. 사람, 짐승, 풀과 꽃, 나무들 그리고-”

 

남자가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여 말했다.

 

, , , 바람 등등도 포함해서 말이지.”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의 그 천진난만한 미소를 띤 채로.

 

아이는 그런 남자의 말에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에이, 아저씨도 참,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 그럼 저기 강아지랑 고양이, 새들하고도

 

말이 통하게요?”

 

아이의 말에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허허 웃으며 답했다.

 

그으럼. 동물은 물론이고 저기 저 나무와 꽃들, 바람과 하늘, 그리고 저기 저 산 속에 흐르는

 

시냇물하고도 얘기할 수 있단다.”

 

다소 초현실적으로 들리는 그의 말에, 아이는 샐쭉한 표정을 하곤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아저씨, 지금 내가 어린애라고 놀리시는 거죠? 그죠?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자신을 빤히 노려보는 아이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남자는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아니란다. 이 아저씨는 네게 거짓말 같은 거 안 한단다.

 

, 굳이 그럴 마음도 없고. 그래, 어디 보자......내 말을 못 믿겠다 이거지?

 

그럼 내가 시범을 보여줄게. 자아......일단 저기 저 나무 위에 앉아있는 참새에게

 

이리 오라고 신호를 보내볼게.

 

자아, 잘 봐라......”

 

-----------------------------------------------------------------------------

 

빠빠빠빠빰 !

 

빠빠빠빠빠빰 !

 

빠빠빠빠빠바밤!

 

빠빠빠빠, 굿모닝 !

 

 

아침 6.

 

 

휴대폰 알람이 시끄럽게 울렸다.

 

, 그 꿈이었다.

 

어린 시절에 나의 유일한 친구였던,

 

그 수상한 아저씨가 나오는.

 

그는 지나가는 눈길로 한번 슥 훑어봐도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별로 좋지 않은 의미로.

 

그는 마치 노숙자처럼 보이는 남루한 차림새에,

 

최소 10년이 넘게 한 번도 자른 적 없는 듯한

 

긴 머리칼에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긴 수염까지 달고 있었다.

 

만약 사람들이 그를 길거리에서 보게 된다면,

 

저 사람은 아마도 광인(狂人)아니면 기인(奇人)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노숙자일 거라고,

 

저마다 한 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수군거리기 딱 좋은 그런 타입이었다.

 

하지만 그는 남들이 자신을 보고 뭐라고 떠들건 개의치 않았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동물들과, 식물들을 포함한, 자연 그 자체였다.

 

물론,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고 하기는 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사람보다는 동물을 좋아했고, 동물보다는 식물을 좋아했다.

 

그는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이 세상 만물이 다 좋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식물이 좋더라.”

 

나는 지금도 그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지만, 그의 표현을 빌려서

 

써보자면- 식물은 배고프다고 칭얼대지도 않고, 털도 안 날리고,

 

똥오줌도 안 싸기 때문이라나. 또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식물들은

 

그 하나하나가 지구 그 자체와도 같다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그 시절로부터 25년이나 지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는 쭉 외톨이였던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 그렇다고는 해도 그는 정신이 약간 맛이 간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매일 외톨이로

 

심심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그와 함께 있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그만큼 나는 외로웠고,

 

이 세상에 기댈 곳이, 기댈 사람이 마땅히 없었기에

 

그의 이상한 매력에 빠져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돌이켜보면, 또래 아이들이 내게 다가오지 않고 나를 슬슬 피했던 이유는

 

내가 보육시설에 사는 고아였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아이들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무언가 자신들과는 다른, 아니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로 보여서 그랬을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하지만, 그는 나를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는 나와 같다며 내게 먼저 다가와 주었었다.

 

만약 그 때, 내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면, 과연 또래 아이들은 내게 다가와서

 

친구가 되어주었을까?

 

글쎄,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나는  한 동안 아직 잠이 덜 깨어 흐릿한 눈을 비비다가

 

졸음을 쫓기 위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대강 이를 닦은 뒤, 샤워를 했다.

 

현재 시간은 640분이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이리도 시간이

 

빨리 갈 줄이야.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일을 하기 위해 직장을 나갈 필요는 없었으니까.

 

왜냐하면, 현재 내 직업은 소설가였으므로.

 

나에게 천직과도 같은 이 직업을 갖기 위해

 

지난 세월 동안 꽤나 고생을 많이 했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부모 얼굴조차도 모르는 고아로 태어나

 

보육시설에서 자라왔고, 상황이 그렇다보니 제대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보육시설에서는 같이 지내는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도 급우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따돌림 당하는 이유는, 소름끼칠 만큼이나 간단했다.

 

넌 다른 애들과 다르다

 

이 짧은 한 마디가 바로 그 이유였다.

 

어이없게도.

 

그래서 따돌림에 질릴 대로 질린 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대체 뭐가 내가 너희와 다르냐고 물었을 때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잘 모르겠지만, 그냥 넌 좀 느낌이 다른 애들하고 달라.

 

그래서 기분 나빠.’

 

 

그 말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내 안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리고 더욱 억울했던 것은, 남들이 내게서 보는 그 기분 나쁜 느낌이

 

대관절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스스로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와도 어울리지 못한 채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지내다가

 

초등학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즈음,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바로 그 수상한 남자를.

 

믿기 어렵겠지만,

 

그는 하루 종일 벤치에 앉아 나무와 대화를 하거나, 참새나 비둘기 따위의 새들을 곁에 두고

 

그들을 쓰다듬었으며, 때때로 길고양이나 버려진 개들과도 어울렸다.

