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행간마다 잔혹한 붓질 그 둘은 사드보다 외설스러웠으니…
게워내듯 쓴 소설이다. 아름다운 토사물 같다. 나혜석을 오랫동안 품고 또 품고 있다가 어느 순간 참을 수 없었다. 컴퓨터 자판에 엎드려 함정임은 울컥울컥 속엣 것을 꺼내 놓는다. 그때 좁은 어깨의 경련 같은 것….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여성 화가이자 소설가였던 나혜석은 일본에서 최승구와 연애를, 프랑스에서는 33인 민족대표였던 최린과 연애를, 그리고 1948년 서울 용산에서 행려병자로 죽었다. 나혜석에게는 교토 제국대 출신 변호사인 김우영이 남편이었다.
이 소설은 나혜석을 썼다지만 어디에고 나혜석이란 이름은 없다. 그녀는 ‘R’이라는 이니셜로 존재한다. R을 추적하는 소설 속 주인공은 서른두 살 가은이란 여인으로, 번역가이자 다큐 작가이다. 아니 함정임 자신이라는 것을 독자는 곧 눈치채게 된다.
가은은 다큐멘터리 감독인 박윤식의 열정에 이끌려 R의 생애를 찾아 나선다. 우에노 공원 끝자락에 있는 도쿄예술대학, R의 첫사랑인 최승구가 다녔던 미타의 게이오 대학, R의 얼굴을 마지막 영상으로 간직한 채 최승구가 숨을 거두었던 전남 고흥, 비틀린 몸으로 R이 찾아들었던 수덕사 수덕여관, 그리고 절정의 R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파리의 셀렉트 호텔….
대략 70~80년 전쯤 나혜석이 움직였던 동선(動線)을 그대로 밟으면서 가은은 자신을 흘려보낸다. 가은은 R을 향해 ‘그들은 그들의 시대를 살았다, 나는 그들과 너무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다’(24쪽)고 말했지만, R은 어느새 가은의 가슴을 점령하고 있었다. ‘R의 텍스트가 광장의 찢어진 깃발처럼 펄럭거렸다’(40쪽). 다른 한편 평생을 아버지가 숨겨놓은 여자로 살았던 작은어머니, 그녀의 고향인 도쿄, 그곳에서 들렸던 까마귀소리가 소설 전·후반을 음울하게 감싼다.
▲ 함정임은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기적이다."라고 말했다. | |
17세기 최초로 화가의 반열에 여성의 이름을 올렸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R과 동시대를 살았던 멕시코 화가 프리다 갈로, 마티스의 ‘마티스 부인의 초상’, 그리고 R이 그린 자화상이 강렬한 이미지로 소설을 지배한다. 소설의 행간마다 붓질의 어두운 톤과 속도감이 느껴진다. 그들에게 잔혹성과 아름다움은 동행했다.
제목보다 몇 배 중요할 소설의 첫 문장을 써놓고 함정임은 올가미에 머리를 집어넣는다. 이제 발 밑의 걸상만 걷어차면 그녀의 몸은 허공에 뜰 것이다. 소설가에게 첫 문장은 아내와 16개월을 별거 중인 M의 사랑보다 치명적이다. 가은은 ‘여기, 한 여자가 있다’는 첫 문장을 버리지 않았으나 끝을 보지도 못했다.
일본에서 고흥까지 찾아온 애인 나혜석 앞에서 단 하루 남은 생을 헐떡거리며 최승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당신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그때 마음먹었어요. 당신을 다시 만나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라고…”
나혜석도, 가은도 이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한스 노삭의 소설 ‘늦어도 11월에는’을 혼자 자는 침대의 머리맡에 두고 읽으셨던 독자들께 ‘춘하추동’을 권한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한수산의 ‘안개 시정거리’,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마루야마 겐지의 ‘천 년 동안에’,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등의 첫 문장을 모듬으로 읽는 보너스가 있다.
2002년 가을부터 동서문학에 6회 분재됐던 소설이다. 함정임은 ‘작가의말’에서 “써지지 않던 소설이 도쿄에서 돌아와 형벌처럼, 써졌다”고 말했다. 소설 제목 ‘춘하추동’은 일본의 스테디 앤드 코(Steady & Co.)라는 록 앤드 힙합 밴드의 프로젝트 앨범 수록곡이다. 첫 소절부터 가은의 귀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다는.