 

그리고 아주 가끔 곤충들도 무슨 이유에선지 그의 곁에 머물렀다.

 

정말 신기했던 사실은, 그가 따로 먹이 같은 걸로 동물이나 곤충들을 유혹하는 게 아니라,

 

그가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어느새 그것들이 슬금슬금 곁에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그는 꼭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우리 동네에서 목격되기 시작했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우리 동네에 나타나기 이전에

 

그를 본 적이 있다고 얘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약간 몽롱한 상태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 보다 보니,

 

문득 이 이야기를 소설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펜을 들고 노트에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어린 시절의 내가 만났던 그 때의 이야기를.

 

 

-----------------------------------------------------------------------------

 

아이는 항상 외톨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늘 혼자였다.

 

자신을 낳은, 아니 이 세상에 던져놓은

 

부모의 얼굴조차도 몰랐다.

 

아이가 어느 정도 분별력이 생길 때 즈음에

 

보육 시설의 원장에게 들은 바로는,

 

누군가가 아이를 이 시설 문 앞에 놓아두고 갔다고 한다.

 

아이는 처음에 자신에게 부모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시설에 딸려있던 사설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로 입학했을 때,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면, 학교 입학식에 자신과 같은 시설 출신 아이들만 빼놓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부모가 함께 나와 같이 사진을 찍고, 같이 손을 잡고 걸어가고, 식이 끝난 뒤에

 

하하호호 웃고 떠들며 외식을 하러 갔기 때문에.

 

이 일이 있기 전에는 그냥 내게는 부모가 없으니까 없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 이 일을 겪고부터는 그렇지가 않게 되었다.

 

이제 아이는 자신이 미처 몰랐던, 아니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감정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달콤한 맛은 아니었다.

 

쓰디쓴, 아리디 아린, 왠지 모를 슬픔과 그리움이

 

한데 뒤섞여 엉킨 듯한,

 

그런 아픈 맛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감정을 느낀 것은 비단 아이 뿐 만이 아니라,

 

같은 시설에서 지내는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입학식 이후로 생애 처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그들은

 

학교에서도 자기들끼리만 뭉쳐 다녔고, 그런 이들을

 

같은 반 급우들이나 선생들이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환경에서 사는, 급우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었을 지도

 

모르나, 그렇게 하기엔 자신들과 급우들은 너무도 달랐다는 걸 진즉 알아차렸기

 

때문이리라. 아마 그들은 양친이 다 있는 급우들을 보며, 저들을 자신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사는 존재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설 아이들과 보통의 아이들 사이엔 늘 어떤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듯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된 원인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나 증오라기 보단

 

오히려 서로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랬으리라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설 아이들 중에선 보통 아이들과도 위화감 없이 잘 어울려 지내는

 

녀석들이 몇 명 있었으나, 이들을 고깝게 여기던

 

 시설 아이들의 집단에게 그 녀석들이 린치를 당한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시설 아이들과 보통 아이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터진 후부터 학교에선 시설아이들을 특별관리 대상으로 삼고

 

감시하기 시작했으며, 학교 교직원들의 회의에서는 시설 아이들만을 따로 모아 반을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어른들의 생각에는 모든 아이들을 보호하고 쓸 데 없는 충돌을 막기 위해

 

나름 머리를 굴린 것이겠지만, 그런 소문이 퍼지고 나서 서로간의 분위기는

 

더욱 더 악화되었다.

 

그런 혼란스런 상황에서,

 

아이는 매우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는 그 어떤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아이는 시설 아이들에게나 보통 아이들에게나

 

따돌림을 당했다.

 

네가 뭐 그리 잘났기에 아무하고도 어울려 놀지 않는 거냐면서.

 

하지만 아이는 그렇게 따돌림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냈다.

 

굳이 저런 모자란 녀석들과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의 생각이 이렇다 보니

 

괴롭힘 당하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느껴졌고,

 

무뎌진 감각은 아픔, 미움, 분노, 슬픔조차도 다 잊게 만들었다.

 

다만, 그런 것들이 이젠 다 귀찮고 지겨웠다.

 

신물이 날 정도로.

 

그래서 아이는 한 번은,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대체 내게 왜 이러냐고, 난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괴롭히냐고.

 

아이의 그런 질문에, 되돌아온 그들의 답은 이랬다.

 

 

'잘 모르겠지만, 그냥 넌 좀 느낌이 다른 애들하고 달라.

 

그래서 기분 나빠.’ 

 

 

맞아, 넌 정말 우리들과 너무 달라.'

 

 

그리고 넌 그 어느 편에도 속해 있지 않잖아.’

 

 

 

 

 

 

 

 

그 말을 듣자, 아이는 억울했다.

 

그렇다고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렇게 괴롭고 따분하게 지내던 어느 날, 아이는 학교를 마치고 시설로 돌아가던 중에

 

공원을 지나가다가 아주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이는 처음엔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절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기이한 광경의 주인공은 바로, 웬 거지처럼 허름한 옷차림을 한 채로

 

 나무를 쓰다듬고 있는 남자였다.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그저 공원 화단에 심어놓은 나무를 쓰다듬다가,

 

잠시 멈추고 나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가를 반복했다.

 

그것은 아직 어린 아이가 보아도 충분히 이상하게 보일 만한 장면이었다.

 

그 수상한 남자는 한참 동안이나 그러고 있다가,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하던 일을 멈추고 뒤를 슥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이와 그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순간 깜짝 놀라 그대로 후다닥 도망쳤다.

 

저 남자가 자신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두려웠기 때문에.

 

점점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남자는,

 

이내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채로, 다시 나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봐, 드디어 나와 같은 친구를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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